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65)
묘한 인기척에 레기안이 고개를 들었다.
평소라면 분명 모르고 지나쳤을 기척. 아니, 다른 사람이었다면 분명 몰랐겠지. 하지만 이 사람의 기척은 어쩐지 소란스러웠다. 엄청나게… 빛이 난다고 해야 할까?
아무리 책에 몰입하고 있어도 무시하기 쉽지 않았다.
“이런. 방해가 될까 싶어 조용히 들어왔는데. 시끄러웠나?”
소리 때문이 아니라 기척이 시끄럽습니다만.
하지만 레기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고개를 내저어 보였을 뿐이었다.
헤르젠에서 생활하면서 얻은 그만의 노하우였다.
모르는 척, 아닌 척하는 게 가장 편하다. 무언가를 알면,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만 하는 법이니까.
“왕자는 정말로 책을 좋아하는군.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서고에 오는 이는 쿠온 경을 제외하곤 처음 보았네.”
루비나드는 즐겁다는 듯 그렇게 말했다. 그 웃음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레기안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무언가 용건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그건 아닌데…. 오늘 이상할 정도로 일찍 눈이 떠져서 말이야. 씻고 단장까지 마쳤는데도 이 시간이지 않겠나. 오랜만에 후원에 가려다가 왕자의 모습이 보여서 괜히 들어와 봤네.”
잘 웃는 사람이다. 처음 봤을 때의 이미지와는 꽤 달랐다.
레기안이 처음 제국에 왔던 날, 그녀는 어딘지 나른한 듯 살짝 내리깐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오만함 가득한 얼굴에 나른함이 더해져 묘한 색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보다 더 강하게 느껴지는 건 위압감이었다.
뭐랄까. 마치 커다란 맹수의 앞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헤르젠에서 날고 긴다는 검사들과 검을 맞대어 본 적도 많았지만, 이 정도의 위압감을 느껴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건 위압감이라기보다 차라리 생존 본능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당장 여기서 도망가야 한다는.
그러나 이 서고에서 처음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날 이후로 좀 달라졌다. 그녀는 잘 웃고, 잘 화내는 사람이었다. 감정이 풍부하다고 해야 할까. 항상 무덤덤한 레기안과는 정반대였다.
“그렇습니까.”
그렇게 말을 마친 그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루비나드를 보았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이리저리 둘러보던 그녀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함께 보러 간 이후에도 몇 번 더 연극을 보러 갔다고 들었네.”
“아…, 네.”
“왕자도 즐거웠던 것 같아 다행이야. 표정에서는 별로 티가 나지 않아서 내심 불안했었거든.”
내가 즐거워하건 하지 않건 그게 저 황제와 무슨 상관일까. 그렇게 생각하던 레기안의 머리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정치적인 문제인가.
비록 쫓겨나듯 제국으로 왔지만, 어찌 되었건 레기안은 결연을 맺기 위해 여기에 있는 것이었다. 헤르젠 왕국과 제국의 가교. 그러니 레기안을 홀대한다는 것은 헤르젠 왕국을 우습게 본다는 뜻과 같았다.
하지만 제국 정도면 헤르젠 왕국과 전쟁이 난다고 해도 분명 제압할 수 있을 텐데.
헤르젠 왕국에 있을 때는 다들 로간도, 악토그라토리아도 별 볼 일 없다고 떠들어 댔었다. 자신들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 그 증거라고. 두 제국이 서로를 견제하는 사이 헤르젠이 끼어들면 골치가 아파지니 그런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는 듯했다.
왕궁에서만 생활했던 레기안 역시 그런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제국에 와 보고 고개를 내저었다.
제국은 헤르젠과는 차원이 달랐다. 포탈이라는 걸 처음 봤을 때부터 생각했지만, 생활이나 문화 수준도 마법력도 월등했다. 게다가 가끔 지나가다 보이는 기사들의 기백만 보아도 헤르젠과는 달랐다.
이곳의 기사들은 절제되고, 고요했으며, 끝없이 스스로를 단련했다. 혈기가 앞서는 헤르젠의 기사들과는 다르게 마치 물이나 얼음 같았다.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느낄 정도로.
