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58)
“팔은 이제 좀 괜찮나?”
제빌이 옆으로 돌아눕자 루비나드가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그에게 안겨서 잠드는 건 이제 익숙해졌다. 아니, 사실대로 말하자면 예전 이상으로 더 숙면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그에게 두근거리는 것과는 별개로 그 품 안이 너무 따스하고 편안해서 길들여진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빌이 팔을 다치고 난 후부터는 계속 등을 맞대고 잠들었다. 루비나드는 그걸로 만족하는 듯했지만, 제빌은 전혀 아니었다.
“괜찮습니다.”
“상처가 꽤 길고 깊다고 했으니 무리하지 말도록 해. 그대가 안아 주지 않는다고 잠들지 못하는 건 아니니까.”
“제가 허전해서 잠들기가 힘듭니다.”
“그럼 침구라도 끌어안고 자도록.”
침구랑 당신이 어찌 같습니까. 머릿속을 맴도는 말을 차마 내뱉지 못한 제빌이 루비나드를 꼭 끌어안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루비나드 역시 품에 안기는 게 가장 안정감이 있는 듯 살짝 품속을 파고들어 왔다.
처음 공약 그대로, 루비나드는 제빌이 잠든 모습을 보고서야 눈을 감았다. 오늘도 자신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이 느껴졌다.
조금만 고개를 숙이면 닿을 곳에 동그란 정수리가 있다. 거기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면 분명 그 붉은 머리카락이 입술을 간질여 주겠지. 그건 틀림없이 기분 좋은 감촉일 터였다.
거기서 조금만 더 내려가면 예쁜 모양의 귀와 쭉 뻗은 목선이 있었다. 거기에 얼굴을 묻고 숨을 가득 들이마시면, 이제 조금씩 익숙해지기 시작하는 이 달콤한 향기가 짙게 풍겨 올 테지.
당장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는데 한 걸음을 내디딜 수가 없다는 게 이토록 괴로운 일인 줄 몰랐다.
갈수록 욕심쟁이가 되어 간다. 이러다가 그녀의 모든 것을 원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절대 가지지 못할 것까지 원하게 되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제빌 경?”
간지러운 시선을 느끼며 눈을 꼭 감은 채 고른 숨을 내쉬고 있자 루비나드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다. 제빌은, 그 목소리를 듣고 싶은 충동과 싸워 겨우 이겨 냈다. 그가 반응하지 않자 루비나드가 꼬물꼬물 품속에서 움직이더니 손을 뻗어 제빌의 몸을 감싸 안았다.
“제빌?”
또 한 번 부르는 소리에도 제빌은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쿵쿵 뛰는 심장은 막을 수가 없었다.
눈치도 없이 거세게 뛰는 심장 소리가, 행여라도 그녀의 귀에 닿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다. 살짝 몸을 띄우려고 하자 루비나드가 그의 허리를 감싼 팔에 힘을 주었다. 빠져나가려는 걸 눈치챈 것일까. 아니면.
“좋은 꿈 꾸게, 제빌 경.”
작은 손이 제빌의 등을 토닥였다. 아마 제가 받은 포근함을 전해 주려는 노력인 모양이었다.
그게 제빌에게는 도리어 자극이 되었지만.
최근, 루비나드를 빨리 재우기 위해 자는 척하는 사이 정말로 잠들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엔 어떻게 사랑하는 여인을 옆에 두고 그냥 잠들 수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하지만 이내 익숙해졌다.
분명 제빌에게 있어서 루비나드는 사랑하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세상 그 누구보다 편안하고 안정감을 주는 사람이기도 하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니 편안하게 잠들 수 있었다.
하지만 제 허리를 감싼 채 가끔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가는 팔의 감촉이 낯설었다. 겨우 그 정도의 자극만으로, 등을 토닥이는 작은 손길 하나만으로 다시 잠들 수 없는 밤이 시작되었다.
하긴 최근 잘 잤기에 더 그런 건지도 모르지. 제빌은 쓰게 웃으며 그녀의 손이 멈추길 기다렸다.
“…후우.”
