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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 (42)화 (43/115)

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43)

루비나드는 울컥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삼켰다.

이 황자는 왜 늘 좋지 않은 상황에 나타나는 걸까. 그제는 커드닐을 만나러 나가는 걸 방해하더니, 이번엔 조금 쉬려고 했더니 방해한다. 그렇다고 짜증을 드러내기엔 녹록지 않은 상대였다.

“좋은 오후입니다, 폐하. 오늘은 하늘이 맑아 석양도 깨끗하게 보일 것 같습니다.”

생긋 미소 짓는 그의 얼굴은 확실히 잘생겼다. 난봉꾼이라는 이명에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는.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아무리 멋진 척을 해도 그에게는 전혀 설레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의도로 루비나드에게 접근하는 걸까. 설마 또 후궁에 넣어 달라는 소리는 아니겠지. 하긴 그랬다간 이 황자는 악토그라토리아의 황제에게 맞아 죽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영토 확장 대신 내정에 집중하겠다고 선언한 데거베일조차 악토그라토리아는 반드시 정복해야 할 대상이라고 루비나드에게 말했을 정도였다. 아직도 영토 확장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악토그라토리아의 황제가 제 아들이 맞수 로간의 인질이 되는 걸 보고만은 있지 않을 터였다.

“마지막 날까지 참석해 주다니, 감사를 표하오.”

눈치 빠른 에브니겔은 지난번의 만남보다도 훨씬 퉁명스러워진 그녀의 말투만으로도, 루비나드가 기분이 썩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챘다. 이유는 뭘까. 조금 전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지나가던 국서 전하 때문일까.

그랬으면 좋겠는데. 비집고 들어갈 틈이 있도록.

“폐하께서는 연회를 그리 많이 열지 않으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공식적인 자리에서 제가 폐하와 만날 수 있는 건….”

에브니겔의 손이 루비나드의 머리카락으로 향했다. 붉은 물결 위에 올라탄 꽃잎을 살짝 털어 내자 하늘하늘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동시에 루비나드 역시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세우고 경계하는 눈길로 그를 보았다.

고양이 같은 사람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처음 만났을 때도 다소 농이 지나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경계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말투는 정중하나 선이 느껴졌다. 그 선을 비집어 열고 싶다는 난봉꾼 특유의 오기가 발동했다.

사실 아버지가 로간 제국에 다녀오라고 할 때까지만 해도 기분이 더러웠다. 본국에 있는 수많은 미녀를 남겨 두고 굳이 로간 제국까지 가야만 할까. 심지어 아버지는 트집 잡힐 거리를 주지 말라며 사고 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기까지 했다.

물론 에브니겔은 난봉꾼이지만 바보는 아니었다. 그러니 사고 칠 생각은 없었는데.

-…호오.

가만히 눈을 내리깐 제국의 황제는 눈이 부실 정도로 예뻤다. 악토그라토리아의 미녀들과는 또 다른 맛이 있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선을 넘었었다.

하지만 뭐랄까. 국서의 능력을 높이 사 이루어진 결연이라고 들었는데, 생각보다도 사이가 좋았다. 공적인 자리에서 서로에게 음식을 먹여 줄 정도로. 그걸 보니 또 흥미가 동했다.

자신에게는 그토록 차갑더니,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제 남편에게는 애정 행각까지 하다니. 그녀가 제게 아양을 떠는 게 보고 싶어졌다.

“이 연회가 마지막일지도 모르잖습니까.”

원래는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다시 악토그라토리아에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녀의 존재가 그의 변덕을 자극했다. 연회의 초대장을 반강제로 강탈해 찾아왔다. 그런 그에게 루비나드는.

-만나서 반가웠소, 황자. 즐겁게 보내다 가시게.

둔해서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것일까.

꽤 직설적으로 유혹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자신의 말은 제대로 듣지도 않고 빨리 자리를 뜨려고만 했다. 흥미로웠다. 에브니겔이 싱긋 웃어 보이는 것만으로도 그에게 모든 걸 허락하는 여인들과는 달라서.