심지어 최근엔 악토그라토리아에게 데지니움을 선물 받았다고 들었다. 깊은 친애의 표시로 악토그라토리아가 선물하곤 하는.
그러니 이제 자신의 비위를 맞출 필요도 없을 텐데.
“의아한가?”
“네?”
“짐이 왕자의 기분을 신경 쓰는 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어서.”
레기안의 손이 흠칫 떨렸다.
표정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건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알아챈 걸까.
그런 레기안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루비나드가 웃으며 눈을 가리켰다.
“왕자는 눈에서 감정이 잘 드러나더군.”
“눈… 말입니까?”
“눈빛도 그렇고, 눈이 움직이는 것도 그렇고. 꽤 알기 쉽다네. 쿠온 경에 비하면 말이야.”
쿠온 경, 이라는 건 그 국서를 말하는 거겠지. 하지만 그 남자는 꽤 표정이 풍부했었던 것 같은데.
“쿠온 경도 말이야,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데 능숙하거든. 감정의 동요도 그리 많지 않고 말이네. 그래서 알아내기가 어려워.”
“…그렇습니까.”
그런데 왜 그런 이야기를 자신에게 하는 것일까.
레기안은, 조금이라도 빨리 루비나드가 이 자리에서 사라져 주기를 바랐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한다는 건 언제나 기력이 소모되는 일이었다. 무얼 생각하는지 무슨 뜻으로 이야기하는지를 생각하고 그에 맞는 대답을 해야만 하니까.
레기안은 그런 대화 기술이 미숙한 데다 능숙해지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다.
어차피 그는 이대로 스러질 것이다. 이 제국의 후궁에서, 누구의 눈길도 받지 않고 죽은 것처럼 살아가다가. 그러니 누군가와 대화하는 기술 따윈 필요 없었다.
“왕자는 어딘지 쿠온 경과 닮았네.”
“그렇습니까?”
레기안은 차가운 얼굴의 미남자를 떠올렸다.
외양도, 성격도 그리 닮은 것 같진 않은데. 어디에서 비슷한 점을 발견해 낸 것일까, 이 황제는.
“으음. 쿠온 경도 이래저래 일이 많아서…. 그래도 이젠 주변 신경 쓰지 않고 제 할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네. 왕자 역시 그런 성격이더군.”
확실히.
루비나드가 오기 전에 몇 번 제빌과 서고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는 마치 레기안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행동했다. 물론 레기안 역시 신경 쓰지 않긴 했지만.
“짐은 쿠온 경과 왕자가 친밀한 사이로 지내길 바라고 있네.”
친밀한….
굳이, 왜?
황제의 이야기는 대부분 이해되지 않는 것이었지만, 지금의 한마디가 가장 이해되지 않았다.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저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음?”
의외의 답이었는지, 루비나드가 고개를 갸웃하며 레기안을 보았다. 하지만 레기안은 그 몸짓에 반응하지 않고 그저 눈을 내리깐 채 담담히 말을 이었다.
“아버지께서도 신경 쓰지 않으실 겁니다. 제게 죽은 듯 없는 듯 조용히 살라고 하셨던 분이니까요. 별다른 소식이 없다는 것에 만족하실 분입니다.”
오히려 무언가 별난 짓을 한다는 소문이 들리면 더 싫어할 사람이었다. 아버지라는 사람은.
레기안의 존재 자체가 그의 심기를 거스르는 모양이니까.
“그러니 폐하께서도 제게 신경 써 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국서 전하께서도 마찬가지고요.”
할 말을 모두 마친 레기안이 눈을 들었다.
거기엔.
“…….”
묘한 표정을 짓는 루비나드가 있었다.
눈을 치켜뜬 채 살짝 입술을 벌리고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지금 자신이 무언가… 다른 사람이 충격받을 이야기를 했던가?
“…미안하군. 왕자에게 부담을 주려던 생각은 아니었네.”
겨우 정신을 차린 듯 루비나드가 살짝 눈썹을 찌푸린 채 그렇게 말했다. 어딘지 죄책감이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음. 정말로… 미안하군. 조금 전에 짐이 했던 말은 모두 잊어 주게.”
그 말을 남긴 루비나드는, 평소와 다르게 다소 느른한 모습으로 서고를 나섰다.
