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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 (53)화 (54/115)

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54)

알현 준비를 위해 먼저 나온 제빌은, 나오자마자 찌를 듯한 기척을 느꼈다.

기척을 감추는 것에 익숙지 않은 사람이다. 즉, 암살자 길드의 사람은 아니었다. 애초에 암살자 길드의 사람이었다면 제빌이 습격 일정을 모를 리도 없었지만.

기척은 느껴지는데 위치는 명확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기척이 너무 짙어서 위치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어쩐다.

루비나드가 알면 또 자신이 먼저 덤벼들 터였다. 그녀가 뛰어난 검술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준비되지 않은 적을 맞이하는 건 내키지 않았다.

루비나드는 ‘완벽한’ 상황에서만 적을 맞이해야 했다.

“하필 이 바쁜 시간에.”

곧장 헤르젠 왕국의 사신에게로 가려던 제빌의 계획이 완전히 틀어졌다. 이런 위험인물을 이끌고 중요한 인물을 만날 순 없으니.

아니, 오히려 잘됐나?

잠시 생각하던 제빌이 이내 걸음을 옮겼다. 얼핏 귀빈실 쪽으로 가려는 듯 계단을 향하고 있었지만, 그가 가는 방향은 사람들이 거의 오지 않는 계단 쪽이었다.

계단 층계참을 한 칸만 올라가면 거기에는 친위대도 없다. 루비나드의 친위대는 그녀의 안전을 지켜야 하기에 당연히 그녀가 머무는 층에 밀집되어 있었다. 나머지는 궁 곳곳에 퍼져 있었는데, 계단 중간이라는 어중간한 위치를 지킬 멍청이는 아무도 없었다.

여기까지 들어온 걸 보면 분명 귀빈의 종자이거나 기사일 가능성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제빌에게 적대감을 표출할 상대라면….

“여우 같다고 들었는데 멍청하군요, 악토그라토리아의 황자는.”

그의 귀에도 들릴까 말까 할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황궁 안으로 와서 이렇게 적의를 흩뿌리면 어느 기사가 못 알아챌까. 아니면 일부러 그러는 걸까.

어디로 유도해야 하나. 계단참에서 자신을 습격할 정도의 머저리는 아닐 터였다. 이대로 내려가면 사용인들이 사용하는 입구가 나온다. 밖으로 나가서 성을 둘러싸고 있는 숲속으로 들어가 볼까.

제빌이 다시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올라가려다가 내려가는 제빌의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에도 습격자는 물러나지 않았다. 설령 눈치채더라도 상관없다는 걸까.

하긴, 그 황자도 머저리는 아니다. 그가 제빌의 뒤를 캐고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무술과는 전혀 연이 없고 어릴 때는 작은 체구로 놀림 받았으며 책만 읽어 책벌레라고까지 불렸다고 보고받았으리라.

그래, 그렇게 ‘알고’ 있으면 된다.

보낸 이가 도리어 당해서 죽임당해도 그는 한마디도 할 수 없다. 아니, 설마 제빌이 그랬을 거라곤 생각도 못 하겠지. 그의 행동이 잠시라도 멈출 수 있다면 습격자를 제거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지만….

“빛에 홀린 벌레는 원래 제 몸이 타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법이지.”

그건, 제빌 역시 마찬가지였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따윈 없었다. 몸을 다치건 팔다리 하나가 사라지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두려운 건 루비나드를 다시 볼 수 없게 되는 것. 그녀의 곁에 다시 서지 못하게 되는 것뿐이었으니.

아, 그렇다면 죽음은 두렵다. 죽으면 그녀를 보지 못하게 되니까.

난봉꾼인 에브니겔은 한 번도 제대로 된 사랑을 겪어 본 적이 없었다. 그의 난봉은 이유가 있는 것이었으니.

영리한 그는 살아남는 법을 알았다. 그는 자신이 황태자를 제칠 정도로 영특하진 못하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황태자가 무시할 정도로 멍청하진 않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제 평판을 깎아 먹는 것이었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본능 역시 이유 중 하나였겠지.

