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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 (59)화 (60/115)

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60)

에브니겔은 단 한 번도 누군가의 앞에 무릎 꿇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태어나서부터 황족이었고, 태어나서도 고귀한 존재였다. 비록 형이라는 존재가 있어서 가장 고귀한 자가 되진 못했지만.

그래도 누군가의 앞에 무릎 꿇을 일은 없었다. 아니, 허리를 숙여 본 일조차 거의 없었다. 그런 그가 처음으로,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가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황자! 일어나시오! 이게 대체 뭐 하는….”

“제가 잘못 생각한 것 같습니다.”

자신의 행동이 진심을 전해 줄 것이라 생각했다.

비록 첫 만남도 그다음도 엉망이었지만, 그래도 그녀를 알기 위해 애쓰며 호감을 사기 위해 발버둥 치는 자신을 알아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틀렸었다.

에브니겔이 하는 모든 행동은 생애 처음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루비나드는 평소의 에브니겔을 모르니 그 모든 것이 ‘난봉꾼 황자’가 하는, 그녀를 유혹하기 위한 방도라고 생각하는 게 당연한 건지도 몰랐다.

“첫 만남부터 어긋나 있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그런 가벼운 마음이었던 것 역시 사실입니다. 그 누구도 오르지 못했던, 대륙 최초로 여제라는 자리에 앉은 폐하에 대한 호기심이 컸던 것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에브니겔은 늘 오만했다. 그래도 주변에 끊임없이 여자들이 다가왔다. 몇 번 튕기는 이들이라도 달콤하게 사랑을 속삭여 주면 금방 넘어오곤 했다.

세상 모든 것이 너무나 쉬웠었다.

“하지만 폐하, 저는…. 지금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 폐하께 선물을 드리고 만나려 애쓰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폐하께서 저와 평생 밤을 보내지 않으신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런 건….”

물론, 당연히 보낼 수 있다면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제빌이 있는 자리에 자신이 갈 수만 있다면. 그녀에게서 호의 가득한 눈길을 받고 세상 누구도 보지 못한 가면 속 얼굴을 보여 주기만 한다면….

그 색채 가득한 세상을 계속 보여 주기만 한다면.

밤을 보내는 일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제겐 전혀 중요한 일이 아니니까요.”

에브니겔은 제 가슴에 손을 얹었다.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순간임을 알아챈 것인지, 심장이 미칠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그 박동을 느끼며 금발의 황자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폐하와 함께 있으면 무채색인 세상에 빛이 깃듭니다. 이토록 다양한 색이 존재했다는 걸 지금껏 알지 못했습니다. 폐하께서 엷게 웃어 주시는 것만으로도 저는 세상 그 무엇도 필요 없다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충족됩니다.”

그렇게 말하는 에브니겔의 얼굴엔 행복감으로 가득한 미소가 스몄다.

그게, 루비나드와의 간극을 더 벌렸다.

루비나드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을 또 이야기한다. 그 감정을 핑계 삼아 그녀에게 저질렀던 모든 무례를 용서받으려 한다. 그리고 아마 제빌에게 보낸 적의도.

“저도 당황스러울 정도로 제가 흐트러지는 걸 느끼고 있습니다.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지고 흘러넘치고야 맙니다.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거라면, 루비나드에게 사랑은 필요 없는 감정이었다.

이성을 잃고 감정만으로 행동한다니. 그게 술 먹고 본능만으로 행동하는 것과 뭐가 다르다는 것일까. 루비나드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 갔다.

평소라면 눈치챘을 에브니겔이다. 하지만 눈을 감은 채 제 감정에 도취되어있는 지금의 에브니겔은 눈치챌 수가 없었다. 점차 두 사람의 거리만이 멀어져 갔다.

“폐하. 지금껏 제가 저질렀던 모든 무례를 사죄드립니다. 제가 지금껏 드린 선물들은 나름 제 성의를 표시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니 결코, 로간과 악토그라토리아의 사이를 험악하게 만들고자 한 게….”

겨우 고개를 든 에브니겔이 보라색 눈동자를 보았다. 멈춰 버린 입이 파르르 떨렸다.

그 눈동자에 깃들어 있는 건 여태까지 보지 못했던….

“그대의 말은 잘 이해했소. 그러니 더는 말하지 않아도 되오.”

루비나드는, 마법석이 든 상자를 들어 에브니겔의 손에 놓아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 선고라도 내리듯 그에게 말했다.

“그대의 모든 무례를 용서하겠소. 그러니….”

루비나드는 그에게서 한 발자국 멀어졌다. 그뿐인데.

왜일까. 에브니겔의 눈에는 그 한 발자국의 거리가 마치 수천 마일쯤 정도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침 알현 시간도 끝났군.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소, 황자.”

돌아가다니, 어디로?

숙소로?

아니면… 본국으로?

어째서 당신은 나를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걸까. 에브니겔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내가. 악토그라토리아의 황자인 자신이 이렇게까지 이야기하고 있었다. 자신의 안에 머금고 있던 감정을 모두 토해 내며 그녀에게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 그녀의 관심을 갈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이 무심한 여제는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대체 왜.

-그럼 저하가 폐하가 되시면 어찌 되겠습니까.

가슴에 묻어 두었던 가시가 불쑥 고개를 내민다.

에브니겔이 얻을 수 없는 마음 대신, 몸만이라도 얻을 수 있는 방법. 하지만 그걸 손에 넣으면 뭐가 달라지는 걸까?

아니, 차라리.

“무엇을….”

