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51)
어스름이 내린 저녁.
간만에 선황 데거베일의 방을 들렀다가 방으로 온 루비나드는 꽤 즐거워 보였다. 그의 몸 상태가 호전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덕이리라.
탁자 앞에 앉아 있던 제빌이 엷게 웃으며 그녀를 맞이했다.
“선황 폐하께서 많이 호전되셨다지요.”
“으음. 많이 마르시긴 했지만, 목소리는 쩌렁쩌렁하시더군. 이대로 기력을 회복하셨으면 좋겠는데.”
“또 잔소리하지 않으셨습니까?”
“왜 안 했겠나. 조금 마른 게 아니냐는 둥, 잘 쉬고는 있냐는 둥. 당신 몸이나 신경 쓰실 것이지 왜 건강한 나를 잡고 그러시는지 원.”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입가에 맺힌 미소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최근 들어 가장 기쁜 듯한 모습에 제빌의 입가에도 덩달아 엷은 미소가 스몄다.
“아, 폐하. 드문 선물이 있기에 가져와 보았습니다.”
“선물?”
“네. 들어왔던 선물을 정리하다 발견한 것인데 초콜릿이 있더군요.”
“초콜릿이라니. 드문 것이긴 하군.”
초콜릿의 원료가 되는 콩은 재배하기가 쉽지 않을뿐더러 초콜릿으로 만드는 과정 역시 녹록지 않았다. 사계절이 뚜렷한 제국에서는 거의 보기 힘든 디저트이기도 했다.
루비나드가 흥미를 보이며 탁자로 다가왔다.
“단 것에는 아무래도 씁쓸한 것이 함께하면 좋을 것 같아서 평소 드시던 것과 다른 커피를 준비했습니다.”
마치 그녀가 언제 도착할 건지 알기라도 한 듯 딱 마시기 좋은 온도로 식은 커피에서 은은한 향이 피어올랐다. 그 향에 이끌린 루비나드가 제빌의 반대편에 앉았다.
“그대도 좀 들지 그러나. 초콜릿이 피로에 좋다고 하던데.”
“폐하 먼저 드셔야지요.”
“으음.”
접시에 가지런히 쌓여 있는 초콜릿 중 하나를 집어 든 루비나드가 재빨리 입에 쏙 밀어 넣었다. 입안에서 끈적한 것이 녹아들며 달콤한 향과 맛이 밀려 올라왔다. 동시에 목구멍이 화끈거렸다.
“……? 뭔가 묘한 향기가 나는데.”
“묘한 향기요?”
고개를 갸웃한 제빌이 손을 뻗어 초콜릿 하나를 집어 들었다. 한입에 쏙 넣기 좋은 크기의 네모난 것을 이리저리 살피다가 입에 밀어 넣었다. 입안에서 퍼지는 달콤한 맛과 톡 쏘는 듯한 향기.
초콜릿 향에 묻혀서 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잠시 생각하던 제빌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사과 향인 것 같군요.”
“사과?”
“사과잼 같은 게 들어갔다고 합니다.”
정확하게는 사과주가 들어간다고 했지만. 잼과 주는 어차피 글자 두 개의 차이이지 않나. 제빌은 뻔뻔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약간 숙성된 사과잼이 들어간다더니 그 향이 강하게 나는 모양이군요.”
“어쩐지…. 전에 먹었던 것과는 맛이 좀 다르다 싶더니. 이것도 나름대로 별미로군.”
초콜릿 하나를 더 입에 넣은 루비나드가, 이번엔 채 다 녹아내리기 전에 커피를 홀짝였다. 입안에서 쌉싸름한 커피의 향과 달콤한 초콜릿이 뒤섞여 확실히 색다른 자극이 되었다.
기분 탓인지 머리가 멍해지는 것도 같고. 살짝 몸에서 열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방이….”
“네?”
“조금 덥지 않나?”
“그렇습니까? 불을 좀 줄이도록 하지요.”
제빌이 일어나 벽난로로 다가갔다. 부지깽이를 들어 슥슥 장작을 헤집는 사이 루비나드는 초콜릿 두 개를 더 입으로 가져갔다.
