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 (51)화 (52/115)

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52)

방심하고 있던 제빌은, 루비나드가 점차 가까워지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그가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양 뺨이 그녀의 손아귀에 잡혀 있는 상태였다.

“폐하…?”

붉은 입술이 움직였다.

루비나드의 눈에는 마치 사과 위에 발린 초콜릿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사과잼이 들어갔다더니, 왜 사과 위에 발려 있는 걸까. 게다가 붉은 것은 윤기가 돌고 촛불 아래에서 아스라이 빛나고 있어서 유독 맛이 좋아 보였다.

점차 가까워지는 얼굴에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낀 제빌이 그녀를 살짝 밀쳐 내려 했을 때.

“……?”

할짝.

실제로 그런 소리가 들린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소리가 들린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발간 입술에 묻어난 초콜릿 위로 붉은 혀가 스쳐 지나갔다. 그 촉촉한 감촉에 제빌의 머리가 하얗다 못해 까맣게 물들었다.

대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이해했다간 큰일이 날 것 같았다. 제빌이 멍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만 보고 있는데, 루비나드가 만족스럽다는 듯 씩 미소 지었다.

“생각보다 더….”

달콤하군.

말을 채 다 끝맺지 못하고 루비나드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아마 한계였던 거겠지. 까맣게 물든 머릿속 한구석에서 이성이 그렇게 속삭였다. 그리고 제빌이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루비나드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잠들었다고? 이 상태에서?

…정말 날 죽일 셈이신가, 이분은.

“…후.”

제빌은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욕망을 내리눌렀다. 만약 루비나드가 깨어 있을 때 상황을 인지했다면….

이대로는 아마 끝나지 않았겠지.

무방비하게 잠든 얼굴 위로 씩 웃던, 장난기 가득한 얼굴이 겹쳐졌다. 그 순진한 얼굴에 색기를 느끼는 날이 올 줄이야. 심지어 루비나드에겐 그럴 의도도 없었는데.

당신은 언제나 그렇다. 아무 감정도 없으면서 날 쥐고 흔든다. 그리고 대부분은 내 자업자득이었다. 그게 얼마나….

뭘 망설여. 먼저 시작한 건 그녀야. 어차피 부부고, 같은 방을 쓰게 되었는데 아무리 둔하고 늦된다 해도 이런 걸 상상도 안 해 봤겠어?

마음의 속삭임에 제빌은 고개를 내저었다.

시작한 건 제빌이었다. 그녀가 술에 약한 걸 알고 있었으면서, 술을 먹기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 제 욕심으로 그녀에게 초콜릿을 먹였다. 그러니 벌을 받는 것뿐이었다.

제빌은 씁쓸하게 웃곤 제 손으로 얼굴을 가려 버렸다. 비록 루비나드는 잠들어 있었지만, 그런 그녀에게조차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이 더럽고 추악한… 욕망 가득한 얼굴을.

그렇게 제빌은 한참이나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앉아 있어야만 했다.

* * *

“으, 으음.”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루비나드는 머리를 싸쥔 채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자 마법처럼 뜨거운 손이 그녀의 이마를 짚어 주었다.

“많이 아프십니까?”

걱정 가득한 목소리. 익숙한 목소리에 루비나드가 입을 열었다.

“으음…. 조금.”

“죄송합니다, 폐하.”

“그대가 죄송할 게….”

흐릿한 의식 사이로 무언가가 고개를 내밀었다.

곤혹스러워하는 제빌. 그에게 무언가를 내밀고 있는 자신. 붉은 입술과 그 위에 묻어난 끈적한 초콜릿. 그리고….

“…으.”

“으?”

“으아아악!”

루비나드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가만히 누워 있어도 지끈거리고 어지럽던 머리 탓에 그대로 눈앞이 핑 돌았다.

“폐하!”

놀란 제빌이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뒤늦게 감각을 되찾은 코에서 훅, 알싸하고 기분 나쁜 냄새가 올라왔다. 어디선가 맡아 본 적이 있는 냄새.

이건 설마….

루비나드가 제빌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그가 죽을죄를 짓기라도 한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폐하. 설마 술이 들어 있는 초콜릿이 있을 줄은….”

가슴 한구석이 따끔거렸다. 그녀에게 거짓말을 한다는 건, 제빌에게 있어서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다. 자신의 감정, 자신의 마음을 한순간도 사실대로 이야기해 본 적이 없으니까.

