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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 (52)화 (53/115)

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53)

“흐음.”

정보상을 이용해 알아낸 정보엔 별다를 게 없었다. 아니, 사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한심한 이력이었다.

일단 쿠온 가문 자체가 제국 내에서는 공작가라고는 믿을 수 없는 대우를 받고 있었다. 다들 그들을 비겁자라고 우습게 보았으며, 뒷말하는 것도 아니고 공공연하게 놀림감으로 삼았다. 국서는 그런 가문의 셋째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부모는 물론 형제들에게까지 냉대를 받았다. 아비라는 자는 형들이 그를 괴롭힌다는 걸 알면서 도리어 부추겼다고 한다. 이게 무슨 콩가루 같은 집안인지. 그런 집에서 태어나고 자란 제빌이 정상일 리가 없었다.

예상대로 사교계에서도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던 그가 갑자기 반짝 빛나게 된 건 당시 황녀, 루비나드의 놀이 친구가 되면서부터였다.

“별명이 화려한데.”

시종. 종자. 광신도. 거머리.

창작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흔한 별명이었지만, 그를 가장 잘 드러내는 단어들이기도 했다.

그는 날이 궂든 몸이 아프든 상관없이 매일 황궁으로 향했다. 그리고 루비나드가 수업을 받는 시간을 제외하면 그녀의 곁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왜 그녀가 그를 내치지 않았을까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다.

황녀 루비나드가 어떤 위치인지 알고 놀이 친구들이 모두 이탈했을 때도, 황태녀로 임명되었을 때도, 황제가 되었을 때도 제빌 디 쿠온은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녀의 위치가 높아질수록 제빌의 위상 또한 높아져 갔다. 몇 명이나 그녀의 부관으로 자원해 일했지만, 대부분이 며칠 지나지도 않아 혀를 내두르며 떨어져 나갔다. 그 정도로 업무량이 엄청난 데다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통달해야만 했다.

지식이 없는 분야는 용어의 뜻을 찾아보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다 갈 정도였다고.

하지만 제빌 디 쿠온은 그런 루비나드에게 뒤처지지 않고 호흡을 맞춰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남자였다. 그러면서 그에 대한 평가가 어느 정도 반등했고, 몰락 직전이었던 가문을 일으켜 세움으로써 완전히 인정받았다.

몇몇 가문은 그에게 딸들과의 결혼을 주선하기도 했으나 그때마다 번번이 고개를 저었다고 한다.

“그렇겠지.”

오랫동안 루비나드라는 사람을 보아 왔던 남자다.

심지어 아직, 에브니겔은 상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깊숙하고 내밀한 그녀의 모습까지 다 알고 있을 터였다. 루비나드를 조사하면 조사할수록 더 그녀에게 빠져들게 된 에브니겔처럼 그 역시 루비나드의 신봉자가 되었겠지.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제빌이라는 남자는 계략에 능하다는 제 아비와 달리 뒤가 깨끗했다. 사람들을 돕거나 빈민가에 돈을 쓰는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그뿐. 그 외에는 별다를 게 없었다.

대체 어떻게 이런 남자가 국서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걸까.

“능력이라면 나도 빠지지 않는데.”

그렇게 중얼거린 에브니겔이 손안의 보고서를 벽난로로 집어 던졌다.

처음에는 꼼꼼히 읽었으나 생각한 것 이상으로 별 볼 일 없다는 걸 알고는 더는 읽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였다. 그래서 에브니겔은 보지 못했다. 보고서 끄트머리에 작게 적혀 있는 몇 문장을.

“왜 거슬린 건지를 모르겠군.”

감정을 감추는 게 지나치게 능숙한 게 걸렸었다. 하지만, 성장 이력을 보니 대충 짐작이 갔다. 그동안은 제 감정을 드러내면 꼭 무언가 문제가 생겼던 것이겠지. 살기 위해 익숙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리라.

불쌍하긴 하지만.

“거슬리는 건 치워야 하지 않겠어?”

그렇게 중얼거리며 에브니겔이 방 한구석을 바라보았다. 거기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앉아 있던 여성이 깊게 고개를 숙였다.

“저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하께서 거슬리시는 것이 있다면 제가 모두 치워 드릴 테니.”

