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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 (63)화 (64/115)

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64)

3층짜리 석조 건물은 웅장하고도 우아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이미 몇 번 방문해 본 루비나드도 방문할 때마다 설렐 정도였다. 처음 와 보는 레기안은 틀림없이 더 들떴겠지. 보라색 눈동자가 흘끗 왕자를 곁눈질했다.

레기안은, 겉보기엔 담담해 보였다. 하지만 루비나드의 눈에도 보일 정도로 꽤 들떠 있었다.

“여기가 극장이군요.”

“극장에 온 것도 처음인가?”

“네. 성 밖으로는 거의 나가 본 적이 없었습니다.”

페르안 왕세자는 꽤 자주 밖으로 나간다고 들었다. 헤르젠의 왕국민들이 그를 사랑하는 이유기도 했다. 왕세자임에도 평민들과 가까이 지내는 그 인성을 칭송하는 것이다.

반대로 레기안 왕자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였나.

루비나드의 마음 한구석이 씁쓸하게 물들었다.

“유명한 극단이 오는 건 드문 일이지만, 극장에서는 거의 항상 연극이 열리고 있네. 그대가 원한다면 호위를 데리고 언제든 와도 좋아.”

“…감사합니다, 폐하.”

그렇게 말하는 레기안에게서는 여전히 호의를 느낄 수 없었다. 그건 루비나드가 둔해서만은 아니었다.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는 제빌에게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들어가도록 하지.”

북적거리는 인파를 헤치고 루비나드가 먼저 자리에 앉았다. 그 뒤를 바짝 따라오던 제빌이 다음으로 자리에 앉았고, 레기안은 좀체 가까이 오질 못했다.

사람들 사이를 헤치기는커녕 딱딱하게 굳어 있는 그를 보며 루비나드가 말했다.

“왕자는 사람들과의 교류가 익숙하지 않아 보이는군.”

“…그러게요. 제가 데려오도록 하겠습니다.”

“으음.”

루비나드가 그를 계속 신경 쓰는 게 거슬려서 꺼낸 말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게 제빌의 호감 표시라고 생각한 건지 루비나드가 흐뭇한 미소를 띠었다.

정말이지, 둔한 사람. 제빌은 작게 한숨을 내쉬곤 레기안에게로 다가갔다.

“이쪽입니다, 왕자.”

“…죄송합니다.”

레기안이 제빌의 뒤를 바짝 따랐다. 그러다 인파에 휩쓸려 멀어졌다가도, 그 자리에서 기다려 주는 제빌 덕분에 금세 다시 뒤따를 수 있었다. 두 사람이 루비나드의 곁에 왔을 땐 꽤 시간이 지나 있었다.

“고생했군, 두 사람 다.”

엷게 웃는 루비나드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은 금빛 눈동자가 주변을 살폈다. 무대나 주변의 사람들을 훑어보는 그 시선에는 묘한 탐욕이 서려 있었다.

어쩌면. 늘 같은 환경에서 같은 것만 해 온 그이기에 새로운 것에 대한 욕망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루비나드는 아주 조금 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늘 나오는 배우는 이 극단에서 최근 뜨기 시작한 유망주라고 합니다.”

루비나드의 시선을 눈치챈 제빌이 재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그의 꿍꿍이대로 왕자에게 향해 있던 보라색 눈동자가 제빌을 향했다.

“호오. 그대는 연극에 별로 흥미가 없는 줄 알았는데.”

“처음 황자와 보러 오셨을 때부터 좋아하시기에 잠시 공부를 했습니다.”

“그대는 학구열이 넘쳐서 탈이야. 조금은 적당히 해도 될 텐데.”

“아직 깊이 있게 공부한 건 아닙니다.”

아직, 이라는 건 앞으로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겠다는 건가.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문화 예술 계열 쪽으로도 국비 지원 사업을 요청하는 기관들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에 루비나드가 피식 웃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대의 열의에 감탄했을 뿐이니 신경 쓰지 말게.”

그런 느낌의 웃음소리가 아니었는데. 제빌은 물끄러미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돌렸다. 뭐, 흥미를 이쪽으로 돌린 것만으로도 목적은 충분히 달성했으니.

