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 (62)화 (63/115)

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63)

레기안 왕자는 조용히 하루를 보냈다.

대부분의 경우 서고에서 시간을 보냈는데, 가장 즐겨 보는 건 연애 소설이라며 시녀들이 떠들어 댔다. 다만 무덤덤한 얼굴로 보기 때문에 기분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가 없다는 게 흠이라고.

드물게 여유 시간이 생겨 제빌까지 서고에 있으면 황궁 안의 시녀들이 모여들어 앞을 기웃거리곤 했다.

“오늘은 두 분 같이 계시네.”

“보는 책은 정반대지만.”

“생긴 것으로만 보면 국서 전하가 연애 소설을 읽고, 왕자 저하가 병법서를 읽으실 것 같은데.”

수군거리는 소리를 못 들을 정도로 제빌은 둔하지 않았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흘긋 입구를 곁눈질하면 모여들었던 시녀들이 화들짝 놀라 흩어지곤 했다. 그러고 나면 반사적으로 헤르젠의 왕자를 보게 되었다.

보면 볼수록 그가 이상으로 생각하는 체격과 얼굴 생김이었다. 딱 보기에도 강인해 보이는 얼굴과 까무잡잡한 피부. 거기에 단단한 체구까지.

아마 루비나드와 함께 나란히 서는 것만으로도 그림이 되겠지. 자신과는 달리. 그렇게 생각하면 괜스레 속이 쓰렸다.

레기안은 그런 시선이나 수군거림 따위는 들리지도 않는지 언제나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겉보기엔 표정의 변화가 없어 보였지만, 누군가의 감정을 살피는 데 예민한 제빌에게는 보였다.

그는 진심으로 소설을 보며 슬퍼하고 또 기뻐했다.

“그대는 책을 보러 간다더니, 왕자만 바라보고 있군?”

금빛 눈에 비치는 감정에 휩쓸려 잠시 왕자를 바라보고 있는 사이, 귓가에서 들린 목소리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폐하?”

루비나드가 서고에 오는 건 드문 일은 아니었다. 몸을 움직이는 걸 좋아하는 그녀였지만, 책도 싫어하지 않았다. 특히 식물도감이나 동물도감, 새로운 조경법에 관한 책이 나오면 꼭 들르곤 했다.

다만 그가 이토록 흔들리는 이유는….

“왕자는 집중력이 대단하군. 거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는 해도, 기척은 느껴질 터인데.”

“악의가 없는 기척은 잘 느끼지 못하는 듯합니다.”

“흐음….”

루비나드는 제빌과 레기안이 닮았다고 했지만, 제빌이 보기엔 오히려 루비나드와 그가 닮아 있었다.

레기안은, 첫째인 왕세자보다 월등히 뛰어난 사내였다. 그런데도 왕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자신을 단련하고 또 글을 읽는 것에만 흥미를 보였을 뿐. 그 역시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자신은 어느 나라와의 결혼 도구에 지나지 않을 것을.

왕세자인 페르안은 인격적으로 훌륭했고 부친인 국왕 역시 그를 각별히 아꼈다. 그 부분은 루비나드와 조금 다를까. 하지만 형은 레기안의 재능을 아꼈다고 들었다.

그게 도리어 부친인 헤르젠 왕의 심기를 거슬렀다. 둘째인 레기안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페르안의 왕위를 위협하는 존재였다. 그래서 지난번, 제국과의 동맹 회의에서 루비나드를 요구한 것이었다.

제국의 성의를 보기 위해서라는 명목도 있었겠지만 페르안에게 루비나드를 붙여 주어 제국을 등에 업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겠지.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루비나드가 황제가 되면서 페르안의 아내로는 맞이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레기안을 루비나드에게 떠넘기는 것이었다.

레기안은 그 속내를 모를 정도로 어리석은 남자가 아니었다. 분명 알면서도 순순히 제국으로 온 것이겠지. 상냥하고 훌륭한 제 형을 위해서, 그리고 결혼 도구인 자신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

뭐, 레기안 왕자는 측근에게도 제 속내를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하기에 추측에 불과하지만. 더 깊게 조사해 보도록 의뢰해 두었으니 아마 곧 손에 들어올 터였다.

헤르젠 왕가의 내부 사정이.

여하간 루비나드가 그에게 관심과 흥미를 보이는 게 썩 달갑지 않았다. 유유상종이라고 했던가. 비슷한 자들끼리는 서로 끌리기 마련이니까.

