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56)
“후.”
지난번, 초콜릿을 선물하고 받은 냉대를 어떻게든 만회하기 위해 에브니겔은 특별한 선물을 준비했다. 사실 이걸 선물한다는 게 본국에 들키면 어찌 될는지. 아마 아버지의 불호령을 들어야 할 것은 틀림없었다.
그래도 루비나드가 웃는 게 보고 싶었다. 호의가 가득 담긴 얼굴로 자신에게 향하던 그날의 미소를 잊을 수가 없었다.
루비나드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후원 벤치에 앉아 있기를 세 시간.
드디어 멀리서 붉은 머리카락이 산들거리며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흠, 흠, 흠.”
이상한 목소리가 나오지는 않을까. 머리카락이 삐치진 않았을까.
그녀에게 칠칠치 못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아 목을 가다듬고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먼 곳에서 다가오는 루비나드를 보며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있다가, 그 입가에 스민 미소에 머리가 멍해졌다.
부드러우면서도 장난기 가득한 미소. 그 눈이 자신을 향하자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올릴 뻔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에브니겔을 보는 순간 사라졌다.
어쩜 저리도 재빠를까. 태도 전환이 빨라도 너무 빨랐다. 그 어떤 장인도 저렇게 빨리 가면을 갈아 쓰진 못할 텐데. 그렇게 생각될 정도로 호의적인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황제의 가면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리고 그녀의 곁엔.
“….”
소매 아래까지 내려온 붕대 끝자락에 에브니겔의 마음이 비열하게 미소 지었다. 약하디약한 남자. 아무리 실력이 좋다지만, 키아네에게도 이기지 못하고 큰 상처를 입고 말았다지.
마음 같아선 저 남자에게 결투라도 신청하고 싶었다. 약해 빠진 주제에 왜 루비나드의 곁에 서 있는 것이냐며 비난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루비나드는 두 번 다시….
-로간의 황제는 무서울 정도의 실력자입니다.
-네가 그렇게 말할 정도라니. 대체 어느 정도의 실력이라는 거야?
-어쩌면… 저하께서도 대적하지 못하실지도 모릅니다.
대외적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에브니겔의 검 실력은 악토그라토리아의 정점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악토그라토리아의 기사들을 줄 세우면 백 위 안에는 틀림없이 들어갈 실력자인 키아네가 그렇게 말할 정도라면…. 아마 틀림없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더 가지고 싶어졌다.
저 강하고 오만하고 사랑스러운 꽃을 꺾어 제 밑에 깔고 싶었다.
아니, 그 꽃을 뿌리째 뽑아 제 곁에 심어 두고 계속 예뻐하고 싶었다.
아니, 그녀의 아래에 복종하고 작은 발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뭘 바라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안녕하십니까, 폐하.”
에브니겔의 마음은 어느 순간부터인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그녀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누구도 가지지 못한 높은 곳의 꽃. 형님도, 아버지도 가지지 못한 유일한 것.
세상 그 어떤 것보다 강하고 고고하고 아름다운.
그걸 가지고 싶었다.
“…좋은 오후로군, 황자. 오늘은 또 무슨 일로.”
“후원은 언제나 개방되어 있다고 들어서 가끔 산책하러 나오곤 합니다.”
산책?
루비나드의 시선이 황자의 발로 향했다. 후원은 일부러 흙을 밟는 감촉을 즐기기 위해 도로를 깔지 않았다. 그런데 황자의 부츠는 흙먼지는커녕 티 하나 없이 깨끗하고 말끔했다.
산책이라. 이곳에서 산책하고 저 정도로 깨끗한 부츠를 신고 있으려면 대체 얼마나 자주 신발을 닦아야 하는 걸지.
루비나드는 되지도 않는 수작에 비뚜름하게 입 끝을 말아 올렸다.
“그렇군. 즐거운 산책 되시게.”
