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49)
“어서 오십시오, 폐하.”
어떻게 안 것인지, 도착하기가 무섭게 제빌이 다가왔다. 의아하게 여기는 에브니겔과 달리 루비나드는 당연하다는 듯 그에게 답했다.
“나오지 않아도 되는데.”
“폐하께서 출타하셨다가 돌아오시는데 국서 된 자로서 어찌 마중 나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청회색의 눈동자가 그제야 발견했다는 듯 에브니겔에게로 향했다. 산전수전 다 겪었다 자부하는 에브니겔조차 등줄기가 서늘해질 정도의 냉기였다.
일부러 마중 나온 것인가. 견제하기 위해서.
에브니겔의 입가에 반사적으로 미소가 스몄다. 그에게 전혀 밀리지 않는다는 걸 보여 주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악토그라토리아의 제2 황자시여. 저는 로간 제국 황제의 정실이자 이 나라의 국서인 제빌 디 쿠온이라고 합니다.”
생글 웃는 얼굴 뒤에 여전한 냉기. 에브니겔의 본능이 경고했다.
이 남자는 위험한 남자라고.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국서 전하.”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에브니겔에게서는 옅은 적의가 흘러나왔다. 반사적인 것이겠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루비나드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지는 걸 확인한 제빌이 냉기를 거두고 환하게 웃었다.
“연극은 즐거우셨습니까, 폐하.”
“으음. 나쁘지 않았어. 그대도 봤나? 꽤 유명한 극단이라던데.”
“매일 폐하와 같이 집무실에 있었던 제가 어떻게 보았겠습니까. 나중에 이야기를 들려 주시면 그걸로 족합니다.”
“무슨. 이야기로는 채 전할 수 없는 것도 있을 텐데. 이번 달에는 계속 성도에 머무른다고 하니 직접 가서 보도록 하게. 하루 정도는 휴가를 줄 테니.”
“혼자 가서 뭐가 즐겁겠습니까. 차라리 집무실에서 폐하와 서류를 보고 있는 편이 더 즐거울 테니 괜찮습니다.”
“그럼 나와 함께 가도록 하지. 다시 봐도 즐거울 것 같아. 게다가 황자에게 들으니 날짜마다 배우가 바뀐다더군. 다른 배우가 연기하는 걸 봐도 재미있을 것 같아.”
“그럼 하루 빼 보도록 하지요.”
가만히 듣고 있으니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은 마치 에브니겔 따위는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행동하고 있었다. 심지어 국서 쪽은 의식적으로 그러는 게 눈에 보이는데, 루비나드 쪽은 정말로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여러 배우가 돌아가면서 연기를 한다고 가르쳐 준 건 다른 날 다시 데이트를 청하기 위해서였는데. 그걸 지금 다른 남자에게 보자고 청하다니. 그것도 조금 전까지 데이트하던 상대의 바로 앞에서.
황제가 남자에 익숙지 않다는 건 은연중에 느껴졌지만, 마음이 씁쓸했다.
“…흠흠.”
이대로는 자신을 깨끗이 잊은 채 두 사람만 가 버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 예감이 적중한 듯 루비나드가 흠칫, 하고 몸을 굳히더니 에브니겔 쪽을 돌아보았다. 그 눈동자에 비친 아차 하는 감정에 마음이 더 싱숭생숭해졌다.
“오늘은 황자 덕에 즐거웠소. 지금 머무는 거처까지 배웅해 주라고 이야기해 두도록 하지.”
“배웅은 괜찮습니다. 그보다 다음에 또 동석할 수 있을까요?”
“…….”
순간 루비나드의 머릿속에 여러 생각이 맴돌았다.
대체 언제까지 돌아가지 않을 셈일까. 딱 잘라 거절해 두는 편이 더 나을까? 하지만 우호의 증표까지 받았는데 냉정하게 내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차피 한순간의 놀이에 불과할 테니….
흥미가 식을 때까지 내버려 두면 알아서 물러나겠지.
“시간이 맞으면 또 함께하도록 하지.”
제빌이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찰나의 순간이었기에 금세 원래의 손 모양으로 돌아갔지만, 파르르 떨리는 손끝은 완벽하게 숨길 수 없었다.
“정말입니까?”
“짐은 한 입으로 두말하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아.”
루비나드가 단호하게 이야기하자 에브니겔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 표정이 낯설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에브니겔은 무례했다. 마치 일부러 만든 것 같은 웃는 얼굴에 비웃음까지도 스며 있었다. 그 표정만으로도 깔본다는 게 느껴질 정도로.