로간 제국의 황제는 어딘지 정복욕을 자극하는 여자였다.

어차피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터였다. 여자란 어차피 조금만 웃어 주고 다정하게 대해 주며 그대밖에 없다고 사랑을 속삭여 주면 넘어오는 존재가 아니던가.

…그런 존재였을 터인데.

“무슨. 앞으로도 양국의 발전과 평화, 그리고 친애의 정을 위해 자주 교류하기를 바라고 있소. 황자와도 좋은 관계가 되길 바라오.”

웃는 얼굴은 어딘지 건성이었다. 그래도 지난번보다는 훨씬 나았다.

지난번까지의 그녀에게서는 오만함 외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최소한 지금은 짜증인지 화인지 명확하지 않은 감정이라도 보였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에브니겔이 씁쓸하게 웃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폐하를 다과회에 초대하고 싶은데…. 물론 폐하의 시간이 허락한다면, 이지만요.”

“…….”

평소라면 딱 잘라 거절했을 것이다. 이런 웃기지도 않은 수작질은. 그러나 그의 배경 때문에 쉬이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악토그라토리아 제국은 로간 제국은 호적수 관계였다.

넓은 대륙의 땅덩어리 중 1/3 정도를 두 나라가 차지하고 있었으니. 만약 두 나라가 붙어 있었다면 둘 중 하나는 진즉에 망했을지도 모른다. 혹은 둘 다 망했거나.

그 정도로 두 나라의 힘은 우열을 가리기가 힘들었다. 둘 다 몹시도 호전적인 나라이기도 했고.

하지만 지금의 로간 제국은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아직도 더 많은 영토, 더 많은 속국을 원하는 악토그라토리아와는 정반대의 행보를 밟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악토그라토리아를 대비하지 않기에는 점차 국경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선황제인 데거베일은 마지막까지도 호적수와 손을 잡는 것만은 망설였다. 그래서 루비나드는 황좌에 오르자마자 악토그라토리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로간의 새로운 황제는 꽤 재미있구만그래.

루비나드와 제빌이 며칠 밤을 새워서 겨우 완성한 동맹 제의 서신에, 악토그라토리아의 황제는 그리 말했다고 했다. 그리고 껄껄 웃음을 터뜨리며 서명을 했다고.

그가 왜 서명을 해 주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언제든 그 동맹을 파기하고 거병할 수 있는 힘이 있는 자였다.

루비나드가 눈앞의 난봉꾼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황자의 초대라면… 기꺼이 받아야겠지. 다만 당분간은 새로운 사업이 많아 여유가 없을 것 같소. 다음에 로간을 방문해 주었을 때를 기약하도록 하지.”

둘러 말하는 거절이었다. 엷은 미소를 짓고는 있었지만, 그 미소엔 벽이 있었다. 벽 뒤에 숨어 자신을 곁눈질하고 있는 고양이 같다.

에브니겔은 눈앞의 황제를 그리 평가했다.

“그렇다면 본국으로 돌아가는 일정을 조금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방문이 언제가 될지, 또 제가 방문하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인지라. 폐하께서 여유가 되실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지요.”

끈질기다. 루비나드는 이를 악물었다.

대체 이 남자의 목적은 뭐지? 설마 진심으로 자신을 유혹하려 드는 것일까?

설마. 그럴 리가. 그와 처음 만난 게 다름 아닌 루비나드의 결혼식 피로연에서였다. 결혼 축하 사절로 참여한 그가 루비나드를 유혹해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것일까. 근데 그게 아니라면 이 남자의 행동이 설명되질 않았다.

“굳이 그럴 것까지 없소. 황자와는 분명 다시 만나게 되지 않겠소.”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인연은 하늘이 내려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제가 로간 제국을 방문해서 폐하를 만난 것 역시 신께서 맺어 주신 인연이라는 것이지요.”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제대로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안 그래도 졸린 머리는 안개가 낀 것처럼 멍했다. 거기에 알 수 없는 소리만 지껄이고 있으니 슬슬 짜증이 밀려 왔다.