깊은 심호흡 후에 서서히 손길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규칙적으로 토닥이던 손이 이내 느려지고, 느려진 손이 불규칙적으로 등을 토닥였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멈춰 섰다.
짧은 시간을 깊게 자는 루비나드는 기본적으로 빨리 잠드는 편이었다. 낯선 기척이 나면 잠결에도 머리맡을 더듬거리며 검을 찾지만.
그걸 잘 아는 사용인들은, 루비나드가 잠든 시간에는 절대로 침실 앞이나 정원 쪽에서 얼쩡거리지 않았다.
하지만 제빌은 조금 달랐다. 그녀의 곁에서 다소 움직여도 큰 반응이 없었다. 별것 아닌데 그게 기뻤다. 마치 그녀의 곁에서 잠들 수 있는 건 자신뿐이라는 허가라도 받은 것 같아서.
어쩌면 그저 자신이 그런 것처럼, 제빌의 기척에 익숙해져서 그런 건지도 모르는데.
“…….”
새근새근 규칙적으로 흘러나오는 숨소리를 들으며 제빌은 가만히 루비나드를 안은 팔을 풀었다. 품에 폭 파묻혀 있던 몸이 살짝, 위를 향해 돌았다.
상체를 일으켜 턱을 괸 채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다.
무방비하게, 자신의 곁에서 모든 경계를 내려놓은 채 잠든 루비나드. 그 누구도 믿지 않는데 오로지 제빌만을 믿고 있는 루비나드.
이 얼굴을 본 이는 아마 몇 없을 터였다. 아비인 데거베일, 가끔 그녀를 재워 주었다는 제2 황자 엔도르빌, 그리고 자신. 그 정도가 전부이겠지.
그리고 아마 곧.
“제가 당신의 유일이 되면 좋을 텐데.”
바람 소리 같은 말소리가 나직하게 방 안에 울려 퍼진다. 제빌의 귀에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는 아주 작은 소리. 그 소리가 깊게 잠든 루비나드의 귀에 들어갈 일은 없었다.
그래서 제빌은, 아주 가끔 잠든 그녀에게 제 진심을 쏟아붓곤 했다.
“당신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건 저뿐이었으면 좋겠어요. 세상 그 누구에게도 보여 주지 않는 모습을 저에게만 보여 주었으면 좋겠어요. 아니, 사실대로 말하면….”
세상 모든 것이 다 멸망하고 자신과 루비나드만이 남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그녀를 빼앗길까 두려워할 일도 없을 테니까.
두 사람은 지금과 별로 다르지 않게 살아갈 것이다. 아니, 생존을 위해 함께하는 만큼 오히려 더 돈독한 사이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 루비나드도 자신에게….
제빌은 자신이 루비나드에게 어느 정도 소중한 존재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유일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지금 그가 가지고 있는 유일이라는 이름 역시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신기루 같은 것임을.
“당신을 얽매어 두려면 뭘 바치면 좋을까요.”
팔? 다리? 목? 심장?
뭐든 내놓을 수 있었다. 그녀의 곁에서 그녀의 유일이 될 수만 있다면. 하지만 루비나드는 그런 자신을 전혀 모르고 있을 터.
-그대가… 내 것은 아니지만 내 사람이라고는 생각하고 있어.
그 한마디가 그의 불안을 가라앉혔다고 생각했다. 아니, 없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또 일렁일렁 불길한 그림자가 솟아오른다.
그녀가 말하는 ‘내 사람’에 다른 이가 들어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걸까. 제빌보다도 더 소중한 이가 생기면 어떻게 되는 거지. 아니, 제빌이 필요 없게 되는 날이 온다면….
가정만이 점차 더해진다.
그는 자신이 지독한 겁쟁이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를 잃을 수 있는 모든 길을 끊어 버렸다. 자신이 그녀의 곁에 설 수 없는 모든 경우의 수를 짓뭉개 버렸다.
하지만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걸까.
언제까지 자신은 이렇게 불안 속에 살아야 하는 걸까.
답은 정해져 있었다.