그런데 지금은 왜 저런 표정을 짓는 걸까. 루비나드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에브니겔이 왜 그러는지를 이해한 제빌은….
“이만 들어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폐하. 오늘이 결재 기한인 서류가 있는데 전달해 드리는 걸 깜빡했습니다.”
“그대치곤 드문 실수군. 알았네. 그럼, 황자. 조심히 돌아가게.”
루비나드는 오만한 미소를 남긴 채 돌아섰다. 제빌이 그 옆으로 따라붙었다.
“…생각한 것보다….”
결혼식에서 본 그는 그냥 평범한 남자로 보였다.
물론 아름다운 남자였고, 나름대로 당당하고 기품 있긴 했다. 하지만 그걸 넘어서서, 제 곁에 선 루비나드를 바라보는 시선이 그저 한 명의 남자에 불과했다.
감정에 휘둘리는 어리석은 한 명의 남자. 하지만 지금 본 그는 좀 달랐다.
미숙해서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적의 하나 보이지 않고 에브니겔을 도발하더니, 반응하자마자 곧바로 제 감정을 갈무리한다. 그런 게 가능한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저 정도로 자신의 감정을 감출 수 있는 자는 위험했다. 어쩌면 에브니겔이 루비나드를 손에 넣는 데 가장 큰 방해물이 될지도 몰랐다.
그녀 자신보다도.
“방해물은 미리미리 치워 버려야지.”
피식 웃은 에브니겔이 제 입술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어떤 방법으로 그를 치워 버릴지를 고민하면서.
* * *
“후.”
결국, 오후에 남아 있던 서류를 다 정리했다.
-이거, 오늘까지가 아닌데?
-그렇습니까? 이런…. 제가 잘못 본 모양입니다.
-그대치곤 드문 실수를 연달아서 하는군. 아니면 일부러 그런 건가? 황자를 내게서 떼 주려고.
드물게도 날카로운 말이었다. 엷게 웃기만 하는 제빌에게 루비나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연극은 재미있었지만, 그자의 적의는 꽤 불쾌했어. 마침 기분 전환도 필요했으니 오늘 하려 했던 서류나 정리하지.
기분 전환을 일로 하는 사람은 폐하뿐일 겁니다.
차오른 말을 삼킨 제빌은 순순히 그녀의 뜻에 따라 자리에 앉았다. 늦은 밤까지 일하고 돌아온 제빌을 기다리는 건 또 다른 보고서였다.
“고맙습니다, 카란.”
제빌이 엷게 웃어 보이자 카란이 마주 웃었다. 그 해맑은 웃음에도 제빌의 마음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자비로운 주인의 얼굴로 그를 향해 손짓했을 뿐이었다.
카란이 재빨리 물러나자마자 제빌은 텅 비어 있는 첫 장을 넘겼다.
“…예상대로인가.”
어리석은 자들이다. 설마 이 모든 게 제빌의 귀에 들어오지 않을 거라 생각한 걸까. 그렇다면 자신을 너무 얕본 셈이었다.
하긴. 이국의 황자조차 제빌을 얕보는데, 그동안 자신을 쓰레기 취급했던 귀족들이야 말할 것도 없겠지. 제빌은 씁쓸하게 웃으며 보고서를 읽어 내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폐하는, 분명 또 상처받으실 것이다. ‘그’가 그녀를 어떻게 배신할 건지 알게 된다면. 하지만 동시에 ‘그’까지 사라진다면, 이제 루비나드가 믿는 이는 이 세상에 단둘밖에 남지 않게 된다.
게다가 그 ‘슐라민’까지 엮였다. 이대로면 틀림없이 방해물을 반 이상 제거해 낼 수 있으리라. 그렇게만 된다면 다른 방해물들의 기도 꺾일 터.
그러나 이걸로는 모자라다.
“폐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이상 아예 뿌리를 뽑아야 하겠지.”
어디를 더 엮어 줄까.
이 제국에 제빌의 사람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들은 제빌을 위해서, 혹은 그들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불 속이라도 기쁘게 뛰어들 수 있는 이들이었다. 그중 목적을 위해서 움직이는 이들은, 모두 귀족들 자신이 만들어 낸 적이었다.
어리석은 자들이다.
적을 만들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 적을 남겨 둔 것이 문제다. 심지어 그 적이 자신에게 복수할 수 있도록 잊어 주기까지 하다니.
“크네르소 후작가, 달루앙 백작가, 셰트리칼론 백작가.”
대놓고 이야기하진 않지만, 루비나드의 뒷말을 하고 다니는 어리석은 자들. 이유는 대부분 그들의 이익을 방해한다는 것이었다. 친밀한 자들만 모인 자리에서 한 이야기가 설마 제빌에게까지 흘러들 줄은 몰랐을 테지.