루비나드에게 미움받지 않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제빌의 예상을 벗어난 부분이 많았다. 루비나드가 잠든 사이에 알아보니 안에 들어간 술은 그냥 사과주가 아니라 와인보다 훨씬 도수가 높은 칼바도스라는 술이었다. 그러니 초콜릿 몇 개 먹고 그렇게 빨리 취했지.

게다가 만취한 루비나드가 그렇게….

제빌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아니, 그대도 모르고 그런 게 아닌가. 그보다 내가 더 미안하군. 그….”

덩달아 루비나드의 얼굴도 새빨개졌다.

솔직히 말하면 어젯밤의 일은 한 편의 연극이라도 본 것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다만 혀에 닿았던 그 말랑거리고 보드라운 살덩이의 감촉은 이상할 정도로 생생해서, 기분이 묘했다.

남자로 의식하지 않으려 그토록 애썼고, 겨우 성공하나 싶었는데.

역시 술은 마실 것이 못 되었다. 그나마 기억을 하고 있으니 사과라도 할 수 있었지, 기억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취했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루비나드는 아직 술이 덜 깬 머리로 어떻게 해야 제대로 사과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했다.

잠시 말을 멈췄던 그녀에게 제빌이 미리 준비해 두었던 꿀물을 내밀었다.

“그… 일어나시면 속이 아프실 거라고 생각해서 준비해 두었습니다. 좀 드십시오.”

한 번 달아오른 얼굴은 쉬이 가라앉질 않았다. 밤새 그를 괴롭힌 충동에 더더욱.

그걸 알 리 없는 루비나드는 순순히 그의 손에서 컵을 받아 들었다.

씁쓸하던 입안에 달콤한 액체가 흘러 들어가자 조금 정신이 들었다. 거기에 코를 괴롭히던 톡 쏘면서도 불쾌한 향 역시 꿀의 향에 가려 옅어졌다. 한 컵을 다 비우자 입안에 달콤한 끈적임만이 남았다.

정말… 다시는 술을 입에도 대지 말아야지. 그렇게 이성을 잃고 본능대로만 행동하는 경험은 다신 하고 싶지 않았다. 루비나드의 안에 있던 알코올 혐오가 더 강해졌다.

“그대에겐 정말…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미안하군. 그… 혹시 바라는 게 있다면 말해 주게.”

바라는 것.

내가 지난밤 했던 상상들을 실제로 이뤄 달라고 하면 당신은 어떻게 할까.

제빌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런 짓을 하면 다시는 루비나드의 곁에 있을 수 없게 된다. 게다가 이번 일은 자신의 책임이 컸으니 욕심을 부리기엔 그에게 얼마 남지 않은 작은 양심이 거슬렸다.

그러나 그 외에는 바라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아, 아니. 하나 있나.

“그럼 저랑 약속해 주십시오.”

“약속? 어떤 약속?”

“행여라도….”

제빌이 손을 뻗었다. 루비나드가 들고 있는 컵을 잡는 척, 그 가느다랗고 하얀 손가락에 제 손끝을 대었다. 그리고 루비나드가 무언가를 느끼기 전에 컵을 잡아 제 쪽으로 가져왔다.

제빌이 어떤 이야기를 할지 전전긍긍하던 루비나드는 그 움직임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술을 드실 땐 꼭 제 앞에서만 드셔 주십시오.”

“…응?”

다시는 술을 마시지 말라는 게 아니라?

의외의 말에 루비나드가 고개를 갸웃했다. 제빌은 담담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번 일로 폐하께서 만취하시면 어찌 되는지 알았으니…. 다른 사람의 앞에서 술을 마시다 이 같은 행동을 하시면 큰일 나지 않겠습니까.”

“그럼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으면 되지.”

실제로도 그럴 생각이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제빌이 고개를 내저었다.

“폐하께서 얼마 되지 않는 술에 이성을 잃으신 데는 익숙하지 않기 때문도 있습니다.”

“익숙하지 않아서?”

“술은 마시면 는다고들 하더군요. 다행히 지금까진 없었지만, 외교 자리에서 술잔을 나눠야 할 일도 때로는 있을 텐데 그때도 이러실 순 없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뭐, 여차하면 술인 척 물을 마시는 방법도 있었다. 설마 잔에 있는 게 진짜 술인지 확인할 정도로 용의주도한 상대는 없을 테니.

하지만 이번 일로 깨달았다. 루비나드에게 술을 먹인다는 건….

제빌이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럴 때를 대비해서라도 술에 익숙해지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니, 하지만 그럼….”

그대를 괴롭게 할 텐데.

