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59)
“안녕하십니까, 폐하.”
정말 미치겠네.
루비나드의 눈동자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에브니겔은 뻔뻔하게 웃었다.
“좋은 오후로군, 황자. 근데 왜 그대가 여기가 있는 것인가.”
“최근 제가 제이블랑 경과 친밀해져서 말입니다. 오늘 폐하를 알현하기로 한 날인데, 급하게 일이 생겨 가지 못하게 되었다고 말해서 대신 왔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황제와의 알현을 누가 감히 대신한다는 말인가. 갑자기 일이 생겼다고 하더라도 황제와의 알현보다 중요할 리가 없었다.
어차피 제 위치를 이용해 그를 겁박하든 회유하든 했겠지. 루비나드는 불쾌감을 감추지 않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건 제이블랑 경의 영지에 관해 이야기할 게 있다고 만든 자리였소. 미안하지만 타국의 황자인 그대와 이야기할 건 아무것도 없는 것 같군.”
냉정한 말이었다. 에브니겔은 생각보다도 더 차가운 반응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흘끗, 자신을 쳐다보는 제빌의 시선이 느껴졌다. 자신이 업신여기던 이 남자는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불쌍하다며 동정하는 표정? 아니면 꼴좋다며 비웃는 표정? 그도 아니면 아무 관심도 없는 듯한 무표정일까. 어느 쪽이건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걸로 이 기회를 날려 버릴 순 없었다.
“폐하께서 기분 상하신 것,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갑자기 영지에서 농민들이 들고 일어나 후작가의 저택을 포위했다고 합니다. 그런 상황이라 본의 아니게 오지 못하게 되었고, 그가 떠나는 참에 제가 방문해 전달 역을 맡은 것입니다.”
루비나드의 예상과는 달리, 정말로 에브니겔은 제이블랑의 도움 요청을 받아들여 여기에 있는 것이었다. 다만 그가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솔직히 행운이라는 생각은 했다.
타국의 황자이지만, 이미 초대받은 손님이 아니게 된 에브니겔이 루비나드와 마주칠 일은 거의 없었다. 가끔 후원을 어슬렁거리다가 마주치거나 황궁 내의 시녀들과 잡담을 하다가 마주치는 것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대부분은 루비나드가 바빠서 눈길조차 주지 않고 빠르게 지나가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알현실은 환경이 조금 달랐다. 어쨌거나 한 방 안에서 두 사람이 함께 있게 되는 것이고, 차분히 이야기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부탁받은 일이 끝나면 가벼운 잡담이라도 나눌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한 건 사실이었다.
물론, 설마 여기까지 국서가 함께할 줄은 몰랐지만.
“여기, 제이블랑 경이 보낸 서신입니다.”
탐탁지 않은 얼굴로 서신을 바라보는 루비나드 대신 제빌이 앞으로 나섰다. 반사적으로 서신을 거두려던 에브니겔이 이를 악물고 움직임을 멈췄다. 매번 그에게 적의를 보낼 때마다 눈살을 찌푸리던 루비나드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폐하. 황자께서 하신 말씀이 모두 옳습니다. 이 서신 내용과 일치하는군요.”
물론, 제빌이 알고 있는 사실과도 일치했다. 애초에 후작가의 농민들을 자극해 봉기하게 한 것은 자신이었으니까.
하지만 제빌을 대할 때마다 적의를 내비친 에브니겔은 이미 루비나드의 신뢰를 꽤 잃고 있었다. 여전히 의심스럽다는 얼굴로 그를 보던 루비나드가 일단 다시 자리에 앉았다.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에브니겔의 귀에 차가운 목소리가 울렸다.
“오해해서 미안하군, 황자.”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설마 국내의 귀족이 타국의 황자인 저에게 전언을 부탁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하셨을 테니, 당연한 일입니다.”
“그대가 전해 준 서신은 잘 받았소. 이만 돌아가도 좋소. 배웅이 필요하다면….”
