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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 (41)화 (42/115)

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42)

연회의 마지막 날.

제국의 연회는 보통 사흘 동안 치러진다. 그중에서 가장 많은 손님이 방문하는 것은 물론 둘째 날이었다. 그다음이 첫째 날이었고.

그러니 마지막 날인 오늘은 연회장도 꽤 한산해졌다.

대부분은 둘째 날에 돌아갔고, 셋째 날까지 있는 건 데뷔탕트를 치르며 눈이 맞은 젊은 연인들이 만남을 가지거나 할 일 없는 치들이었다.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무어 그리 즐거운지 항간에 떠도는 소문에 관한 이야기로 불타오른 그들을 보며 루비나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하십니까?”

“피곤하다기보다는 질리는군. 매년 그렇지만, 봄맞이 연회라면서 그 누구도 꽃을 즐기려 하지 않아. 이럴 바엔 저 꽃나무는 다 밀어 버리고 대환장 소문 연회나 여는 게 낫겠어. 관리비도 많이 드는데.”

“폐하.”

저를 말리는 목소리에 루비나드가 입술을 비뚜름하게 끌어 올렸다. 밤새 잠을 설치더니 기분이 영 안 좋은 모양이었다. 하긴, 원래도 이런 연회에 참여하는 걸 싫어하시기는 하지만.

제빌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귓가에 속삭였다.

“밖으로 나갈까요?”

“나도 그대도 없으면 여긴 어쩌란 건가.”

“클라렌 경께 맡겨 두시지요.”

어차피 내빈들도, 두 사람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수군거릴 뿐 다가오질 않았다. 그제 두 사람이 연회장에서 벌인 충격적인 애정 행각에 관해서 이야기하느라 바쁠 터.

그보다는 터져 나오기 시작한 루비나드의 불만을 막는 게 더 중요했다.

루비나드의 수면 시간은 하루 다섯 시간. 즉, 그 정도의 수면 시간은 반드시 지켜야 하루를 버틸 수 있다는 뜻이었다. 며칠 숙면을 취하나 했더니 어제는 내내 제빌의 품속에서 이리 뒤척 저리 뒤척거리느라 제대로 자지 못한 듯하니 슬슬 한계이리라.

“…그럴까.”

루비나드도 슬슬 자신이 한계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게 왜인지도.

다 눈앞의 남자 때문이었다.

어제 아침,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가만히 앉아 있다가 뒤늦게 수치심이 몰려왔다. 대체 왜 그런 짓을 했던 걸까. 쓸데없이 자는 사람의 입술은 왜 만지작거려서는.

만약 그때 제빌이 깨기라도 했으면 어떻게 됐을는지.

하지만 쿨쿨 잘 자던 제빌은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그래서 요즈음 계속 그랬던 것처럼 그녀에게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오기를 수차례. 거기서 벗어나려는 듯이 오로지 서류에만 집중했다.

-폐하, 슬슬 오늘은….

그 덕인지 어제는 일찍 서류 작업을 마쳤다. 심지어 두 시간씩이나.

제빌에게 신경 쓰지 않으려고, 떠올리지 않으려고 열심히 손을 놀린 결과물이었다. 서명이 끝난 서류를 정리한 제빌이 창밖을 흘끔 보더니 물었다.

-연회 시작 전에 잠시 정원을 산책하시는 건….

정원이라는 말에 전날의 일이 떠올랐다. 꽃그늘 아래에서 일렁이던 제빌의 얼굴과 이마에 닿던 입술의 감촉.

루비나드는 저도 모르게 쾅, 하고 책상을 쳤다.

-폐하…?

-어, 음, 그, 시간이 좀 남았으니 내일 할 예정이었던 일을 미리 가져오게.

-최근 거의 쉬질 못하셨지 않습니까. 오후에는 또 연회에 참여하셔야 하고.

-그건 그대지. 그대야말로 좀 쉬도록 해. 이게 그대가 검토하려던 서류인가? 내가 해 두도록 하지.

손끝에 와 닿았던 감촉을 지우려는 듯 종이를 넘겼다. 하지만 아무리 넘겨도 제가 한 행동이 머릿속에 달라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왜.

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걸까.

