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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 (49)화 (50/115)

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50)

“다시 선물이 쌓이는군요.”

집무실 안을 가득 채운 보석과 옷, 향료 따위를 바라보던 제빌이 나직하게 말했다. 루비나드는 불쾌하다는 얼굴로 그걸 흘끗거리더니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치켜올렸다.

“그 빌어먹을 황자 탓이야.”

“폐하.”

“어울려 주는 게 아니었는데. 그렇다고 거절할 수도 없지 않나.”

“폐하의 선택은 옳으셨습니다. 다만….”

설마 국내의 젊은 귀족들에게 이런 영향을 끼칠지 몰랐을 뿐이지.

악토그라토리아의 난봉꾼 황자가 황제 폐하께 들이대고 있다더라. 폐하도 싫지 않으신지 이번에 극장에 함께 나타나셨다지. 설마 그 황자를 가장 먼저 후궁에 들이실 셈인가. 이러다가 우리만 뒤처지는 건 아닌가?

한 번 가라앉았던 국내 여론이 조용히 그림자 속에서 끓어올랐다. 그들의 걱정이야 어찌 보면 타당한 것이었다. 먼저 후궁에 들어 빨리 시중을 들수록 총애 싸움에서 유리해지는 건 사실일 테니.

게다가 에브니겔 황자의 태도가 그들의 초조함에 불을 붙였다. 루비나드의 환심을 사려 국화까지 멋대로 반출했다는 게 소문이 나면서 그가 진심으로 로간 제국의 황제를 노린다는 소문이 자자해진 것이다.

난봉꾼인 만큼 여자를 다루는 덴 익숙할 터. 국내 귀족들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저도 폐하도 이런 것까진 예상치 못했으니까요.”

“으음. 총애 싸움이라는 게 격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겨우 연극 하나 보러 간 것 때문에 이 난리가 날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어.”

투덜거리는 말투가 꽤 편안해져 있었다. 최근 젊은 귀족들에게 시달린 탓에 또 마음의 경계가 느슨해진 탓일 터.

하지만 제빌은 돌아온 그 말투가 반가워 일부러 잔소리하지 않았다.

“이래서야 일부러 그대에게 부탁할 필요는 없었던 건지도 모르겠어.”

“무슨 말씀이십니까?”

“국서를 들여서 당분간 결혼 압박을 피하려던 셈이었는데, 이제는 후궁 총애 싸움이 시작되지 않았나. 아직 후궁은 만들지도 않았는데. 정말로 지긋지긋한 자들이야.”

루비나드가 눈살을 찌푸리며 마지막 서류를 덮었다. 깃펜을 내려놓고 길게 기지개를 켜는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그녀의 말이 거슬려 저절로 눈썹이 꿈틀거렸다.

제빌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후회하십니까?”

“…으음.”

두 팔을 위로 들어 올린 채 생각에 잠겼던 루비나드가 제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이내 씩 웃었다.

“그렇진 않네. 간택식까지 했다면 더 일이 커졌었겠지. 심지어 국서가 내게 총애를 바랐다면 더 골치 아파졌을 테고.”

총애라.

이 제국에서 아마 가장 그녀의 총애를 원하고 있는 것은 분명 자신일 텐데. 제빌은 씁쓸함을 감추며 눈을 내리떴다.

“마음 같아서는 모두 거절하고 싶은데 말이야.”

“그랬다간 황제의 의무를 다하라며 귀족들이 또 시끄럽게 굴겠지요.”

“으음. 그리고 내 입으로 내뱉은 이야기도 있으니 언젠가는 구성하긴 해야 할 터. 당분간은 귀찮음을 참을 수밖에 없겠지.”

흘끗 드레스를 바라보는 루비나드의 마음이 심란했다. 아마 결혼식 때 입은 웨딩드레스 때문인지 그 전에 받았던 선물들보다 훨씬 화려해져 있었다.

평상시에 저런 건 입지도 않거늘. 게다가 그 드레스는 자신의 취향이 아니라 제빌이 고른 것이었는데. 하지만 그 속사정을 알 리가 없는 이들은 루비나드의 취향이라 오해한 모양이었다.

“옷방에 넣어 두도록 할까요?”

“…넣어는 둬야겠지. 저런 데 쓸 돈이 있으면 세금이나 한 푼 더 낼 것이지. 아니면 기부를 하든지.”

“드레스 한 벌에 드는 금액이 엄청나니까요.”