“폐하께서도 후원을 산책하시는 거라면 동행해도 괜찮겠습니까?”
“…동행?”
그런, 귀찮은 짓을 굳이 해야 하나.
루비나드의 시선이 제빌에게로 향했다. 제빌은 담담한 얼굴로 에브니겔을 바라보고 있었다. 습격을 사주한 것이 황자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는 듯했다.
하긴, 그렇겠지. 바보 같은 짓을 했다는 자각은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가지고 싶었다. 저렇게 별것 아닌 남자라는 걸 미리 알았다면 그냥 내버려 뒀었겠지만.
지금도 그렇다. 금방이라도 사랑한다고 속삭일 것처럼 애정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면서, 에브니겔을 거부하는 한마디를 내뱉질 못한다. 사실 대의는 그에게 있음에도.
에브니겔이 반쯤 비웃는 듯한 얼굴로 제빌을 바라보았다.
“귀한 손님이시니 후원을 안내해 드리는 건 어떻겠습니까, 폐하.”
하지만 제빌은 그 도발에 응하지 않았다. 여유 있는 미소로 에브니겔을 바라보며 감히 허락한다는 듯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군. 황자만 괜찮다면 우리가 후원을 안내하도록 하지.”
루비나드는 제빌의 판단을 신뢰했다. 이 남자를 거부하면 분명 앞으로 무언가 불이익을 만들 남자라고 제빌은 판단했다.
그렇다면 적당한 선에서 받아 주는 수밖에.
물론 선을 넘으면 다른 방도를 사용할 생각이었다. 그걸 위해서 준비하고 있는 것도 있었고. 루비나드는 대외적인 미소를 지으며 에브니겔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것조차 에브니겔의 심기를 거슬렀다.
저 남자가 무엇이기에 루비나드의 판단에 관여한단 말인가. 에브니겔의 붉은 눈동자가 질투로 음습하게 타올랐다가, 이내 가라앉았다. 그도 황족이었고 어릴 때부터 질릴 정도로 예절 교육을 받아 왔다.
이런 자리에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폐하. 후원에 정말 많은 꽃이 있군요.”
“봄이라서 다양한 꽃이 피었습니다. 황자께서는 즐기시는 꽃이 있으신가요.”
루비나드에게 말을 걸었는데 제빌이 대답한다. 그것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말꼬리를 채 가서, 에브니겔이 채 대응하지 못하는 사이 제빌이 걸음을 멈추고 화단의 꽃을 가리켰다.
“저기 있는 꽃은 갈라니피아라는 것인데 본래는 사계절 온후한 기후인 해상 국가 세일 왕국에서만 피는 꽃입니다. 그걸 로간 제국에서 개량해서 사계절이 뚜렷한 본국에서도 필 수 있게 만든 것입니다. 아마 황자께서도 처음 보시는 꽃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생글생글 웃으며 꽃에 관해 설명하는 그에게서는, 적의도 냉기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지난번에 느꼈던 그 미묘한 냉기는 착각이었던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될 정도였다.
흘끗 루비나드를 보자 그녀는 벌써 저만치 걸어 나가고 있었다. 아마 보고 싶은 꽃이 있는 거겠지.
제빌을 흘끔 본 에브니겔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전하의 말씀대로입니다. 처음 보는 꽃이군요. 몹시도 사랑스럽습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어디에 가시는 것인지요.”
“최근 황자께서 주신 데지니움의 종자를 심어 두어, 아마 그걸 보러 가시는 것 같습니다. 로간 제국의 땅에서도 잘 적응해 필 수 있을지 매일 전전긍긍하고 계십니다.”
부드러운 미소 아래 애정이 엿보였다. 정말로 짜증이 날 정도로.
왜 자신은 로간 제국에서 태어나지 못한 것일까. 여기서 귀족으로 태어나기만 했어도, 저 별 볼 일 없는 놈 따윈 감히 그녀의 곁에 서지도 못했을 터였다. 자신이 조금만 더 일찍 태어났어도.