하지만 제빌은 알고 있다. 한 번이라도 누군가를 마음 깊이 사랑했다면, 난봉 같은 어리석은 짓은 할 수 없다. 몸이, 마음이 다른 이는 거부해 버리니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날 정도로.

“그래서 멍청해져.”

제빌은,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택했다.

마음을 숨기고 감정을 숨기고 가면을 만들어 냈다. 그래야만 루비나드의 곁에 있을 수 있었으니까. 그래야만 그녀의 곁에 설 준비를 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에브니겔은 그런 게 필요 없었다. 처음부터 모든 걸 가지고 있었던 그에게 숨긴다는 선택지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당당하고, 오만했으며 자신감에 넘쳤다.

그게 그의 패인이었다.

제빌만 치우면 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빌은 단언할 수 있었다. 루비나드는 절대로 그에게 호감을 느끼지 못한다. 왜냐면.

“폐하는 너 같은 걸 제일 싫어하시거든.”

루비나드는 사람이 더 나은 쪽으로 변화하는 걸 기대하고 있다. 동시에 사람이 더 나은 쪽으로 변화할 것이라고는 믿지 못한다. 그녀가 겪어 온 모든 이들은 ‘더 나쁜 쪽으로’ 변화했으니까.

제빌을 제외하고는.

그러니 루비나드는 이번에도 역시 그를 믿지 못할 것이다. 그가 진심을 담아 이야기해도 그녀에게는 닿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얼쩡거리는 벌레를 그냥 둘 마음도 없어.”

쿡, 하고 제빌이 엷은 웃음소리를 냈다. 계단이 거의 끝나 간다. 이제 누군가와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다시 가면을 뒤집어썼다. 그 누구의 귀에도 들리지 않는, 제빌 자신의 귀에도 흐릿하게 들리던 진심은 묻어 두고.

“후.”

마지막 단을 밟아 내린 제빌이 고개를 들었다. 거기에는 언제나 그렇듯 담담하고 냉정한 눈빛을 한 황제의 부관이 서 있었다.

“전하!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제빌이 이 계단을 이용하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다. 자주 루비나드에게 필요한 걸 주문하러 내려오곤 했으니까. 하지만.

“아무것도 아닙니다. 실례하겠습니다.”

그가 아무것도 주문하지 않고 가 버리는 건 처음이었다.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시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얼음덩어리 같은 국서 전하는 그녀의 의문을 풀어 줄 생각 따위는 전혀 없다는 듯 뚜벅뚜벅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

* * *

“…제빌?”

창밖을 보던 루비나드가 제빌의 모습을 발견한 건 우연이었다. 평소라면 책상 위에서 남은 서류나 뒤적이고 있었을 그녀가, 아까 의자까지 돌린 김에 창밖을 보며 한들한들 흩날리는 몇 안 남은 꽃송이를 바라보고 있었던 탓에 생긴 우연이었다.

“왜 저기에 있는 거지.”

제빌이 지금 해야 할 일은 알현 준비를 하는 것. 그리고 헤르젠 왕국의 사신에게 알현을 미룰 것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즉, 황궁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다.

“…….”

뭔가 느낌이 이상하다. 루비나드는 벌떡 일어나 문 쪽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문을 열기 전에 멈춰 섰다.

제빌이 저런 식으로 은밀하게 행동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어쩌면 지금까지 숨죽이고 있던 슐라민 공작이 무언가 행동을 하는 건지도 모른다.

아니, 하지만 왜?

슐라민 공작은 바보가 아니었다. 국서가 되기 전에 오히려 일을 일으켰다면 몰라도 왜 지금 제빌을 습격한단 말인가. 하지만, 루비나드의 머리에 다른 경우의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제빌은 모두가 낮잡아 보던 존재였다. 그런 그를 질투해서 좋지 못한 마음을 먹었다고 해도 실제로 손을 댈 수 있는 이는 적었다. 게다가 그중에서 제빌이 저렇게 인적이 드문 곳으로 유인할 정도의 사람이라니.

