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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 (43)화 (44/115)

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44)

“덕분에 살았어. 난봉꾼이라는 이야기는 자주 들었지만, 생각이 없는 치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루비나드의 눈썹이 살풋 일그러졌다. 제빌은 그 모습을 차갑게 식어 버린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이렇게 된 건 자신의 잘못이었다. 루비나드가 남자의 호의에 지나치게 둔감해진 것도, 설마 자신에게 호의를 품을 거라 생각하지 못하게 된 것도. 제빌의 마음에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분명 루비나드를 위해서 해 왔던 일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탓에 그녀는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도.

과연, 자신은 잘 하고 있는 걸까?

“제빌 경?”

“…네.”

“표정이 무서운데.”

루비나드가 피식 웃으며 제빌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얀 손가락이 딱딱하게 굳은 미간 사이에 와 닿더니 동글동글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손끝이 간지러워서 얼굴이 뜨거워졌다.

“뭐 하시는 겁니까.”

“표정 풀라는 뜻이야. 그대 덕분에 상황을 모면했으면 된 것 아닌가. 그래도 앞으론 조심해야겠어, 저 황자는.”

루비나드의 조심은 물론, 황자의 호의를 사지 않게 조심하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녀는 에브니겔 황자가 가벼운 마음으로 자신을 유혹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제빌은 그 눈동자를 보았다.

이미 피로와 짜증으로 반쯤 무너져 있던 얼굴이 자신을 보며 완전히 무너지는 순간. 그 환한 미소를 보고 제빌은 저도 모르게 황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무언가 경이로운 것을 보았다는 것처럼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그는….

“왜 저만 없어지면 다른 남자들의 추파를 받으시는 것입니까.”

루비나드의 잘못이 아니라는 건 안다. 아니, 루비나드의 잘못이다.

왜 이토록 아름다워서. 왜 이토록 사랑스러워서. 왜 이토록 환하게 빛나서.

자신만이 볼 수 있는 곳에 꼭꼭 숨겨 둘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누구도 보지 못한 어둠 속에서 자신만이 그녀의 빛을 바라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태양이니까.

태양은 맑은 하늘 아래 살아가야 하는 것이니까.

그래서 자신은….

“그건 내 잘못이 아니야. 애초에 그 황자는 모든 여자에게 다 추파를 던지지 않나. 결혼식 피로연장에서도, 이 봄맞이 연회에서도 그의 추파를 받지 못한 여자가 없을걸.”

그랬다. 그가 그런 남자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머리가 좋은 남자라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결혼 축하 사절로 찾아와서 신부를 유혹하는 어리석은 일을 할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것도 동등한 입장의 제국 황제를.

그가 그런 마음이 든 건 분명.

“…그럼 제 잘못이군요.”

제빌이 걸음을 멈췄다.

그래, 맞다. 자신이 잘못한 것이었다. 가장 빛날 수 있는 곳에 루비나드를 올려 두었으니, 이상한 벌레가 꼬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 자신이 지키지 않으면 안 되겠지.

“아니, 난 그런 뜻이 아니었어.”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루비나드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훅, 얼굴을 들이밀며 빙긋 웃는 제빌 탓에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해야 할까. 원래도 예쁜 얼굴이지만, 오늘은 그날 밤 같은 묘한 색기가 서려 있었다. 무언가 불꽃 같은 것이 강물처럼 일렁일렁하는 것 같은… 기묘한 청회색의 눈동자와 살짝 벌어진 붉은 입술이.

느른한 미소가.

무서울 정도로 요염했다.

“제, 제빌?”

“제가 폐하의 곁에서 떨어진 탓에 문제가 생겼다면, 해결하는 방법은 간단하지요.”

제빌이 손을 뻗어 루비나드의 뺨을 감쌌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당황한 그녀가 손을 뿌리칠 뻔했으나, 청회색 눈동자가 막아섰다.

그녀가 그를 뿌리치면….

-폐하께 버림받으면 완전히 망가질 테니까요.

왜 하필 지금 이 순간, 그 말이 떠올랐을까.

“지금부터 한시도 폐하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겠습니다.”

아니, 그건 좀 무리가 있지 않을까.