주변을 둘러보던 레기안은 어느새인가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두 분은 사이가 좋으시군요.”

“음?”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멍한 어조로 흘린 한마디는 사람들의 소리에 묻혀 루비나드의 귀에 닿지 못했다. 저도 모르게 내뱉은 진심에 레기안은 고개를 내저었다.

레기안의 부모는 그리 사이가 좋지 못했다. 국왕과 정실인데도 불구하고.

레기안의 아버지는 왕세자를 낳은 후, 더 이상 아이를 낳지 않았으면 한다고 아내에게 말했다. 그도 그럴 게 정실의 아이가 많아지면 왕위 계승을 할 때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많았다. 그 역시 같은 배에서 태어난 형제들로 인해 꽤 고생을 했었고.

하지만 왕비의 생각은 달랐다. 왕위 계승 분쟁이 있기에 도리어 더 아이가 많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실의 아이에게만 왕위 계승권이 있는 게 아니다. 왕세자인 페르안이 혹시라도 잘못된다면 왕비는 끈 떨어진 연이 되어 버린다. 하나뿐인 적자를 잃은 후엔 누가 그녀를 챙긴단 말인가.

그래서 왕비는 피임하라는 왕의 명령을 거슬렀다. 그렇게 태어난 것이 레기안이었다.

당연히 왕은 진노했다. 심지어 이미 잉태한 아이를 지우라고까지 이야기했다. 한 번도 왕을 거스른 적 없던 왕비는, 제 남편과 싸워 가며 아이를 지켜 냈다. 그래서 레기안이 태어났을 땐 이미 두 사람의 사이는 걷잡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존재만으로도 왕의 심기를 거스르는 존재. 아버지는 처음부터 레기안에게 없는 듯 살라고 명했다. 형을 거스르지 말고, 눈에 띄지도 말고 그렇게 조용히 죽은 것처럼.

하지만 레기안은 너무 뛰어났다. 검술을 훈련하는 시간이 제 형의 반도 되지 않는데도 왕국 검술 대회에서 우승해 버릴 정도로. 물론 다른 분야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럴수록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이는 더 나빠져만 갔다.

언제나 부모님이 싸우는 모습만, 그것도 저로 인해 싸우는 모습만 봐 왔던 레기안에게 다정하고 친밀한 두 사람의 모습은 충격에 가까운 것이었다.

“…어차피 다르지 않을 테지.”

아직은 아이가 없어서 그렇다. 황위 계승권이 문제가 되는 먼 훗날이 되면 어찌 될지 아무도 모른다. 심지어 이미 로간 제국은 장녀 계승이라는 새로운 선례를 만들지 않았던가.

그 어떤 나라보다도 더 격한 계승 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어차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레기안은 그저 조용히, 없는 사람처럼 있으면 된다. 그 무엇도 자신에게는 상관없는 일일 테니까.

그 무엇도.

레기안은 두 사람의 모습에서 눈을 떼고 무대로 시선을 옮겼다.

* * *

“하.”

촛불조차 없는 어두운 방 안. 에브니겔의 입술이 비틀어졌다. 오만한 생김새인 만큼, 그 입가에 비웃음이 스미자 몹시도 사나워 보였다. 시종은 가만히 그를 지켜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저하.”

“알고 있어. 알고 있다고.”

으득, 하고 이를 간 에브니겔이 손안에 서신 뭉치를 내려다보았다.

형님의 줄을 타지 못하고 권력의 뒤안길로 밀려난 귀족들이 그에게 힘을 보태겠다고 서약하는 내용이었다. 생각한 것보다도 훨씬 많은 숫자였다.

하긴, 형님은 지나치게 좁은 인간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선별된 귀족들과만 어울렸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정해 준 사람들과의 교류. 그 외의 다른 사람들과는 교류가 없었다.

반면 에브니겔은 다양한 이들과의 교류가 있었다. 사교계의 영애들에게 난봉꾼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기도 했지만, 동성의 귀족들과도 꽤 잘 어울렸다.

남녀노소와 어울려 지낸 보람이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들은 이런 걸 원하고 에브니겔과 친분을 쌓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찌 되었건 그에게는 달가운 일일 터였다.