참자. 참아야 한다. 이 난봉꾼을 제대로 상대하지 못하면 나라가 다시 전화에 몰릴지도 모른다. 게다가 일개 왕국 상대도 아니고 로간 제국과 거의 비등한 힘을 가진 또 하나의 제국이 아닌가.

아마 상처 없이 전쟁을 마무리 지을 순 없을 터였다.

“그럼 국서를 대신 보내도록 하겠소. 이제 그가 정식으로 국서가 되었으니, 그의 말이 곧 내 말이나 다름없소. 그러니 사양치 마시오.”

둔한 쪽인가? 아니면 그의 마음을 눈치챘지만, 남편 있는 몸이니 포기하라는 뜻일까. 에브니겔이 피식 웃었다.

어차피 황제란 수많은 이성과 몸을 섞게 되는 존재였다. 거기에 하룻밤의 불장난이 끼어 있는들 무어 대수라고. 에브니겔은 상체를 숙여 루비나드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가 달콤하게 속삭였다.

“폐하께서는 부러 저를 애태우려 그러십니까? 저는 폐하와 정을 쌓고 싶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순간 머리가 정지했다.

루비나드는 이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빌어먹을 놈이 지금 누구한테 더러운 수작을 부리고 있는지는 알고 있는 것일까.

아무리 난봉꾼이라지만 최소한 때와 장소는 가려야지. 루비나드의 입이 험한 말을 내뱉으려 열리는 순간.

“무슨 일이십니까.”

차가운 목소리가 상황을 정리했다.

“…쿠온 경.”

후둑, 하고 가면이 무너진다. 이미 조각나 있던 것을 애써 손으로 그러모아 꽉 쥐고 있었던 것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그 표정의 변화에 에브니겔은 눈을 빼앗겼다.

뭐라고 해야 이 순간을 표현할 수 있을까.

마치 어두운 밤을 지나 여명이 비치는 순간의 그 웅장함? 아니면 완벽한 아름다움을 지녔지만 차갑게 굳어 있던 조각상에 생이 깃드는 순간의 신비로움? 그도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에 처음으로 애정이 깃드는 순간?

아니다. 아마도 흑백이었던 세상에 처음으로 색이 깃드는 순간이라고 하는 것이 가장 옳을지도 모르겠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제빌은 싱긋 웃어 보이곤, 루비나드와 에브니겔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리고 조금 전 에브니겔이 그랬듯, 루비나드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가져갔다.

소곤소곤 속삭이는 소리에 무슨 이야기가 있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건.

“그런가. 바로 가도록 하지.”

조금 전 자신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임을 넣었을 때와는 달랐다. 그녀는 곧바로 몸을 일으켜 에브니겔에게 손을 내밀었다.

“미안하오, 황자. 급한 일이 생겨서 그만 가 봐야 할 것 같소. 다음에 또 만나기를 소망하겠소.”

이 순간을 놓치면 분명 다음은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조금 전 그녀의 표정을 생각하면 차마 붙잡을 수가 없었다. 에브니겔은 뭐라 입도 떼지 못하고 가벼운 악수만 나눈 후 그녀를 보냈다.

제빌과 루비나드가 사라진 자리, 홀로 남은 에브니겔은 그녀가 앉아 있던 자리를 보았다.

로간의 황제는 웃음 속에 벽이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국서가 나타나자 그 벽이 허물어지고 그 속에 있는 사람이 드러났다.

오만하고 당당하며 기백 넘치던 황제의, 일개 사람으로서의 얼굴이.

자신에게 향하던 미소와는 전혀 달랐다. 생기 넘치는 미소가 눈에 선연하게 새겨졌다. 마치 낙인이라도 찍은 듯 시야에 박혀 사라지질 않는다.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그저 그녀의 미소만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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