그리고.
“샤고르 백작가, 맥시 후작가, 다휜 후작가, 리트린 백작가, 밀키아노 백작가.”
루비나드를 상처 입혔던 자들이자 루비나드의 놀이 친구들이었다.
다섯 명의 명문가 영식, 영애들은 더 나은 줄을 잡기 위해 두 황자에게로 갔다. 앞에서는 루비나드를 찬양하는 척하고 뒤로는 황자들에게 줄을 대려 손을 쓴 것이다. 그 모든 것을 안 루비나드는 그저 쓰게 웃을 뿐이었다.
-그들에게 내가 필요치 않다면, 굳이 내 곁에 있을 필요는 없겠지.
-하지만 저하…. 그들은 폐하께서 임명하신, 저하의 놀이 친구입니다. 그런 그들이 감히….
-원래 다 그런 법이야, 제빌.
그렇게 중얼거리며 루비나드는 슬픈 듯 웃었다.
-모두가 내 앞에서는 진심을 보이지 않아. 앞에서는 가식을 떨면서 뒤에서는 가증스럽게 굴어. 이제는 익숙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제빌도 잘 알고 있었다. 그 무렵의 제빌은 루비나드뿐 아니라 황궁 전체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으니까.
귀족들이 루비나드를 어떻게 대하는지도, 뒤에서 어떻게 이야기하는지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 가슴이 아팠다.
-위치가 달라지거나 시간이 지나 세상 물정을 알게 되면…. 아니, 내가 아무런 힘이 없다는 걸 알게 되면 처음엔 진심으로 대해 주던 이들도 곧 변해.
그렇게 말하며 제빌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공허했다. 일말의 기대감도 없는 눈동자였다.
그래서 제빌은 웃었다.
-저는 저하의 곁을 떠나지 않을 겁니다.
진심이었다. 하지만 루비나드는 믿지 않는다는 듯 여전히 텅 빈 눈으로 웃었다. 당당하던 평소의 그녀에게서는 상상하는 것조차 어려운 얼굴이었다.
-그래.
-저하께서는 모르시겠지만….
제빌은 제 가슴에 손을 얹었다. 두근두근 뛰는 심장 고동이 느껴졌다. 어쩌면 철이 들고 난 후 처음으로 제 진심을 내뱉는 걸지도 몰랐다.
-저하께서는 저를 구해 주셨습니다.
어둡고 음습한 늪.
거기에 내리쬐는 한 줄기 햇빛.
그게 당신이었다. 그 한 줄기 햇빛을 쥐고 나는 겨우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저하께서는 제 은인이십니다. 제 일생의. 그런 제가 어찌 저하를 배신할 수 있겠습니까.
뚝, 하고 무언가가 얼굴을 타고 흘렀다. 얼굴 위로 길이 생긴 기분이었다. 그 길 위를 부드러운 손길이 따라 흘렀다.
텅 비어 있던 보라색 눈동자에 엷게나마 감정이 깃들었다.
-믿을 테니 그치도록 해. 그대는 눈이 투명하고 예뻐서 눈이 흘러내리는 것 같으니 말이야.
그 말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것처럼 눈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결국, 손으로 닦아 내기엔 역부족이었던 루비나드가 손수건을 꺼냈다. 제빌의 눈동자를 꼭 닮은 청회색의 손수건이었다.
그 눈물을 꼼꼼히 닦아 내던 루비나드가 엷게 웃으며 말했다.
-마치 그대의 눈동자가 손수건에 물든 것 같은데. 이건 나보다 그대가 가지는 게 더 어울리겠어. 그럼, 난 수업을 갔다 오도록 하지.
그녀가 있으면 더 울 것 같아서였을까. 아니면 그녀 앞에서 우는 모습이 부끄러울 거라고 생각해서일까.
어느 쪽인지 이제는 알 방법이 없었다. 루비나드는, 그날의 일을 이미 잊었으니까. 제빌은 제 목에 걸린 리본을 꽉 쥐며 눈을 감았다.
“당신께서 잊으셔도 저는 하나도 잊지 않을 겁니다.”
당신께서 한 말 하나하나. 당신의 행동 하나하나. 당신의 표정 하나하나.
당신의 감정 하나하나.
그 모든 것을 기억하고 담아 둘 겁니다. 그리고.
“당신을 아프게 한 그 모든 것을 치워 드리겠습니다. 당신의 앞에 다신 설 수 없도록.”
당신이 준 모든 것에 걸고.
그렇게 다짐하는 청회색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