생각과는 달리 말은 나오지 않았다. 천천히, 제 손에 가득 담은 루비나드의 작은 얼굴을 쓰는 손가락이 뜨거웠다.

결혼 서약을 했으니 이제 루비나드는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다. 부부의 연은, 그가 원하지 않는 한 끊을 수 없도록 장치를 해 두었으니까. 그리고 제빌이 그걸 바랄 일은 절대 오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여전히 루비나드는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루비나드의 것이 아니었다.

제빌은 약했다. 감정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던 어리석은 꼬마인 시절을 생각하면, 국서라는 위치는 그가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을 정도로 높은 자리였다. 하지만 그건 문제가 아니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그가 가진 것들을 숨겨 왔다. 루비나드를 위해 그림자가 되겠다고 마음먹었으므로. 자신이 저지르는 모든 일을 그녀에게조차 숨기기 위해.

태양 뒤에 지는 그림자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곁에 서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정말로 루비나드를 원한다면, 그저 곁에 서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만약 제빌이 좋은 집안의 공작이거나 동맹국의 왕족이었더라도 에브니겔이 손을 댈 수 있었을까? 그럴 마음이나마 먹을 수 있었을까? 감히 신랑을 눈앞에 두고 신부에게 그런 눈빛을 보낼 수 있었을까?

루비나드에 대면 하찮은 벌레 같은 제깟 놈이?

“제빌 경.”

겨우 평정을 찾은 루비나드가 손을 들어 올렸다. 양손을 제빌의 손 아래에 두고 살며시 밀자, 순순히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제 손 안에 들어온 루비나드의 손은 놓아 주지 않았다.

그 두 손을 꼭 잡은 채 제빌은 루비나드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보랏빛 눈동자가 흔들린다. 겁에 질린 듯, 혼란에 빠진 듯. 그러면서도 자신을 일깨워 이 상황을 타파하려는 의지가 가득한 눈동자가.

거의 서로의 숨결이 닿을 거리까지 가까워진 제빌이 멈췄다.

이대로 살짝 열려 고른 숨을 내뱉는 입술을 앗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배 속이 뜨거워졌다. 그 뜨거운 숨을 나지막한 한숨으로 내뱉은 제빌이 그녀의 귓가로 고개를 틀었다.

“폐하, 저는 폐하를 지킬 수 있는 남자가 되겠습니다.”

언젠가의 맹세.

그녀의 곁에 설 수 있는 남자가 되겠다는 각오만으론 부족하다. 그림자가 되어 곁에 서서, 루비나드를 지킬 수 있는 남자가 되어야겠다.

…무슨 일이 있어도.

“누구도 감히 폐하를 귀찮게 할 수 없도록.”

루비나드의 손을 꽉 잡은 손이 조금 풀어졌다. 그러면서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를 부드럽게 쓸던 제빌의 손이 멈칫했다. 손끝에 걸리는 결혼반지의 감촉.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다는 증표.

제빌의 삶의 전부.

그 반지 위를 살며시 덧그린 손가락이 아쉽다는 듯 멀어졌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루비나드는, 처음으로 제 앞에서 욕망의 편린을 내비친 제빌의 눈동자를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 *

폐하가 일에 미쳤다.

국서를 선정한 이유가 일 때문이라더니, 정말로 일만 하신다.

그 많은 서류를 다 보고도 시간이 남는다며 새로운 사업 계획까지 구상하신다더라.

밤에도 집무실 불이 꺼지질 않는다던데.

최근 황궁의 사용인들 사이에서 도는 소문 아닌 소문이었다. 딱히 비밀은 아니었지만, 모두가 쉬쉬하며 이야기했는데 그 이유는.

“폐하.”

“음, 거기 놔두게.”

“그게 아니라 조금 쉬시고 다시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벌써 7시간째 아무것도 드시지도 않고 사업 계획안만 보고 계시지 않습니까.”

“조금만 더.”

“폐하.”

제빌의 부름에도 루비나드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서류에 더 깊게 얼굴을 묻었다. 그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귓가에 속삭이던 목소리가 떠올라 몸이 파르르 떨렸다.