그래도 연회에서 손님을 치르다 보니 조금 마음이 가라앉았다. 정신없이 내빈을 맞이하고, 그들과 별 내용 없는 담소를 나누었다. 대부분은 루비나드와 제빌의 앞날에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는 아부 섞인 말이었다.

질릴 정도로 비슷한 말을 반복해 듣다 보니 아침의 일이 조금 잊혀졌다.

하지만 밤이 되자.

-폐하, 연회에 온 귀족 중 선물로 귀한 과일을 가져온 이가 있었습니다. 폐하께서 즐기시는 맛일 것 같아 밤참으로 준비해 달라 했습니다.

어김없이 제빌이 찾아왔다.

주변을 둘러싼 사람이 없다. 시끄러운 소리도 없다. 있는 것은 오로지 제빌과 루비나드뿐.

그런 상황이 되자 다시 아침에 저지른 제 행동이 떠올랐다.

-그, 그대 이제 가서 쉬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저도 궁금하던 참입니다. 폐하와 함께 맛보고 싶어서 기다렸는데… 곤란하십니까?

아니, 곤란할 건 없었다. 최근엔 제빌과 자기 전에 가지는 잠깐의 다과회가 일과처럼 되었으니.

하지만 지금은 곤란했다.

혼자 떠올릴 때는 그나마 얼굴이 화끈거리는 정도에서 끝났다. 하지만 당사자를 앞에 두자 죄책감 때문인지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이걸 들키면 제빌은 뭐라고 이야기할까.

-곤란…하진 않네.

거절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함께 맛보고 싶어서 기다렸다며 매달리는 청회색 눈동자에 졌다.

그래, 이거 하나 같이 먹는다고 어찌 되겠나. 빨리 먹고 빨리 보내 버리면 되지. 그런 생각으로 탁자 앞에 앉았다. 제빌은 환하게 웃으며 그녀의 앞에 앉았다.

문제는.

-왜 그러십니까?

-으, 음? 뭐가?

-제 얼굴을 빤히 쳐다보시기에.

계속 시선이 그의 입술로 향했다.

이국의 과일은 딱딱한 껍질로 둘러싸여 있던 겉모습에서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과즙이 풍부했다. 그걸 베어 문 탓에 붉은 입술에 붉은 과즙이 물들어 반질반질 빛이 났다.

그걸 보지 않기엔….

-아무것도 아니야! 나, 난 이만 자야겠어. 그대도 어서 쉬도록.

-알겠습니다, 폐하. 정리한 후에 저도 쉬겠습니다.

루비나드가 먼저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눈을 꼭 감고 부스럭거리는 기척을 애써 무시하려 했다. 하지만, 달그락거리며 그릇을 정리하는 소리가 멈춘 후 다가온 온기에 흠칫 몸을 떨었다.

-주무십니까, 폐하?

루비나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눈을 꽉 감았다.

그녀가 잠든 것이라 생각했는지 제빌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허가를 구한 적 없으니 방으로 돌아가서 자겠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촛대의 불을 하나하나 끈 제빌이 그녀의 곁으로 파고들었다.

일어나서 방으로 돌아가라고 할까? 그럼 왜 자는 척했냐고 하지 않을까? 어지러운 머리가 생각을 제대로 짜내질 못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폐하.

제 등을 끌어안는 손이 뜨거웠다.

이렇게 뜨거웠던가? 원래 그랬던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 온기가 편안하게 느껴졌던 지난 며칠과 달리 루비나드는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워야만 했다. 제빌이 일어나는 기척이 들려 눈을 떴을 땐 이미 아침이었다.

사실 엄밀히 따지자면 결국 자신의 잘못이었다. 그래도 제빌이 자꾸 이상한 행동을 하지 않았으면, 자신도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결국은 제빌의 잘못이었다.

잠에 취한 루비나드의 머리에 그런 생각이 두서없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매일 최소한으로만 수면을 취하는 루비나드에게는 이 하루의 밤샘이 컸다. 몽롱한 정신 탓에 자신이 가면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순순히 제빌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북적거리던 지난 이틀과 달리 황궁은 조용했다. 간혹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의 목소리가 들리긴 했으나 내용까지 알아듣기엔 너무 작았다. 그 사이를 지나 밖으로 빠져나간 두 사람은 정원이 한눈에 들어오는 야외 테이블에 앉았다.