꽤 높은 작위를 지닌 귀족이거나….

“…설마.”

루비나드의 머리에 순간 에브니겔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 황자가 바보도 아니고 결혼 축하 사절로 타국에 와서 신랑을 해친다는 멍청한 짓을 하진 않겠지. 아니, 지금까지 충분히 바보 같은 짓을 해 오긴 했지만….

왠지 불안해진 루비나드는 다시 책상으로 향해 풀어 놓았던 검집을 허리에 맸다.

…혹시 모르니까.

루비나드는 그렇게 스스로를 납득시키곤 방 밖으로 향했다. 그 후, 채 오 분도 지나지 않아 후원에 루비나드의 모습이 나타났다.

빠르게 달려 나가는 그녀는 숨 하나 헐떡이지 않고 제빌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 숲을 지나가면 반드시 흔적이 남는다. 심지어 제빌은 누군가를 유인하듯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었으니 틀림없이 흔적을 ‘남겼을’ 터. 뒤따라오는 친위대를 확인한 루비나드가 빠르게 방향을 틀었다.

제빌은 황궁에 소리가 닿지 않을 정도로 깊숙한 곳으로 누군가를 유인하고 있었다. 밟힌 풀, 일부러 뜯어 놓은 나뭇잎이나 줄기.

루비나드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제발….”

무사해야 하는데.

상대의 무위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제빌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는 알고 있었다. 아직 미숙한 기사들과 검을 맞댈 정도는 되겠지만, 그 이상은 힘들다. 심지어 그는 실전 경험이 거의 없었다.

혹시라도 불길한 예상이 맞았다면. 루비나드는 불안감을 떨치듯 고개를 흔들고는 발길을 재촉했다.

그리고.

“윽!”

막혀 있던 시야가 탁 트이면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통을 호소하며 울리는 그 낮은 목소리에 루비나드의 눈이 사나워졌다.

“제빌 경!”

뒤따르는 친위대가 들을지도 모른다는 것도 잊고 루비나드가 그를 불렀다. 왼팔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제빌이 상대의 검을 빠르게 피하다, 루비나드를 보았다.

“폐하…?! 여긴 왜! 위험합니다!”

제빌은, 적당한 때에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적극적으로 응수하지 않고 피하기만 했다. 헤르젠의 사신에게 보여 줄 최적의 핑곗거리를 만들어 낸 후에.

지금 여기에 루비나드가 있어선 안 되는데.

“감히 이 나라의 아버지 될 이를 해하려 하는 무뢰한이여! 그대 역시 각오를 하고 이런 짓을 저지른 것이겠지.”

끓어오르는 살기가 공간을 지배한다. 그 대상이 아닌 제빌조차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의 살기였다.

하지만 여기서 저자를 죽여선 안 된다. 저자는 에브니겔에게 가서 ‘생각보다는 몸놀림이 좋았지만, 별 볼 일 없었다’라고 전해야만 했다. 에브니겔이 충분히 방심할 수 있도록.

그래야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으니까.

당장이라도 습격자에게 덤벼들 듯한 루비나드의 태세에 잠시 망설이던 제빌이 풀썩 바닥으로 쓰러져 내렸다.

“폐하…, 어서 피하셔야….”

팔은, 솔직히 그렇게 심하게 베이지 않았다. 피부를 조금 깊게 베인 정도. 피를 많이 내려면 그 정도는 베여야만 했다.

그런데도 제빌은 일부러 아픈 척을 하며 무너져 내렸다. 루비나드가 자신을 버리고 습격자에게 가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그리고 그 짧은 틈이 있다면.

“……!”

루비나드가 멈칫한 사이, 습격자는 그대로 숲속으로 뛰어들었다. 아마 이 근처의 지리는 다 꿰고 들어왔던지 숲에서 빠져나갈 스킬 정도는 가지고 있을 터. 그렇지 않으면 애초부터 따라오지도 습격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제빌은 사라진 등을 보며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제빌 경!”

더 큰 적을 마주쳐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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