-폐하, 저는 폐하를 지킬 수 있는 남자가 되겠습니다.

처음이었다. 제빌이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은.

-저는 폐하를 보좌하는 부관입니다. 그러니 폐하가 생각하시는 길을 이뤄 내는 것이 제 일입니다.

제빌은 언제나 그렇게 말했었다.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저 루비나드가 가려는 길에 쓰레기가 떨어져 있으면 정리하는, 청소부 같은 존재라고.

그런 그가 자신을 드러내고 절절한 감정을 드러냈다.

이유는… 아주 짐작이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피곤에 절어서 힘들어하던 루비나드에게 귀찮은 벌레가 다가오는 걸, 채 지키지 못한 자신에의 회한이 아닐까. 제빌은 그런 남자이니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엔 뭔가가 께름칙했다.

그 눈동자가… 자신을 얽매던 그 눈동자가 잊히질 않았다. 자신의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던 그 눈동자가 머금고 있던 게 무엇인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걸 떠올리면 가슴이 울렁거렸다.

“…아앗!”

아, 또.

넋을 놓으면 어느 틈엔가 그 눈동자가 되살아난다. 그리고 루비나드의 머릿속을 얽맨다. 다른 생각을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루비나드가 찾아낸 돌파구는 바로 일이었다.

서류를 보고 있으면 점차 그 눈빛이 흐려진다. 제빌의 얼굴도, 다른 머리 아픈 일들도 일단은 가라앉는다. 그래서 이미 각 부에서 한 번 퇴짜를 맞은 사업 지원 요청서까지 죄다 꺼내 읽는 중이었다.

외마디 비명을 내뱉은 루비나드가 다시 서류에 빨려 들어가고 싶기라도 한 것처럼 종이에 얼굴을 묻었다.

“…폐하!”

결국, 제빌의 입에서 큰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래도 루비나드가 자신을 바라보지 않자 이번엔 두 손으로 책상 위를 강하게 내리쳤다.

그제야 루비나드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들어 제빌을 보았다.

“왜 그러나.”

“어제 잠은 제대로 주무셨습니까?”

“…….”

“식사는 언제 마지막으로 하셨습니까? 수분은 제대로 취하고 계십니까?”

“난 어린애가 아니야, 제빌 경.”

루비나드의 눈동자가 유리같이 투명했다. 언제나 마음을, 감정을 그대로 전달해 오던 보라색 눈동자가.

제빌은 입안의 살을 짓씹었다.

“어린애가 아닌데 왜 애처럼 구십니까.”

“…경, 선을 넘지 말게.”

“저는 폐하의 부관임과 동시에 폐하의 국서이기도 합니다. 폐하께서 스스로의 건강을 갉아 내시는 걸 손가락 물고 지켜볼 순 없단 말입니다.”

그날부터였다.

처음으로 가감 없이, 제가 느끼고 있는 감정을 모두 드러냈던 그날.

루비나드의 뺨을 감싸고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내뱉었던 그날.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감정에 맡겨서 일을 그르치는 건 멍청이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잊을 정도로 강렬한 충동에 휩싸였다.

후회하진 않았다. 언젠가 겪어야 했던 일이니까. 하지만 제대로 준비조차 하지 않고 내뱉은 건 잘못이었다. 최소한 그녀가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나갔어야 했는데.

“제 말이 그토록 부담스러우셨습니까.”

“뭐?”

“저는… 저는 그저 폐하를 귀찮게 하는 존재들로부터 폐하를 지키겠다고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저는 폐하의 부관이자 오랜 친우이기도 하니까요.”

그렇게 내뱉는 청회색 눈동자는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담담하고, 차갑다.

마치 유리구슬처럼.

루비나드는 그의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했다.

…저 눈동자보다는 차라리 그날 밤의 눈동자가 더….

“결코, 남자로서 말씀드린 게 아니니 부디 마음의 짐을 덜어 내 주세요.”

제빌은, 책상 위를 짚고 있던 손을 들어 제 가슴에 올려 예를 갖추었다. 신하로서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몸짓이었다.

“제가 폐하를 여자로 볼 리가… 없잖습니까.”

욱신.

루비나드의 무언가가 상처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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