“평생이라도 좋습니다. 단 하루도 마음 편하게 잠들 수 없다고 해도….”
당신의 곁을 지킬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그렇게 중얼거리며 제빌은 루비나드의 잠든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 * *
“오셨습니까, 저하.”
“…후. 불쾌하군.”
집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검은 외투를 벗어 던진 에브니겔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냥 빈말이 아닌 듯, 그 미간 가득 짜증과 화가 서려 있었다. 시종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첼란드라 디 제이블랑과 만나신 게 아니셨습니까?”
“맞아.”
“새로운 정보를 손에 넣고 기뻐하셔야 할 분이 왜 이러십니까.”
“첼란드라라는 남자 자체가 불쾌해서지. 만나면 만날수록 더 그런 생각이 들어.”
참으로 불쾌하다는 수식어가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이쪽의 안색을 살피며 살살 기다가도, 국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눈빛이 변한다. 겉으로는 칭찬하는 척하면서도 가만히 듣고 있다 보면 악의가 절절한 내용이었다.
어릴 때부터 황녀님에게 충성을 다했다는 둥. 그러다 보니 경비견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다는 둥. 하지만 그 작고 화사한 용모와 체구로 경비를 제대로 할 수 있겠냐며 모두의 걱정을 샀다는 둥.
“난 그렇게 살살 비꼬는 치들은 성미에 안 맞아. 차라리 갖다 들이박는 게 낫지.”
“그러니까 저하가 지금 난봉꾼 소리를 들으시는 겁니다.”
“시끄러워. 어차피 제2 황자인데 어때. 황태자도 아닌데.”
“…제대로 평판 관리 잘 하시고 조금만 성질 죽이시면 황태자 자리를 넘보지 못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내가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했지, 데바르안.”
에브니겔의 핀잔에 시종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자신이 모시는 주인이 더 높은 곳을 목표로 삼는 걸 꺼리는 종이 어디 있을까. 능력이 부족한 것도, 인망이 부족한 것도 아닌데 제 평판을 깎아 내며 형을 지키려는 에브니겔이 못마땅한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평소라면 여기서 멈췄을 시종의 입이 한 번 더 열렸다.
“혹시 압니까? 로간의 황제도 저하께서 황제가 되면 달리 볼지.”
“데바르안.”
“그렇잖습니까. 솔직히 지금도 저하 생각엔 저하를 귀찮아하시는 게 보인다면서요. 근데 저하께서 악토그라토리아의 황자이기 때문에 밀어내지 못하는 것 아닙니까. 그럼 저하가 폐하가 되시면 어찌 되겠습니까.”
순간, 상상한 듯 에브니겔의 움직임이 멈췄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하고 찬물이나 좀 갖다 줘.”
“…네, 알겠습니다.”
시종은 기가 죽은 얼굴로 물러났다. 홀로 남은 에브니겔이 목을 휘감은 크라바트를 풀어헤치며 생각에 잠겼다.
황제가 되면. 확실히 그러면 루비나드가 자신을 지금보다도 더 밀어내기 힘들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로간을 책임져야 할 루비나드가 에브니겔의 비가 되는 건 불가능하고, 악토그라토리아를 책임져야 할 에브니겔이 루비나드의 정실이나 후실이 되는 것 역시 불가능했다. 그러니 오히려 지금이 더 나을 터였다.
만약 에브니겔이 황제가 되면….
“…아니, 아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힘으로, 무력으로 로간을 멸망시키면 패배국의 황제인 루비나드는 그의 포로가 된다. 그러면….
하지만 이내 에브니겔은 고래를 내저어 제 말도 안 되는 상상을 뿌리쳤다. 형님이 굳건히 계신 이상 자신이 악토그라토리아의 황제가 될 일은 없었다. 설령 형님께 무슨 일이 생겨 자신이 황태자가 된다고 한들, 아버지가 준비도 없이 지금 당장 로간을 치는 것에 동의하실 리도 없었다.
“정신 차려, 에브니겔.”
그렇게 중얼거린 에브니겔의 마음에 한 줄기 가시 같은 위화감이 자리 잡았다.
아주, 깊숙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