그 끌림이 사랑과 애정으로 변모하는 건 분명 어렵지 않은 일이리라.

“말을 걸면 싫어할까?”

“…말을 거시게요?”

“으음. 이러니저러니 해도 내 후궁에 들어올 이가 아닌가. 애정을 요구하지 않는 건 좋지만, 너무 먼 것도 조금…. 내가 그를 냉대한다고 소문이라도 나면 곤란하잖나.”

루비나드의 말대로였다. 하지만, 왜인지 제빌은 계속 가슴 한구석이 서늘했다.

“…그럼 말을 걸어 보시죠. 저한테 물으셔도 잘 모릅니다. 저도 그와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이 없기에.”

다소 퉁명스럽게 말이 나갔다. 레기안과 처음 만났을 때의 직감, 그는 절대로 루비나드의 애정을 갈구하지 않으리라는 직감을 믿기로 마음먹었으나 여전히 질투는 났다.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거겠지.

“그대는?”

“저요?”

“원래 초록은 동색이라고도 하고, 닮은 사람끼리는 친해지기 쉽다고 하지 않나. 그대와 금방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은데.”

“…바라신다면 노력은 해 보겠습니다.”

“으음. 그렇군. 그럼 부탁하네. 나보다는 그대가 먼저 말을 걸어 주는 게 그에게도 더 좋겠지.”

씩 웃는 그 얼굴에서 묘한 꿍꿍이가 느껴졌다.

설마, 지금 자신과 저 남자를 친해지게 만들고 싶은 건가?

…대체 왜?

“제가 왕자와 친하게 지내길 바라십니까?”

툭, 하고 의문이 입을 타고 흘러나왔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기에 저절로 튀어나온 질문이었다.

그 질문에 되레 루비나드가 고개를 갸웃했다.

“싫은가?”

“폐하의 의중이 궁금할 뿐입니다.”

싫지도 좋지도 않았다. 하지만 무슨 생각인지가 궁금했다.

최근의 루비나드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을 때가 종종 있으니까.

“으음. 별로 대단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닌데…. 그대, 날 제외하면 친우가 거의 없지 않은가.”

책을 덮던 제빌이 흠칫 움직임을 멈췄다.

아니, 없는 게 아니라 만들지 않은 것에 불과한데…. 살짝 불만 섞인 눈으로 루비나드를 바라보자 그녀가 싱긋 웃었다.

“그는 국내 정치나 복잡한 것에 별로 관심도 없어 보이고…. 첫 만남 때 그대 역시 그에게 호감을 보이지 않았나.”

아니, 그건 호감이 아닙니다만…. 반박할 말은 한가득 있는데 좀체 입에서 나오질 않았다. 루비나드가 너무나 즐거워 보이는 얼굴로 생글생글 웃었기 때문에.

“항상 마음에 걸렸어. 내가 그대의 세상을 좁히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 그라면 또 다른 시각에서 그대가 세상을 볼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겠지.”

그런 건… 필요 없다.

아니, 오히려 방해였다.

제빌은 루비나드가 보는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싶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두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녀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모두 알 수 있다면 그녀도 자신을 사랑하게 될까.

그럴 리 없다는 걸 알아도 헛된 희망만이 점차 부풀어 갔다.

그러니 다른 시각 따윈 필요 없었다. 제빌의 세상에는 루비나드만 있으면 충분했다.

“제가 다른 이와 친밀해지길 바라십니까?”

“으음. 나와 붙어 있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그대에게도 다른 휴식이 필요할 테니까.”

당신은, 여전히 아무것도 모른다.

언제나 그랬듯 나에 대해선 아무것도.

내게 의미 있는 시간은 당신의 곁에서 당신을 위해 사용하는 시간뿐인데.

“…알겠습니다.”

하지만 기대로 가득 찬 그 눈빛을 차마 거부할 수 없었다. 제빌은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나 레기안에게로 다가갔다.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로 가까워지면 무시할 수 없었는지 그가 고개를 들었다. 제빌을 빤히 바라보는 금색 눈동자는 어딘지 루비나드의 것과 닮아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국서 전하.”

“…….”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흘끗 루비나드를 보자, 그녀는 흥미진진해 보이는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빌과 눈이 마주치자 반짝이는 눈으로 고개까지 끄덕여 보였다.