“그대의 의향이 아니었으면 웨딩드레스도 맞추지 않았을 거야. 한 번 입고 마는 드레스가 뭐 그리 비싼지.”

그렇겠지. 루비나드는 그런 성격이니까.

제빌은 피식 웃고는 그녀의 책상으로 다가갔다. 아직 열려 있는 잉크병을 닫고 살짝 열이 어긋난 종이 뭉치를 정돈해 품에 안았다. 이걸 각 부서에 전달하는 것 역시 부관인 제빌의 일이었다.

“…흠.”

물끄러미 서류 더미를 바라보던 루비나드의 시선이 팔을 타고 올라 제빌의 얼굴로 향했다. 햇빛 아래에서 반짝이는 남색의 속눈썹도, 한층 더 투명해 보이는 청회색의 눈동자도 꽤 아름다웠다.

빤히 바라보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멋쩍을 것 같아 시선을 내리다 그의 손가락에서 빛나고 있는 반지에 시선이 흘렀다.

무채색이나 푸른 계열을 기호하는 그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붉은색. 그렇게 생각하니 괜스레 특별해 보였다. 눈을 떼지 못하는 루비나드에게 제빌이 말을 걸었다.

“왜 그러십니까, 폐하?”

“음? 으음…. 아니, 별것 아니네.”

휙 고개를 돌리자 한쪽에 쌓여 있는 선물이 보였다. 그걸 보니 또 한숨이 흘렀다.

선물을 팔아 치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누굴 줄 수도 없으니 처치 곤란이었다. 루비나드의 안에서 젊은 귀족들에 대한 나쁜 인상만이 쌓여 갔다.

“그러고 보니 연극은 언제 보러 가는 거지?”

“폐하가 보러 가신 날의 배우를 피하고 저희 일정이 가장 적은 날을 고르면…. 사흘 후가 되겠군요.”

“배우가 다르면 표현도 달라질 테지. 기대되는군.”

정말로 연극이 즐거웠던 것인지 루비나드는 몇 번, 무대나 배우에 관해 이야기하곤 했다. 그러다가도 문득 입을 다물곤 했는데 왜 그러냐고 물으면,

-그대도 봐야 하는데 다 알면 즐거움이 줄어들 게 아닌가.

-어차피 영웅 키르기반의 이야기는 모두가 다 알지 않습니까.

-아니야. 연극 각본가가 기존의 이야기 흐름과는 조금 다르게 극을 썼더군. 알고 보면 분명 재미없을 걸세.

그렇게 말하며 제빌을 바라보는 루비나드의 얼굴엔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분명, 그 달라진 부분에 대해 제빌과 함께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겠지. 그 사랑스러운 얼굴에 제빌도 빨리 같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 때문에 일정을 엄청 바꿔야만 했다.

그렇게 해도 비울 수 있었던 가장 빠른 날이 사흘 후였다.

“안정되기 시작하면 일이 조금은 줄어들지 않을까 했는데 오히려 더 일이 많아진 느낌이군요.”

“처음에는 국가 지원이라는 걸 이해하지 못했던 이들이, 이제는 이게 유용한 자금줄이 될 수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겠지. 앞으로 사업 기획안이 매일 수십 개는 가뿐히 넘을 테고 다른 행정 서류나 회계 서류도 점점 늘어날 텐데 우리는 둘 뿐이니 말이야.”

“이제는 업무를 좀 더 분배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군요.”

“어차피 지금 내가 하는 건 최종 확인뿐이지 않나. 여기서 일을 더 줄일 순 없는 노릇이지. 하지만 확실히….”

루비나드의 시선이 제빌의 얼굴로 향했다. 최근의 제빌은 꽤 초췌해져 있었다. 워낙 미모가 출중한 탓에 묘한 분위기까지 더해져 느른해 보인다며 황궁 안 여성들에게는 호평이었지만, 루비나드의 눈에는 그저 피로해 보이기만 했다.

“그대는 일을 좀 줄이는 게 좋겠어.”

“저… 말입니까?”

“본디 정실이 해야 하는 내궁의 일을 모두 도맡아 하고 있는 데다 내 부관 일까지 하고 있지 않나. 게다가 쿠온가에도 계속 신경 쓰고 있는 것 같고.”

“괜찮습니다.”

“그러다가 그대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내가 곤란해. 내궁의 일 중 일부는 살레인과 클라렌에게 맡기도록 해. 국서가 없을 때 그들이 도맡아 하던 일이니.”

정말로 괜찮은데.