여기사의 눈에서는 한없는 애정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그 눈빛을 당연한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황자에 잘생기기까지 한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여자가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도 않았으니까.

하지만.

“잘 부탁해, 키아네.”

지금의 에브니겔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얼마나 잔혹한 짓을 했었는지. 그런데도 다시 그녀를 움직이는 건.

“적당히, 다치지 않을 정도로만 해.”

오만하게, 누군가에게 명령하는 것이 익숙하던 주인이 변했다. 그리고 키아네는 그게 누구의 영향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 여자. 그림자 속에 숨어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여자. 어둠 속에서 살고 있는 키아네이기에 알 수 있었다. 그 여자는 태양이다. 그러니 계속 가까이 간다면 눈이 멀고 살점이 타들어 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그녀의 주인은 멍청한 남자는 아니었다. 최소한 자신의 위치를 알고 그를 이용하거나, 제 형의 방해가 되지 않게 처신할 줄은 알았다. 그 김에 약간의 놀이도 함께.

하지만 지금의 주인은 멍청하기 그지없었다. 태양에 눈이 멀어 손을 뻗는 모습이 한없이 어리석고 또….

사랑스러웠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하.”

키아네는 지금의 바보 같은 주인이 꽤 마음에 들었다. 물불 가리지 않고 원하는 것을 손에 넣으려 하는 그가.

그래서 온 힘을 기울일 생각이었다. 그 남자를 치워 두는 일에.

오렌지색 눈동자가 즐거운 듯 빛났다.

* * *

“오늘 알현은 예정은?”

“총 다섯입니다. 그중 하나는 오늘 급하게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보통 알현은 최소한 일주일 전에 요청이 들어온다. 이런 식으로 당일에 요청이 들어오는 일은 드물었다. 평소라면 무시했을 제빌이 자신에게 알린다는 건….

그럴 만한 상대라는 뜻이리라.

루비나드가 눈을 가늘게 떴다.

“오늘 갑자기? 상대는?”

“헤르젠 왕국의 사신입니다.”

“헤르젠 왕국이…. 무슨 일이지?”

“글쎄요. 하지만 정식으로 알현을 요청한 걸 보면 나쁜 일은 아닐 거라 짐작됩니다.”

론디아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걸까.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걸까.

헤르젠 왕국은, 선황 데거베일이 동맹을 맺으려다 실패한 나라 중 하나였다. 그 원흉이 바로 그 론디아스였다. 루비나드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 후에도 몇 번이나 우호의 신호를 보냈지만 계속 무시했었는데.

“시간은?”

“갑자기 들어온 요청이라 아직 시간을 제대로 잡진 못했습니다. 기존의 알현이 모두 끝난 후라면 5시 30분이 되는데, 저녁 시간에 가까운지라….”

저녁 시간까지 회의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렇다고 오늘 들어온 요청을 거절하면 또 언제 마음이 돌변할지 모를 일이었다. 헤르젠 왕국은, 굳이 따지자면 로간 제국과의 동맹에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으니까.

론디아스가 역사에 남을 외교적 결례를 범했던 그 연회 때도 그랬다. 그들은….

“그대도 파악한 게 없나?”

“네. 너무 갑작스러워서 파악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어느 정도의 동향은 계속해서 듣고 있었다. 하지만 이 방문은, 제빌에게도 꽤 의외의 것이었다. 이제 곧 헤르젠의 국왕이 왕세자인 페르안 폰 헤르젠에게 선위할 것이라는 관측이 섞인 보고가 올라오고 있던 터라 더 의외였다.

혹시 로간 제국과의 동맹을 왕세자에게 맡김으로써 더 힘을 실어 줄 생각인 걸까.

“조금 더 알아볼까요?”

“으음. 사신에게는 지금 당장은 어렵다고 양해를 구한 후 뒤를 알아보도록 해. 귀빈실을 내어 주고 극진히 대접하라 이르고.”

“알겠습니다. 만약 당장 만나야겠다고 하면 어찌할까요?”

“그대에게 맡기겠어. 최대한 미뤄 보도록. 상대의 수를 아무것도 모른 채 범의 아가리에 들어갈 순 없으니.”