몸을 돌려 걸음을 내딛던 루비나드가 멈춰 섰다. 하지만 뒤를 돌진 않았다. 그 뒷모습에 대고 에브니겔이 들끓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엇을 바치면 저를 봐 주시겠습니까.”

데지니움의 종자를 주었을 때 처음으로 받았던 그 호의 어린 미소. 그걸 다시 받아 내려면 대체 뭘 바쳐야 하는 걸까.

그가 줄 수 있는 건, 로간의 황제인 그녀에게 줄 수 있는 건 악토그라토리아에서 규제하고 있는 물품들뿐이었다. 하지만 그걸 받으면 아버지와의 관계가 악화할 것을 두려워한다.

그렇다면.

“나라를 바치면 절 봐 주시겠습니까?”

루비나드의 몸이 흠칫, 떨렸다.

지금 이 황자는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알고는 있는 걸까.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느껴졌다.

그녀를 꿰뚫을 듯 날카로운 시선이.

“제 형제를, 제 아비를 이 손으로 해하고 나라를 탈취하여 당신께 바치면. 그때가 되면 저를 봐 주시겠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이 황자는 완전히 미쳐 버렸다. 루비나드는 그의 말을 반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이들이 싸움을 벌이는 건 흔한 일이었다. 암투든, 정정당당한 결투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자신이 목표하는 자리를 얻기 위해 끝없이 투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 그렇게 하겠다 말하는 걸 욕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나라를 바친다는 말은, 안 된다. 감히 황족이라는 자가 타국의 황제에 저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그는 지금 저 한마디로 모든 악토그라토리아의 제국민을 배신한 셈이 된다.

“…더 들을 필요도 없는 말이군. 조심히 돌아가시게.”

돌아보지 않는 등이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까 스치듯 본 경멸과 혐오의 감정이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완전히 에브니겔을….

루비나드는 더는 멈추지 않았다. 에브니겔도 더는 그녀를 멈추지 않았다.

루비나드는 방에서 나갔고, 에브니겔은 방 안에 남았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그의 눈에 하얀 구슬 장식이 비쳤다. 샹들리에의 한 귀퉁이를 장식한 그 장식을 바라보던 그가 문득 입꼬리 한쪽을 말아 올렸다.

“나라를 바쳐도 난 안 된다고, 그렇게 말하는 건가.”

어쩔 수 없지. 에브니겔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녀를 놓칠 생각은 없었다. 방금 본, 그 혐오의 눈빛조차도 에브니겔의 세상에 색을 입혔다. 그것은 보라색과 검은색이 뒤섞인 보기만 해도 역겨운 색이었다.

하지만, 그것조차 무채색의 세상보다는 나았다.

그렇다면.

“억지로라도 내 곁에 있게 만드는 수밖에.”

에브니겔은, 제 시종의 숙원을 이루어 줄 것을 결심했다.

* * *

“완전히 미친놈이야, 저 황자는.”

제빌이 방으로 들어오기가 무섭게 루비나드가 씩씩거리며 욕설을 내뱉었다. 그 정도로 에브니겔과의 대화가 불쾌했던 모양이었다.

뭐, 이미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미쳐도 제대로 미쳤어. 대체 사랑이 무어길래 사람을 그리 망가뜨린단 말인가.”

루비나드가 소문으로 전해 들은 에브니겔은 그렇게 멍청한 남자가 아니었다. 황족의 긍지도, 나라를 짊어지고 있다는 의무와 책임도 모두 내버린 채 여자의 다리에 매달려 징징거리는 남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 그녀가 본 에브니겔은.

“나더러 나라를 바치면 자신을 봐 주겠냐고 하더군.”

“나라…를 말입니까.”

“그 남자가, 황제가 되면 자신을 봐 주겠냐고 했다면 차라리 나았을 거야. 나라를 바치겠다니. 미친 것 아닌가? 제 백성을, 제 나라를 어찌 타국의 손에 쥐여 준다고 말할 수가 있냔 말이야.”

글쎄. 제빌은 굳이 따지자면 에브니겔의 가장 큰 이해자였다.

나라? 그까짓 것 얼마든지 버릴 수 있었다. 다만 루비나드가 소중히 여기는 것이기에 자신 역시 소중히 여기는 것뿐이었다. 만약 루비나드가 망가뜨리길 원했다면 제빌은 주저 없이 이 나라를 깨부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티 냈다간 에브니겔과 같은 눈빛을 받아야만 할 것이다.

혐오와 경멸의 눈빛. 그런 걸 받았다간 제빌의 심장은 모두 타 재가 될지도 모른다.

물론 가끔 받아 보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어리석은 말을 했군요.”

“난봉을 저지르긴 하지만 한 번도 문제를 일으킨 적은 없다고 들었네. 항상 합의하에 밤을 보내고, 그 후에도 문제없이 잘 헤어지는 것으로 유명하다지. 그런 남자가 대체 왜 저리 변했느냔 말이야.”

제빌은 루비나드가 화를 내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에브니겔이 소문과는 다른 남자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루비나드의 가슴 속 깊이 박혀 있는 수많은 가시 중 하나.

루비나드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성을 잃는 것을 몹시도 싫어했다.

사랑은 어떤 죄의 변명도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제빌은 아무것도 들켜선 안 된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제가 저지른 죄도, 그녀에 대한 마음도.

“…저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군요. 따스한 차라도 드시면서 조금 진정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제빌은 그렇게 말하며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설렁 줄을 당기는 그의 눈동자는….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감정 한 방울 담겨 있지 않았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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