그런데.

“젠장.”

손에 든 서신 뭉치를 패대기치듯 내려놓은 에브니겔이 머리카락에 제 손가락을 밀어 넣고 거칠게 휘저었다.

이 좋은 소식을 들은 날, 하필이면 그동안 신경 쓰고 있지 않았던 로간 제국의 황궁에서 소식이 들어왔다. 루비나드가 후궁에 들이기 위해 헤르젠의 제2 왕자를 데려왔다고.

어째서.

왜.

“나가.”

“…적당히 하십시오.”

“나가라고!”

그 마음을 어찌 모를까. 시종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밖으로 나갔다. 혼자 남은 에브니겔은 욱신거리는 머리를 싸쥔 채 눈을 꽉 감았다.

대체 왜 자신은 안 되었던 걸까.

처음에 너무 무례하게 굴어서? 하지만 그건 이미 사과하지 않았나. 아무리 그녀가 황제라도, 황자인 그의 사과를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그녀 스스로도 용서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자신은 거부당하고, 그 보잘것없는 왕국의 왕자는 되는 걸까.

있는 거라곤 군사력뿐인 무식한 나라. 그런 곳에서 온 왕자가 루비나드의 아름다움을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에게 야만적인 짓을 할지도 모를 일 아닌가.

그런데 왜.

대체 왜.

“왜 나는 안 되고, 그 새끼는 되는 건데.”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왕자에 대한 미움이 솟구쳤다.

오늘 그녀와 그 함량 미달의 남자가 헤르젠의 왕자를 데리고 극장에 갔었다고 했다. 처음으로 극장에 와 본다며 눈을 반짝이던 그녀가 아직 생생한데, 거기에 왜 내가 아닌 다른 놈들과 함께 가는 것일까.

처음으로 그녀를 데려간 건 에브니겔인데.

왜 자신만이 여기에 있는 것일까.

왜 그놈들은 그녀와 함께였던 것일까.

왜 자신은 두 번 다시 그녀와 함께 연극을 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없게 된 걸까.

…어쩌면.

“당신은, 약한 자들에게만 끌리는 건가.”

그래. 그거라면 이해가 된다.

제국의 공작가에서 태어났지만 몰락한 가계의 삼남으로 태어난 국서.

칭제조차 하지 못한 나라의 차남으로 태어난 후궁.

루비나드는 무언가가 결핍되어 있는 사람을 좋아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니 자신은 안 되는 건지도 모른다.

…아니, 그래도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자신은 왜 안 되는 걸까.

이토록이나 텅 비어 있는데.

그녀를 만나기 전에는 알지 못했다. 자신이 보고 있는 세상이 흑백이라는 것조차 몰랐다. 그녀가 색을 입혀 주기 전에는, 그는 자신에게 무언가 결핍이 있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가 알게 만들었다.

당신이 알게 만들었다.

그런데 왜.

“…그런 건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어.”

당신이 약한 것을 사랑한다면, 나는 반대가 되어 주겠다.

그 약한 것들이 맛볼 수 없는 당신의 감정들을 모두 내 것으로 만들겠다. 미움이든 혐오든 증오든.

뭐든 좋다.

당신이 주는 감정이라면 그 어떤 것이든 이 세상을 빛내는 색이 될 테니까.

차라리 내 세상이 온통 질척한 색으로 물들어 버리면 좋겠다. 그렇다면 나는… 당신이 흐릿하게 내비쳤던 그 밝고 따스한 감정을 다시 바라지 않게 될 텐데.

“이제 상관없어.”

그는, 힘으로 모든 것을 손에 넣을 것이다. 루비나드는 틀림없이 그를 혐오하겠지. 그걸로 충분했다.

그걸로.

어차피 가지지 못할 감정이라면 차라리 가질 수 있는 걸 탐하는 게 더 나았다. 감은 눈 뒤로 보였던, 그녀의 호의 섞인 미소 위를 혐오 섞인 눈동자가 뒤덮었다.

그걸로 됐다.

어둠 속에서, 그의 눈꺼풀이 열렸다.

새빨간 눈동자가 마치 지옥의 업화라도 머금은 듯 형형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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