아가리, 라는 말을 한 후 루비나드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제빌의 입술로 향했다. 그리고 이내 자신이 어딜 보고 있는지 깨닫고는 황급히 눈을 피했다.

그날. 희롱이나 다름없는 행동으로 그의 입술을 앗았던 그날 이후로 계속해서 바라보게 된다. 마치 이마에 그의 입맞춤을 받았던 그때처럼.

아니, 이번에는 더 질이 나빴다. 그땐 그의 입술이 너무 예뻐서 신경 쓰였던 거라면 지금은 감촉까지 되살아났으니까. 며칠 지났으니 슬슬 잊힐 만도 한데 도무지 잊히지 않았다.

이게 다.

“…탓이야.”

그의 입술이 너무 탐스러운 탓이었다.

남자 입술이 왜 저리도 붉고 예쁘단 말인가. 술에 취해 멍한 정신이 과일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예쁜 게 잘못이다. 게다가 스치듯 혀끝으로만 맛본 그의 입술은 몹시도 달콤해서.

부드러워서.

그 촉감과 맛이 계속 지워지지 않고 떠올랐다.

“폐하?”

“으, 음?”

엄한 생각을 하고 있던 탓에,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어설프게 대답하고야 말았다. 루비나드가 슬쩍 그의 얼굴을 바라보자 제빌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뭐가?”

“제 얼굴을 계속 피하시기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물론, 왜 그러는지는 알고 있었다. 제빌 역시 같았으니까.

몰랐던 걸 상상하고 바라는 것과 이미 한 번 맛본 것을 갈구하는 것은 다르다. 입술에는 닿지도 못했는데 그저 그 붉고 말캉한 것에 스쳤던 감촉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해졌다. 만약 그 입술에 닿았더라면 이성을 유지할 수나 있었을까.

어쩌면 잠든 그녀를 깨울 짓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성에 전혀 내성이 없는 루비나드가 계속 자신을 흘끔거리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었다. 그게 무안해서든, 자신을 남자로 인식하기 시작해서든 간에.

알면서도 굳이 묻는 것은 당연히 그녀가 의식해 주길 바라서였다.

“아… 어… 아니?”

“그런데 왜…. 혹시 소스 같은 게 묻기라도 한 것입니까.”

제빌은 일부러 제 손을 들어 입술을 쓱 쓸었다. 그 손가락의 움직임을 따라 보라색 눈동자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러다 이내 화들짝 놀래 고개를 돌린다.

그게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계속 놀리고 싶어진다.

“아무것도 없다니까.”

“그럼 왜 절 보시지 않는 겁니까?”

제빌이 한 걸음 더 가까이 루비나드에게 다가갔다. 루비나드가 반사적으로 물러나자 제빌이 또 한 걸음 더 내디뎠다.

“잠, 잠깐.”

“네?”

“너무 가까이 오지 말라니까.”

“진짜로 뭔가 이상한 게 있습니까? 있다면 좀 떼어 주십시오.”

제빌은 웃음을 삼키고 진지한 얼굴로 그녀에게 요청했다. 그리고 맡기겠다는 듯 가만히 눈을 감았다. 언제나 창을 등지고 있는 루비나드이기에, 햇빛이 그의 얼굴 위로 잔뜩 쏟아졌다.

그 반짝임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

“…없, 없다고 했잖아! 그만하고 알현 준비나 마저 하게!”

빽 소리를 지른 루비나드가 휙 하고 의자까지 돌려 버렸다. 살며시 눈을 뜨자 보이는 그녀의 뒷모습에 제빌이 결국 입꼬리를 올리고야 말았다.

아무도 모를, 자신만이 알고 있는 사랑스러운 얼굴.

그걸 언제까지나 지켜보고 있고 싶었다.

그걸 위해선.

“…네. 철저하게 준비하겠습니다.”

눈을 내리깔며 대답하는 제빌의 목소리가 어딘지 묘했다. 슬쩍 뒤를 돈 그녀는 보고야 말았다.

그 예쁜 얼굴 한가득 수상쩍은 냄새가 풀풀 풍기는… 몹시도 음습하고 아름다운 미소를 띤 제빌의 얼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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