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48)
“후….”
에브니겔은 깊게 심호흡을 했다. 하지만 상기된 얼굴을 식히기엔 많이 부족했던 듯, 여전히 얼굴이 발갰다.
무슨 사춘기 청소년도 아니고. 겨우 데이트 정도로 이렇게 들뜬 걸 보면 모두가 비웃을지도 모르지. 제발 정신 좀 차려, 에브니겔.
그렇게 스스로를 비웃으면서도 좀체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그럼 저와… 데이트 한 번 해 주시겠습니까?
-…데이트?
보라색 눈동자가 의심과 혼란으로 물들던 그 순간이, 황제의 얼굴에서 사람의 얼굴이 될 때의 그 순간이 얼마나 아찔했는지 루비나드는 알고 있을까. 설령 그것이 그를 향한 호의가 아니더라도 충분했다. 에브니겔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웃었었다.
-네. 최근 로간 제국의 성도에 유명한 극단이 방문했다고 합니다. 저도 좋아하는 극단인데…. 혹시 틸 로반 극단이라고 아십니까?
-틸 로반…. 이야기는 들어 본 적 있네만.
이야기라니. 본 적 없는 건가?
록한 왕국이 가끔 사절단을 보내 펼치는 공연에도 참여했었다고 들었는데. 예술 쪽에 관심이 있던 게 아닌 건가. 그렇다면 굳이 극단주에게 연락해 로간 제국까지 오라고 할 필요는 없었던 게….
아니, 아니지. 흥미가 없다면 아예 이야기도 들어 본 적 없다며 딱 잘랐을 터였다. 에브니겔은 보라색 눈동자에 떠오른 희미한 호기심에 기대를 걸고 입을 열었다.
-어제부터 시작해서 한 달 정도 머물며 공연할 것이라 하더군요. 혹시 영웅 키르기반의 이야기는 좋아하십니까? 창세의 영웅이라는.
흥미가 없으면 다른 걸로 재빨리 제안을 바꿀 생각이었다.
루비나드가 자신에게 호의를 품지 않았다는 것 정도야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봐도 첫 대면과 그다음에 이어졌던 만남들 모두 최악이었으니까. 그러니 최소한 흥미라도 끌어야 긍정해 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말이 길어지자 루비나드의 인내심이 먼저 끊어졌다.
-사설이 길군, 황자. 즉 그 연극을 보러 가자는 것인가?
이런.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당황한 에브니겔은, 제 감정을 감춘 채 생글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내키지 않으시면 다른 걸 해도 좋습니다. 폐하와 함께할 수 있다면 뭐든.
-짐과 연극을 봐도 별로 즐겁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데…. 그런 건 아예 모르니.
흘긋 손안의 목조 상자를 본 루비나드가 잠시 망설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황자가 그걸 바란다면. 내일 오전이라면 시간을 낼 수 있을 것 같소만, 황자는 괜찮으시오?
-물론입니다. 오전에는 10시경에 공연한다고 하니 9시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그럼 내일 만나도록 하지.
그대로 휙 뒤돌아 가려던 루비나드가 갑자기 멈췄다. 손에 든 상자를 다시 보더니 잠시 생각하다 다시 뒤를 돌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황자와 공연을 같이 보는 게 적절한 답례가 되리라 생각할 수 없네. 내일 점심을 같이하는 건 어떻소? 황자가 원하는 것을 대접하지.
바란 적도 없는 행운이 굴러들어 왔다. 아무래도 이 아름다운 황제 폐하는 자신과의 데이트가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를 모르는 모양이었다. 에브니겔은 씩 웃고는 루비나드에게 정중하게 예를 갖췄다.
-그럼 제가 성도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식당으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으음. 그럼 내일 보도록 하지.
그제야 만족한 듯 루비나드는 미련 없이 뒤돌아 가 버렸다. 득의양양한 그 표정이 어찌나 귀엽던지. 지금 떠올려도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스밀 정도였다.
어제 일을 생각하던 에브니겔의 얼굴이 갑자기 차갑게 굳었다.
왜일까. 그녀의 그… 무기물이었던 것이 생물로 변하는 순간처럼 보였던 그 미소를 본 순간부터 뭔가가 달라졌다. 원하는 여자를 놀이 감각으로 손에 넣은 적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한 번도 이런 기분이 든 적은 없었다.
겨우 데이트 한 번일 뿐인데. 겨우 식사 한 번일 뿐인데.
왜 자신은 이토록이나….
“벌써 나와 있었나. 기다리게 했군.”
그 짧은 상념은 맑은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깨어졌다.
에브니겔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스몄다. 조금 전까지 제 머리를 감싸던 자책은 어디 갔는지 사라지고 눈앞의 여성으로만 가득 찼다. 생애 처음, 스릴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제가 일찍 나왔을 뿐입니다.”
고개를 들자 보이는 것은, 평소와 별다를 것 없는 차림새의 루비나드였다. 오히려 지나치게 꾸민 에브니겔을 보고 조금 놀란 건지 언제나 나른하던 보라색 눈동자가 동그랗게 변해 있었다.
미쳤나. 저런 것까지 다 귀엽게 보이는군. 데이트에 평상복을 입고 온 것에 실망하진 못할망정.
씁쓸하게 자신을 비웃은 에브니겔이 루비나드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늘도 폐하께서는 아름다우시군요.”
“그런 입에 발린 말은 없어도 되네. 짐은 그런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아.”
“아, 이런. 폐하의 아름다움을 찬양할 수 없다는 건 꽤 가슴 아픈 일이지만…. 불편하시다면 그만하겠습니다.”