루비나드는 분명 자신의 곁에 서 있었을 텐데.
“황자 덕분입니다.”
“…네?”
“최근 폐하께 심기가 불편한 일들이 많았었는데…. 황자께서 주신 데지니움의 씨앗에 몹시도 기뻐하시더군요. 폐하께서 이미 답례를 하셨다고 들었지만, 저로부터도 감사의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 남자가 싱긋 웃었다.
잠시 그의 말을 곱씹던 에브니겔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지금 감히….
몰락 직전인 공작가의 삼남 주제에 감히 황자인 나를… 제 아래로 보고 치하의 말을 한 것인가? 감히?
“앗, 폐하! 그쪽은 데지니움이 아니라 얼마 전 로코비나의 씨앗을 심은 곳입니다!”
눈으로 루비나드의 뒤를 쫓던 제빌이 황급히 달려 나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에브니겔은 이를 으득, 갈았다.
* * *
“…진짜로 어리석군.”
에브니겔 황자의 일거수일투족이 적힌 보고서를 바라보던 제빌이 피식 웃었다.
제빌은 언제나 루비나드의 곁에 있는 남자 중 가장 아래 계급에 속한 사람이었다. 가문도, 체구도, 능력도. 내세울 것 하나 없는 그런.
그런 제빌에게는 황자라고 해도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루비나드의 곁을 맴도는 수많은 남자 중 하나. 그 정도의 인식밖에 없었다.
하지만 에브니겔 황자는 다른 모양이었다.
“하긴, 나라도 나 같은 자가 사랑하는 여인의 곁에 있으면 당혹스러울 테지.”
연인은 절대 아니다. 그녀가 남자를 대하는 태도만 보아도 사랑하는 이를 향한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무시하기엔 그는 그녀의 유일한 사람이다.
유일한 친구이자 유일하게 믿는 사람. 그를 무시하자니 거슬리고 신경 쓰자니 아무것도 아니다. 확실하지 않다는 게 오히려 그를 더 미치고 환장하게 만드는 거겠지.
처음으로 여성에게 품은 호의와 그 곁에 붙어 있는 제빌이라는 괴이한 존재. 이 두 가지가 그의 이성을 흐리고 있는 것이리라.
“그렇다고 그렇게… 감정을 대놓고 드러내면 어떻게 합니까, 황자.”
자신을 노려보던 그 붉은 눈동자를 떠올리면 기분이 좋아졌다. 앞으로 그 오만한 남자가 당할 일들을 생각하면 유쾌한 기분까지 들었다.
물론, 그 적의를 눈치챈 루비나드는 꽤 기분이 나빠진 듯했지만.
“감정적인 것은 이용하기 쉬운 법입니다, 황자. 제가 당신에게 이런 말을 해 주는 날은 절대 오지 않겠지만.”
이미 어떻게 ‘치워 버릴지’에 대한 구상은 서 있다. 다만 그걸 현실로 구현하기에는 여러 관문이 남아 있었다.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말이었다.
제빌의 편이 아닌데도, 제빌의 의도대로 움직여 줄.
“이번엔 그대가 일해 줘야겠습니다, 경.”
대외적으로 보았을 때 제빌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그를 질투하는 자. 거기에 살짝 불을 붙여 주면 에브니겔과 잘 붙어 줄 터였다.
그럼 귀찮은 것을 동시에 처리할 수 있게 된다.
“하긴, 들러붙지 않아도 괜찮지만.”
에브니겔이 가져와 줄 이득은, 지금 그가 주는 같잖은 적의에 비하면 턱없이 큰 것이었다. 로간 제국의 오랜 골칫거리 중 하나가 해결될 테니까.
“잘 일해 주십시오, 황자.”
로간 제국과 폐하를 위하여.
주홍색의 촛불 아래 청회색 눈동자가 싸늘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