빨리 나가라는 축객령으로 들렸다. 에브니겔은 씁쓸하게 웃고는 며칠 동안 계속 품속에 품고 있었던 상자를 내려놓았다.
“이건…?”
“로간 제국은 마법의 연구와 실생활의 적용에 지대한 관심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다만 그중에서도 번개 계통 마법의 연구에는 다소 어려움을 겪고 있다지요.”
확실히.
현재 여러 사업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베카르티조차 번개 계열 마법에는 미숙했다. 그 탓에 그에 관련된 사업들은 모두 지지부진한 것 역시 사실이었다.
예를 들어 전등. 촛불 대신 방을 밝힐 수 있는 마법 도구로 한 번 마법석을 넣어 두면 몇 년은 사용할 수 있는 편리한 도구라고 했다. 하지만 번개 계통 마법을 마법석에 넣는 것부터 이미 난항을 겪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건 마탑의 잘못이 아니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인종의 문제라고 해야 하는 편이 더 옳을까.
대륙인은 모두 비슷한 외양을 하고 있었지만, 마법의 계열은 지역마다 조금 달랐다. 그래서 이에 따라 인종을 나누곤 했는데 로간 제국의 경우에는 물 계통 마법과 바람 계통 마법에 특화되어 있었다.
반면 악토그라토리아는 번개, 불 계통 마법에 특화되어 있었다.
마석에 마법을 부여해 만드는 마법석은, 그 마법에 특화된 사람이 아니면 좀체 성공하기 힘들었다. 만약 번개 계통 마법석을 만들어 유통한다고 하더라도 그 가격은 귀족들이 아니면 사기 힘든 것이 되리라.
그러니 겨우겨우 만드는 걸론 부족했다. 양산이 가능할 정도로, 조금 비싸긴 하지만 몇년 치 초를 사는 것보다는 훨씬 싼 가격으로 살 수 있어야 했다.
그걸 위해 루비나드가 꽤 오랫동안 고심해 왔다는 걸 들은 에브니겔은.
“그래서 도움이 될까 싶어서 번개 마법이 부여된 마법석을 구해 왔습니다.”
로간 제국과 악토그라토리아 제국은 오랜 경쟁자였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 상대 국가에 핵심적인 기술을 제공하는 건, 어찌 보면 국가를 배신하는 행위에 속할지도 몰랐다.
이 지나치게 과한 선물에는 루비나드도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악토그라토리아의 황제도 동의한 것이오?”
그럴 리가. 하지만 에브니겔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마법석에 마법을 부여하는 기술 자체를 유출한 건 아니었다. 이걸 토대로 어떤 부여식이 사용되었는지를 유추해 나갈 수는 있겠지만, 아마 꽤 오랜 시간이 걸릴 터.
그러니까 이 정도는 괜찮다고 스스로 판단했다.
“…황자. 그대의 말만을 믿고 이걸 받기엔, 이건 너무 큰일이오. 미안하지만 확인되기 전에는 받을 수 없소. 확인된 후에는 악토그라토리아의 황제와 직접 이야기하도록 하겠소.”
그놈의 황제, 황제, 황제.
대체 왜 그러는 걸까. 로간 제국에게 있어서는 하나도 손해될 것 없는 제안인데. 에브니겔 역시 이게 큰일로 번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기에 선물로 준비한 것이었다.
“제 마음이 부담스러우십니까?”
어찌 대답해야 할까. 루비나드는 잠시 침묵했다.
섣불리 맞다고 긍정하기엔, 만약 마음이 상한 그가 괜한 유언비어라도 퍼뜨리고 다니면 곤란했다. 그렇다고 아니라고 하기엔 부담스러운 게 맞았다.
황제와 전혀 이야기된 바가 없다면, 지난번 데지니움 종자와는 사태의 규모가 완전히 달라진다. 마법은 원래 전장에서 사용되던 것. 이 기술을 이용해 로간이 앞으로 뭘 만들어 낼지 모르는 일이니까.
만약 이 일로 인해 악토그라토리아와의 관계가 험악해지면 누가 책임질 수 있을까.