제빌은 반사적으로 제 턱을 쓸었다. 루비나드의 시선에서 안쓰러움 같은 걸 느꼈기 때문이었다.

대체 몰골이 어떻기에 저런 눈으로 보시는 거지. 아침에 거울을 봤을 때도 평소랑 별로 다르지 않았던 것 같은데…. 나름대로 루비나드 앞에서는 단장에 신경을 쓰고 있었던지라 더 충격적이었다.

“밤엔 제대로 쉬고 있는 건가? 또 무리하고 밤을 지새우는 건 아니겠지?”

“…….”

제빌은 대답 대신 곤란하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 행동이 대답이었다. 루비나드의 눈이 사나워졌다.

“밤에는 제대로 쉬어야지.”

“쉬어야지요. 조금 더 안정되면….”

“앞으로는 더 많은 걸 신경 써야 할 거야. 지금은 성도 근처만 안정되었지만, 차츰 제국 전체를 안정시켜야 할 테니. 그때 그대가 없으면 내가 가장 곤란해.”

제빌의 능력도 능력이지만,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가장 중요했다.

사람에 대한 불신이 더 심해진 루비나드에게 있어서 제빌은 이제 없어선 안 될 존재였다. 그가 사라지면 누구의 말도 쉬이 믿을 수 없게 될 테니까.

이제 제빌뿐이었다. 그녀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대로 쉬고 있으니까요.”

예전으로 돌아온 루비나드의 반응이 그를 싱숭생숭하게 만들었다. 무언가 중요한 것을 놓쳤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 탓에 밤에 제대로 잠이 오질 않았다.

그러니, 사실 일을 하기 위해 밤을 새우는 게 아니었다. 쉴 수 없으니 일을 하는 것뿐이었다.

게다가 일이 빨리 끝나면 루비나드와 보낼 시간이 늘어난다. 최근에는 종종 같이 티타임을 가지기도 했다. 그게 제빌에게 있어서는 가장 행복한 휴식이었다.

“…안 되겠어. 나는 그대를 신뢰하고 있지만, 휴식에 관해서는 믿지 못할 것 같아. 앞으로는 그대가 잠들 때까지 지켜보고 있어야겠어.”

제빌의 대답이 미덥지 못했는지 루비나드가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폐하가 같은 방에 계시면 전 더 쉴 수가 없는데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이내 삼켰다. 설령 잠을 자지 못한들 뭐가 대수일까. 루비나드의 곁에 조금이라도 더 오래 있을 수 있다면.

“저는 상관없습니다. 정말로 잘 쉬고 있으니까요.”

“같이 잠들었을 때 느낀 건데, 그대는 항상 나보다 일찍 일어나더군. 분명 내가 먼저 잠들었는데 말이야. 그렇게 자선 몸이 상해. 앞으로는 그대가 잠든 후에 나도 잘 테니 그렇게 알아 두도록.”

…이런. 제빌의 얼굴에 곤혹이 서렸다.

오랫동안 짝사랑해 온 사람과 한 침대를 사용하는데 쉬이 잠들 수 있는 남자가 어디 있을까. 그래서 제빌은 밤새 그녀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곤 했다.

평소에도 그에게는 속내를 잘 드러내긴 했지만, 침대 위의 그녀는 정말로 무방비했다. 그렇게 기척에 예민하면서도 제빌의 기척에 깨지 않는다는 게 너무 사랑스러웠다. 그 정도로 제빌을 믿고 있다는 것일 테니까.

그 은밀한 즐거움을 빼앗길 순 없는데.

“…노력해 보겠습니다.”

“으음. 잠도 노력으로 될진 모르겠지만…. 하여간 그대에겐 휴식이 필요해. 오늘 밤부턴 내 방으로 오도록 해.”

“폐하의 방으로요? 하지만….”

예법이 어쩌니 하면서 오지 말라고 했던 건 루비나드였다. 그게 생각났는지 루비나드 역시 아차, 싶은 얼굴을 했다.

그러나 이내 뻔뻔한 얼굴로 고개를 치켜든 채 입을 열었다.

“이번엔 내가 부른 거니까 괜찮아.”

제빌의 방은….

그의 향기로 가득 차 있어서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러니 차라리 조금이라도 익숙한 자신의 방이 나았다.

제빌 역시 그녀에게서 달콤한 향기를 느낀다는 걸 알 리 없는 루비나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여러모로.

어째서인지 아까보다 더 초췌해진 듯한 얼굴로 한숨을 쉬는 제빌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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