처음에는 톡 쏘는 듯한 향이 나는 것 같더니 먹으면 먹을수록 달기만 했다. 하나만 더 먹자고 생각했던 게 어느 틈엔가 접시의 반이 사라져 있었다. 제빌이 탁자로 돌아왔을 때는….
“후….”
루비나드가 숨이 내뱉자 뜨거운 기운이 확 몰려왔다. 그럴 수밖에.
술에 약한 건 알고 있었지만, 초콜릿 안에 들어간 술에도 취할 줄은 몰랐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어느덧 내려앉은 어둠 속에서도 유난히 말갛게 보였다. 평소 얼굴이 하얀 편이라 더 그렇게 느껴지는 걸지도 몰랐다.
“괜찮으십니까, 폐하?”
걱정스러운 마음에 말을 걸자 루비나드가 살짝 풀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제빌은, 촛불의 일렁임 속에서 그림자 졌다가 이내 밝아지는 보라색 눈동자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평소에 맑게 반짝이는 만큼 몽롱해진 눈동자가 뭐라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요염했다. 이렇게 되자 도리어 당황스러운 것은 제빌이었다.
-성년식에서 꼭 와인을 마셔야 한다는 건 어떤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것인지.
-성년이 되기 전에는 할 수 없었던 걸 이제는 할 수 있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아닐까요? 물론 그 책임 역시 스스로 져야 한다는 것도.
루비나드가 처음으로 술을 입에 댄 건 성년식이 있었던 날이었다. 아직 황태녀로 임명되기 전이어서 그리 화려하게 치르진 않았지만, 그래도 꽤 규모가 큰 행사였다. 거기에서 차마 술은 마시고 싶지 않다고 할 수 없었던 루비나드는 꾸역꾸역 다섯 잔의 와인을 받아 마셨다.
네 잔은 데거베일이 준 것이었고, 한 잔은 제빌이 준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루비나드의 얼굴이 살짝 상기되었다. 게다가 평소보다도 더 투덜거림이 심해졌다. 제빌은 루비나드가 생각보다도 더 술에 약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건 이미 알고 있어. 굳이 상기시키지 않아도….
-그래도 폐하께서는 기뻐 보이셨습니다. 이제 곧 저하와 술자리를 만드실지도 모를 일이지요.
-아버지가… 기뻐하실까? 그런 건 원래 아들과 함께해야 즐거운 게 아닌가?
그렇게 묻는 보라색 눈동자는 다양한 감정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어쩌면, 평소에 루비나드가 보여 주는 모습이 전부가 아닌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폐하께서는 편애한다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저하를 각별히 아끼시지 않습니까. 틀림없이 기뻐하실 겁니다.
-…그래. 아버지께서 기뻐하신다면야.
그렇게 말하며 배시시 웃어 보이는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럽던지.
그 외에도 루비나드는 다양한 이야기를 해 주었었다. 제빌의 뒷말을 하는 이들을 창피 준 이야기라던가, 두 오라버니에 관한 이야기라던가. 어렸을 때 아프고 힘들어 잠 못 드는 날이 있으면 엔도르빌이 꼭 안아 재워 주었다는 이야기도 그때 들었다.
평소의 루비나드라면 하지 않을 이야기들이었다.
제빌에 관련된 이야기들을 숨긴 건, 제빌이 상처 입을까 걱정되어서였을 것이다. 오라버니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것 역시 이유가 있었겠지. 하지만 술에 취한 그녀는 제빌에게도 여태까지 보여 주지 않았던 모습들을 보여 주었다.
그게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웠던지.
하지만 그 이후로 루비나드는 좀체 취한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다. 숙취로 머리가 지끈거리는 게 썩 좋지 않은 느낌이기도 했고 애매하게 취한 탓에 그날의 일을 다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안. 그대에게 추한 모습을 보였어.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는 게 좋겠군.
언제나 신중하게 말을 거르던 루비나드였다. 그런 그녀가, 아무리 제빌에게라도 제 모든 것을 드러내 보인 것이 썩 충격적이었던 모양이었다. 제빌의 눈에는 그저 귀엽고 사랑스럽기만 하거늘.
안 그러셔도 되는데. 더 많이 보여 주셔도 되는데. 차마 하지 못한 말은, 끝내 지금까지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선물에 섞여 들어온 이 초콜릿을 봤을 때 조금 나쁜 마음이 들었다. 이거라면 루비나드도 모른 채 먹어 주지 않을까. 그때의 그 귀여운 모습을 좀 더 볼 수 있지 않을까.