“짐은 전쟁을 원치 않소. 악토그라토리아와도 계속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나가고 싶고.”
돌려 말하는 거절이었다.
괜히 두 나라 사이를 악화시킬 만한 짓을 하지 말고 얌전히 있으라는 말이기도 했다. 에브니겔이 분한 듯 살짝 입술 끝을 깨물었다.
달래듯 제빌이 입을 열었다.
“로간 제국과의 우호를 위해 황자께서 애쓰시고 있다는 것은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루비나드가 손을 들어 제빌의 말을 멈췄다. 에브니겔에게서 새어 나오는 적의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걸 어찌 해결하면 좋을까. 어쩌면 차라리 잘된 건지도 모른다. 루비나드는 제빌에게 눈짓을 했다.
“…저는 차를 다시 끓여 오라고 전하고 오겠습니다.”
그런 건 설렁 줄 한 번 당기면 끝날 일이었다. 그런데도 굳이 나가겠다는 이유를 모를 정도로 에브니겔은 둔하지 않았다. 제빌이 방을 나서자 방 안에는 루비나드와 에브니겔, 그리고 정적만이 남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루비나드였다.
“먼저 짐이 개인적으로 사과하고 싶은 것이 있소.”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일까. 에브니겔이 고개를 들었다. 거기엔 냉기도, 불쾌함도 품지 않은….
완전한 무표정의 가면을 쓴 루비나드가 있었다.
“그대의 흥미가 금방 식을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안일하게 대처한 건 사실이오.”
무엇에 대한, 이라는 건 굳이 덧붙일 필요가 없었다. 이미 로간 제국의 온 귀족들이, 앙숙의 나라에서 온 둘째 황자가 자국의 황제에게 푹 빠져 있음을 수군거리고 있었다. 대놓고 그에게 물은 적도 있었는데 에브니겔은 이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니 굳이 돌려 말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그대가… 마음을 가라앉히기 쉽지 않은 듯하여 오늘 이 자리를 빌려 확실히 말하도록 하겠소.”
뭐랄까. 이런 루비나드에게도 도박 같은 일이었다.
로간이 악토그라토라아에게 밀리는 일은 절대 없었다. 그리고 반대 역시 그랬다. 조금이라도 힘의 균형이 어긋났다면 벌써 두 나라 중 하나는 이 지도상에서 사라지고 없었을 테니까.
그렇기에 도리어 조심스러웠다. 애꿎은 분쟁을 만들고 싶지 않은 루비나드로서는 그가 빨리 흥미를 잃어 주길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이 난봉꾼 황자는 집요했다. 제 손에 떨어지지 않는 여자에 대한 집착인지, 그것도 아니면 처음으로 자신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여자를 보았기에 정복욕을 불태우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황자는 결코 멍청한 남자는 아닙니다. 오히려 폐하께서 직설적으로 이야기하지 못하시는 걸 이용해서 계속 주변을 맴도는 것이겠지요.
-그럼 어찌하면 좋은가? 대놓고 이야기하기엔 행여 있을 충돌이 염려되는데.
-이미 황자는 제멋대로인 행동을 꽤 했습니다. 악토그라토리아의 황제 역시 이를 좌시하진 않을 테지요. 그쪽이랑 제가 연락을 해 두도록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그대 의견은.
-이쯤에서 끝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가끔,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 집착욕과 정복욕을 불태우는 이들이 있습니다. 만약 황자가 그런 부류의 사람이라면 시간이 갈수록 도리어 곤란한 일이 생길 테지요.
여기서 끝내지 않으면 더 집요하게 굴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루비나드는 불안감과 울렁거림 같은 감정은 억눌러 둔 채 냉정함을 유지하며 입을 열었다.
“짐이 그대와 밤을 보내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오. 그러니 이만 그대의 본국으로….”
하지만, 에브니겔은 그녀가 애써 잡은 평정을 결국 깨뜨리고야 말았다.
“…황자, 이게 무슨…!”
루비나드가 당혹으로 물든 목소리를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