혼자서 술을 마시면 된다는 생각은, 안타깝게도 루비나드의 머릿속엔 없었다. 애초에 술을 즐기지 않는 그녀에게 있어서 떠올릴 수도 없는 생각이기도 했다. 물론 제빌의 제안은 그걸 노린 것이기도 했다.

“다른 이들보다는 제가 낫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게다가 저는… 일단은 폐하의 남편이기도 하니 설령 그런 행위를 또 하신다고 해도 문제 될 건 없지 않습니까.”

…그런가? 어쩐지 설득력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아직 술이 덜 깬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못한 탓이었다.

“이번 일엔 제 잘못이 큽니다. 하지만, 덕분에 폐하께서 술에 많이 약하시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으니 이참에 익숙해지는 훈련을 해 보도록 하지요.”

“훈련?”

“네. 가끔 저랑 와인 한 잔씩 하도록 하지요. 잠들기 전에 마시는 와인은 수면에도 도움이 된다고 하니까요.”

“으, 으음. 그게 훈련으로 되는 거라면….”

“술을 피하는 것도 좋지만, 술을 이겨 내는 것도 중요한 게 아니겠습니까.”

어쩌면 그 과정에서 또.

어딘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루비나드를 보며, 제빌이 싱긋 미소 지었다.

* * *

“으, 머리 울려….”

아침에 제빌이 준 꿀물 덕에 조금은 가라앉았지만, 여전히 속이 울렁거렸다. 대체 이런 걸 뭐가 좋다고 마시는 걸까. 얼결에 제빌의 제안에 동의하긴 했지만, 여전히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런 걸 초콜릿에까지 넣어 둔 이유는 무엇일까. 그냥 먹기는 쓰고 맛없으니 초콜릿의 향으로 덮어 보려고 했던 걸까. 루비나드에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뿐이었다.

앞으로는 초콜릿조차 마음대로 먹을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 폐하.”

잠시 벽을 짚은 채 울렁이는 속을 진정시키고 있던 루비나드에게 듣기 싫은 목소리가 들렸다.

대체 왜 저 남자가 또 여기에 있는 걸까. 남의 나라 황궁을 무슨 제집 드나들듯….

루비나드는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겨우 관리하고는 소리 나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황자가 여긴 무슨 일로 오셨소.”

하지만 순간적으로 튀어나온 퉁명스러운 말은 막지 못했다. 에브니겔이 흠칫, 놀라 멈춰 섰다.

루비나드는 지금까지 한 번도 대놓고 에브니겔을 적대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말은, 적대까진 아니어도 꽤 거부하는 느낌을 담고 있었다. 뒤늦게 제가 내뱉은 말이 어떻게 비칠지 깨달은 루비나드가 황급히 말을 이었다.

“여긴 집무실 근처라 국빈이라 하더라도 출입을 삼가는 게 좋소. 괜히 그대가 오해받는 걸 짐도 원치 않으니.”

엷은 미소까지 곁들이자 겨우 마음을 놓은 듯 에브니겔이 다시 다가왔다. 그 손에는 작은 상자 하나가 들려 있었다.

“최근 쇼나한의 귀족과 친해졌는데, 로간 제국에서는 보기 드문 디저트를 선물 받아 폐하께도 맛보여 드리려 가져왔습니다.”

디저트, 선물. 어젯밤의 기억이 떠올라 루비나드가 입을 꾹 다물었다. 다시 코에 알코올의 향기가 밀려 올라오는 것 같은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루비나드를 알 리 없는 에브니겔이 웃으며 상자를 열었다.

거기엔.

“폐하께서도 초콜릿을 좋아하십니까?”

“…싫어하진 않네만. 그… 이건 그냥 초콜릿인 건가?”

“예?”

그냥 초콜릿이라니? 에브니겔이 웃는 얼굴인 채로 고개를 기울였다.

루비나드는 자신의 질문이 이상했음을 깨닫고 말을 덧붙였다.

“뭐… 이상한 거 든 건 없고?”

“예?”

이상한 거? 초콜릿에 들어가는 것 중 이상한 게 있었던가?

에브니겔의 머릿속이 더 혼란스러워졌다. 그 반응을 보던 루비나드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네. 잘 받도록 하지….”

상자를 받아 든 채 터벅터벅 걸어가는 루비나드의 뒷모습이 어쩐지 음울해 보였다. 그래서 에브니겔은 그녀를 잡지도 못한 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니, 답례로 데이트라든가….”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말을 중얼거리면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