티 나게 칭찬하는 걸 불편해하는 여성들은 생각보다 꽤 있었다. 칭찬이 싫다면 다른 걸로 하면 그만. 에브니겔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생글 웃어 보였다.
“제게 폐하를 에스코트할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그런 건 됐다고 하지 않았나. 데이트라고 이야기한 이상, 공식적인 행사도 아닌데 굳이 예의를 차릴 필요 없소. 개인적인 일이니 그런 귀찮은 건 다 건너뛰도록 하지.”
예의 차릴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치곤 말투가 좀 딱딱하지만…. 그래도 데이트라는 건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듯하여 다행이었다. 에브니겔은 작은 성과에 기뻐하며 손을 더 내밀었다.
“데이트니 제가 레이디인 폐하를 에스코트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루비나드는 진심으로 싫다는 얼굴이었다. 에브니겔의 뺨에 한 줄기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칭찬은 부담스러워하더라도 예법을 부담스러워하는 이들은 거의 없었는데. 심지어 에브니겔의 미소를 가까운 곳에서 보고도 한 점 흔들림도 없는 것이 꽤 아팠다.
직위를 보고 다가오던 이들과 달리 루비나드는 제국의 황제였다. 오히려 자신이 그녀의 직위를 보고 다가간다고 오해해도 할 말이 없을 처지 아닌가.
그러면 남는 건 얼굴밖에 없는데, 그 얼굴조차 통하지 않는다니.
“짐을 레이디 취급할 필요 없다고 했을 텐데. 짐은 이 로간 제국의 황제네. 남자건 여자건 그런 건 상관없단 말이네.”
오히려 화를 산 듯했다. 에브니겔은 잠시 생각하다 내밀었던 손을 거두었다. 대신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실례했습니다, 폐하. 데이트라는 말에 제가 너무 들떠 실례를 저지른 듯합니다. 하지만, 이대로 따로 떨어져 마차에 오른다면 데이트는커녕 공식 행사라는 느낌이 들 것 같습니다. 그러니 부디 폐하를 에스코트할 영광을 제게.”
답례로 데이트를 제시한 건 에브니겔이었다. 그러니 루비나드는 에브니겔이 만족할 수 있도록 응해 줄 의무가 있다. 살짝 위로 치켜뜬 붉은 눈동자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루비나드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뿐이네.”
“물론입니다.”
이번 데이트가 잘된다면 이번뿐, 으로 끝나진 않겠지만.
제발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에브니겔은 생각보다 훨씬 작은 손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 * *
“이게 극장인가.”
“처음 와 보십니까?”
“별로 흥미가 없었으니까. 생각한 것보다 훨씬 규모가 크군.”
“3층까지 있고, 3층에는 귀빈석이 있습니다. 폐하의 자리는 가장 높은 곳으로 마련해 두었습니다.”
가장 높은 곳? 루비나드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공연에 대해서는 잘 모르긴 하지만 무대가 3층에 있을 것 같진 않았다. 그렇다면 1층과 2층에 있는 이들에겐 소리밖에 안 들릴 테니까. 아니, 소리도 제대로 안 들릴지 모른다.
그런데 왜 3층에 귀빈석이 있다는 걸까.
“3층이 더 좋은 이유가 있나?”
“오페라글라스를 사용하면 무대 전체가 한눈에 보이니까 감상하기 더 좋습니다.”
“1층에서 보면 굳이 글라스 같은 걸 쓰지 않아도 보이잖나.”
“그건….”
에브니겔의 말문이 막혔다.
확실히 공연을 즐긴다는 관점에서 보면 3층은 최악의 선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1층에서 보면 평민들과 뒤섞여서 보게 되지 않습니까.”
“그게 뭔가 문제라도?”
“…네?”
황족으로서의 자각이 없는 게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 누구보다도 황족으로서 몸가짐을 바르게 하는 것이 루비나드였다.
그녀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러 다니는 동안 공공연히 그녀를 욕하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가끔 그녀에 대한 불평을 내뱉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입바른 소리를 하거나 지나치게 깐깐하게 구는 것에 대한 불평이었다. 오히려 불평하는 이가 스스로의 얼굴에 똥칠하는 것 같은 이야기들이었다.
그러니 모를 리가 없을 텐데. 그녀가 평민들 사이에 섞여 있다는 게 어떤 건지.
“폐하의 안전에 문제가 생깁니다. 저도 검은 꽤 쓰는 편이긴 하지만, 호위 기사도 하나 없이 나오지 않으셨습니까. 만에 하나의 사태가 생기면….”
“황자는 잘 모르는 모양이군.”
루비나드의 오만한 얼굴이 돌아왔다. 하지만, 그건 처음 봤을 때와는 조금 다른 얼굴이었다. 인형처럼 만들어진 예쁜 얼굴이 아니라 정말로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얼굴이었다.
“로간 제국의 황제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제 몸은 스스로 지킬 수 있어야 하네.”
허리춤에 매단 검집을 보여 주며 나른하게 웃어 보인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이내 짓궂은 비웃음이 스몄다.
“아니면 황자의 안전이 염려돼서 그런가? 걱정하지 말게. 종자를 준 보답으로 황자의 안전도 지켜 주도록 하지.”
루비나드가 성큼 먼저 발을 내디뎠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에브니겔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가지고 싶다. 이 정도로 가지고 싶었던 여자는 지금껏 한 번도 없었다. 정말로, 그 무엇보다도 지금 저 여자를 원했다. 가질 수만 있다면 분명 자신은….
“황자? 10시 시작 공연이라고 하지 않았나.”
에브니겔은 붉은 눈동자 속에서 번들거리는 욕망을 억누르고 웃어 보였다.
왜일까. 계단 위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루비나드는, 그의 웃음에서 제빌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