하아. 속으로 한숨을 삼킨 제빌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항상 책을 읽고 계시던데, 어떤 걸 주로 읽으시는지 궁금해서 여쭤보려고 왔습니다.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제 손에 들린 책을 흘끔 바라본 레기안이, 이내 표지를 덮었다. 그리고 무뚝뚝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습니다. 방해는 아니었습니다.”

“…연애 소설이군요. 이런 부류의 글을 좋아하십니까?”

이미 알고 있지만, 모르는 척 물었다. 어차피 레기안은 모를 테니까.

그가 제국으로 오기로 결정된 순간부터 제빌이 그의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움직였다는 것. 그리고 꽤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설렘과 감정이 깃들어 있으니까요.”

살짝 입꼬리만 올려 웃는 그 미소에서 무언가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제빌은 이내 그게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이 남자는…, 정말로 루비나드와 꼭 닮아 있다. 그 안에 품고 있는 허무함까지도. 틀림없이 이 남자도 사람들에게 수없이 배신당하고 실망하기를 반복한 것이겠지. 하긴, 부친부터가 그를 계속 배제하고 밀어 냈으니.

그리고 그에게는 제빌 같은 존재가 없었으리라. 지금까지 계속.

“그렇다면 연극도 좋아하시겠군요.”

“싫어하진 않습니다만…. 신분이 신분이다 보니 직접 극장에 보러 가진 못했습니다. 늘 안전에 유의해야 하는 신분이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레기안의 얼굴은 씁쓸해 보였다.

이 남자도 눈으로 모든 걸 다 드러내는 부류의 사람인 듯했다. 루비나드처럼. 루비나드 역시 표정을 감춰도 눈에서 모든 게 드러난다. 그렇게 생각하니 점차 친밀감이 솟았다.

“왕자께서는 헤르젠의 검술 대회에서 우승하신 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가장 뛰어난 검사를 꼽으라면 왕자일 거라고도.”

“좁은 세계에서 얻은 보잘것없는 평판입니다. 이곳 제국에서는 별 볼 일 없는 평판이죠. 검술 대회에 참가한 것도 한 번뿐이었고.”

그런 남자를 안전상의 문제가 있다며 나가지 못하게 했다니. 그건 그냥….

제빌이 엷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얼마 후, 폐하와 함께 연극을 보러 나가기로 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함께 가시지 않겠습니까?”

제빌이 루비나드가 서 있는 곳을 곁눈질했다. 그 시선을 따라 레기안 역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제야 처음으로 그녀가 이 장소에 있다는 걸 알아챈 듯했다.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는 그에게, 루비나드가 웃으며 다가왔다.

“앉으시게, 왕자. 난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네.”

루비나드치고는 드물게도, 레기안에게는 처음부터 다소 친근하게 대했다. 이런 경우는 먼 옛날 다프넬과의 첫 만남 이후 처음이었다.

부글부글. 제빌의 마음속에서 불안감이 치솟았다.

“정말로… 제가 동행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레기안의 물음에 루비나드가 제빌을 보았다. 제빌은 불안감 위에 뚜껑을 덮고 싱긋 웃었다.

“폐하는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뛰어난 무위의 검사이십니다. 부족하긴 하나 저도 검을 조금 알고, 왕자께서도 무위가 뛰어나시니 안전에는 문제가 없을 것 같군요.”

제빌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루비나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륙에서 유명한 극단이 방문하는 건 제국에서도 드문 일이네. 그대가 괜찮다면 꼭 함께해 주게.”

루비나드가 툭, 하고 제빌의 어깨를 쳤다. 뒤는 맡긴다는 뜻이었다.

그대로 서고 밖으로 빠져나가는 루비나드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레기안이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는… 듣던 것과는 조금 다른 분이시군요.”

그렇게 말하는 눈에는, 여전히 그녀에 대한 애정이나 사랑은 찾아볼 수 없었다. 순수하게 그녀라는 사람 자체에 대한 놀라움이 깃들어 있을 뿐.

“…네. 폐하께서는 생각보다 훨씬….”

그래서 제빌은 웃을 수 있었다. 다만, 루비나드와 닮았다는 생각에 묘한 친근감을 느꼈기 때문일까. 그로서는 드물게 아주 조금 감정이 흘러넘쳤다. 그 미소를 보던 레기안은 생각했다.

이 두 사람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서로를 애정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