왜 저러는 거지.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레기안이 작은 한숨과 함께 의문을 날려 버렸다.
어차피 형식상의 결혼이다. 상대의 생각이나 감정까지 알아야 할 필요도, 궁금해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니 지금 중요한 건 그녀가 들어오기 전까지 읽다가 멈췄던 책의 뒷부분을 읽는 것이었다.
…그럴 터인데.
“…….”
늘 빠르게 집중할 수 있었던 레기안의 머리에 자꾸 루비나드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글 내용을 헤집고 아까의 그 묘한 표정이 계속 떠올랐다.
그가 집중하기까지는 평소와 달리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 * *
“…하.”
생각할 것도 많은데 또 생각할 게 추가되었다.
제빌은 손에 든 서신을 촛불 위로 가져갔다. 화르륵 타오르는 종이를 쟁반 위에 내려놓고 온전히 재가 되길 기다렸다. 자글자글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종이 사이로 에브니겔이라는 단어가 슬쩍 비쳤다가 사라졌다.
에브니겔, 엔도르빌 그리고 레기안.
레기안이라는 카드는 생각보다 에브니겔에게 강하게 먹혔다. 좀 더 부추겨야 하나 생각했는데. 덕분에 이대로 가면 예정보다 빠르게 에브니겔을 치워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문제는 엔도르빌과 레기안이었다.
엔도르빌은 생각한 것 이상으로 꼬리를 잘 드러내지 않았다. 규모를 알아야 대비를 할 텐데. 힘없는 백작가의 차남인 베카르티가 이 정도의 일을 은폐하긴 힘들 테니 틀림없이 커드닐과 슐라민 공작이 힘을 쓰고 있는 거겠지.
보르본 공작까지 얽혔나? 아니, 얽히지 않았어도 얽어야 한다. 괜한 복수의 씨앗을 남겨 두어서 좋을 건 없었다.
그들의 목적은 제빌이었다. 그러니 일을 크게 만들 생각은 없을 터. 그걸 크게 만드는 것이 제빌의 노림수였다.
더 커져야 한다. 루비나드와 제빌을 가로막는 모든 방해물을 한꺼번에 처리해야만 했다.
의외로 자잘한 사건에는 사람들이 고개를 들이밀지 않는 법이다. 겨우 이런 일로 잡힐 순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반면, 일이 커지면 몸을 사리던 이들까지 참가하는 경우가 있었다. 어차피 실패하지 않을 테니까.
그들에게 절대 실패하지 않을 거란 확신을 줘야 한다. 동시에 제빌이 통제할 수 있는 수준이어야 한다. 그 ‘정도’를 유지하는 게 꽤 골치 아팠다.
그런데.
“신경 쓸 필요 없다고 생각했는데.”
루비나드의, 레기안에 관한 관심이 나날이 커지고 있었다.
-오늘 새벽에 왕자를 만났네.
-새벽에요?
-으음. 그대가 아직 자고 있을 때. 씻고 나왔는데도 시간이 좀 남아 후원에 가려다 서고에 있는 그를 보았어.
무시하고 지나갔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생각은 마음속으로 밀어 넣고 제빌은 엷게 웃어 보였다.
-그러셨습니까.
-그는….
루비나드는 어딘지 서글퍼 보이는 눈으로 입을 열었다.
-그는 확실히 제빌 경, 그대와는 닮지 않았더군.
그렇겠지. 그 남자는 자신이 아니라 루비나드와 닮았으니까.
제빌은 이어지는 이야기를 기다렸다.
-그는, 아마도 또 다른 그대일지도 몰라.
-…또 다른 저라니요?
제빌과 닮지는 않았지만, 또 다른 제빌일지도 모른다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일까.
-그는 그대만큼 상처가 많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뜻이야. 그리고, 어쩌면 그대가 되었을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 이후로 루비나드는 입을 다물었다. 제빌도 더는 묻지 않았다.
불길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분명 루비나드에게 큰 관심이 없었다. 호의도 없었다. 그저 물건을 보듯 무심하기만 했다.
그런데.
“폐하, 당신은….”
설마 그에게 무언가를 느끼신 것입니까.
제게서는 느끼지 못했던 무언가를.
그사이 서신은 완전히 타올라 까만 재가 되었다. 그저, 까만 재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