기껏 꽃구경을 위해 준비했으나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테이블에.

“아름답군요. 폐하께서 자주 말을 걸어 주셔서 그런지 더 예뻐진 것 같습니다.”

“그대까지 그런 실없는 소리를 하다니.”

“실없는 소리가 아니라 진심입니다.”

엷게 웃는 제빌을 바라보던 루비나드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살랑살랑 따스한 봄바람이 그녀의 얼굴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큰일 났네, 제빌 경.”

“큰일이요?”

“졸려.”

눈꺼풀이 무거웠다. 당장이라도 닫히려는 눈을 억지로 뜨고 있는 탓에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 표정이 너무 귀여워서 제빌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찌푸려진 미간을 꾹 눌렀다.

“…뭐 하는 거야.”

“폐하의 미간이… 엄청 주름져서요. 펴 드리려고 했습니다.”

“주름지면 뭐 어떤가. 관록도 붙고 좋지.”

주름진다고 해도 아름다울 것이다, 루비나드는. 그녀가 아름다운 건 외면뿐만이 아니니까.

설령 겉모습이 어떻게 변한다고 해도 분명 그 어떤 것보다도 사랑스럽고 예쁘겠지.

그래도 찡그린 얼굴은 싫었다. 제빌은 몇 번 더 주름 위를 손가락으로 눌러 주곤 아쉽다는 듯 제 손을 떼어 냈다.

“정말로… 그대 말대로 예쁘군.”

티 하나 없이 맑은 하늘은 이제 곧 석양이 지려는 듯 살짝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 위를 분홍색과 하얀색의 꽃잎이 한들한들 수놓고 있었다.

이토록 아름다운데 누구도 봐 주지 않다니.

“이런 연회, 폐지해 버리면 좋겠어. 차라리 꽃이 피는 기간에 황궁을 개방해 제국민들이 구경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더 이 아이들에겐 좋을지도 몰라.”

한들한들 흩날리던 꽃잎이 살포시 붉은 머리카락 위에 내려앉았다. 하지만 루비나드 본인에게는 보일 리 없는 터라 알아채지 못한 듯했다.

정말로 예쁜 건 당신입니다. 그 어떤 것도 따라가지 못할 만큼.

그런 생각을 하던 제빌이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겨우 화제를 돌렸나 했더니 다시 그 이야기로 돌아가는 건가.

“누가 들을지도 모르니 밖에서 말을 조심해 주시라고 부탁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런 말은 침실에서 단둘이 있을 때만 해 주십시오.”

졸음에 취한 머리에 또 어제의 추태가 떠올랐다. 속절없이 붉어진 얼굴에 제빌이 고개를 갸웃했다.

뭘 생각한 걸까. 루비나드의 생각을 읽을 수가 없었다. 다만, 제빌의 앞에서도 이렇게 얼굴을 붉힌 적 없는 루비나드가 갑자기 안색이 변했다면….

혹시.

“어디 아프십니까? 얼굴이 붉으십니다.”

“전혀. 졸릴 뿐이야.”

루비나드가 잠을 설친 건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얼굴이 이렇게 붉어졌다면 제빌이 모를 리가 없었다. 분명 뭔가 있는 것 같은데….

루비나드는 자신에게 엄한 편이라 다소 몸이 안 좋은 정도는 숨길 때가 많았다. 감기 걸리기 전의 증상과는 좀 다르지만, 열이 오르는 걸지도 모른다. 일단 열을 내릴 수 있도록 허브차라도 가져오도록 할까.

“…열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군요. 차가운 음료라도 가져오겠습니다.”

제빌은 루비나드를 두고 일어섰다. 본궁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루비나드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좀 잊었나 싶었는데 왜 또 상기시키는 건지.”

그렇게 중얼거리는 그녀의 머리 위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뭘 상기시켰다는 것인가요, 폐하.”

낯선 목소리. 하지만 어디선가 들어 본 목소리였다.

불쾌함이 치밀어 오르는.

루비나드가 눈을 뜨자 거기에는 에브니겔 황자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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