설마 안에 든 술이 와인 따위는 가볍게 뛰어넘을 정도의 도수를 가졌을 거라곤 예상도 못 했다. 루비나드가 흥미 없는 영역에 대해서는, 제빌 역시 공부하지 않았으니까.
“괜찮냐니…, 뭐가?”
헤실 웃는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제빌은 쿵, 떨어지려는 심장을 부여잡고 물 주전자를 찾았다. 덜덜 떨리는 손 탓에 컵을 타고 흘러내린 물이 손가락을 적셨다.
하지만 그런 건 느껴지지도 않았다. 무방비한 미소에 마치 넋이 나갈 것만 같았다.
“일단… 물이라도 좀 드시는 게 좋겠습니다, 폐하.”
“물? 아니야, 아니야. 괜찮아.”
배시시 웃더니 또 손을 뻗어 초콜릿을 하나 집는다. 그 손을 차마 막아서지도 못한 채 멍하니 보고만 있자, 루비나드가 손안에서 초콜릿을 굴렸다.
“신기한 일이야. 이걸 먹으니 왠지 기분이 날아갈 것처럼 좋아졌어. 이래서 초콜릿이 피로 해소에 좋다고 하는 건가?”
아니, 그건 술 때문인 것 같습니다만, 폐하….
하지만 순순히 술이 들어간 걸 고하면, 내일 정신이 든 루비나드가 그에게 무어라 할지 모를 일이었다. 알면서도 그걸 먹였다는 걸 알게 될 테니.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또 두 개의 초콜릿이 루비나드의 입안으로 사라졌다.
“그대도 좀 먹어 봐.”
저만 먹는 게 미안했던지 루비나드가 생글생글 웃으며 손을 뻗었다.
차라리 내가 나머지를 다 먹어 치우는 게 낫겠다. 그제야 제빌의 머릿속에 하나의 해결책이 떠올랐다. 순순히 손으로 받아 들려고 하자 루비나드가 홱 손을 위로 치켜들었다.
“어허.”
“왜 그러십니까, 폐하? 저 주시려는 것 아니셨습니까.”
“내가 먹여 줄게.”
“…예?”
겨우 제 기능을 하려던 제빌의 머리가 다시 정지했다. 지금 이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지?
그의 심란함이야 알 바 아닌 루비나드가 여전히 배시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먹여 준다니까.”
“아니…, 제가 그냥 먹겠….”
“나는 그대가 먹여 주는 쿠키를 받아먹었는데, 그대는 못 하겠다고 하는 거야?”
“그거랑 이건 다른 문제 같습니다, 폐하.”
“뭐가 달라? 어서, 빨리. 녹잖아.”
하얀 손가락 위로 코팅되듯 초콜릿이 녹아들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제빌이 결국 한숨을 내쉬며 상체를 숙였다. 하얀 손가락 끝에 있는 것만 보려 애쓰며 입을 벌리자 쏙, 하고 루비나드가 그 안에 초콜릿을 밀어 넣었다.
하지만 확실히 취하긴 취한 모양이었다. 흔들린 손가락이 제빌의 입술을 훑고 지나가면서 손가락 위에 있던 녹은 초콜릿이 묻어났다.
“맛있어?”
“…네, 아주 맛있습니다.”
맛 따위가 느껴질 리가.
분명 달콤했던 것 같기도 하고, 알코올의 톡 쏘는 느낌이 났던 것도 같은데. 지금은 마치 진흙이라도 씹고 있는 듯했다. 취한 것도 아닌데 머리가 어지럽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느껴지는 것이라곤 제 입술에 닿았던 부드러운 손가락의 감촉뿐이었다.
다시는…. 다시는 폐하께 술을 먹이지 않으리라.
두 번 취하게 만들었다간 심장이 남아나지 않게 생겼다. 어쩌면 말도 없이 술을 먹이고 귀여운 모습을 보겠다던 제 흑심이 벌을 받은 건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며 제빌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을 때.
“……?”
무언가가 일어났다. 제빌의 인지를 아득하게 넘어선 무언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