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 (39)화 (40/115)

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40)

“왜라니….”

그게, 제빌에게 말할 만한 내용이 아니었으니까. 그것뿐이었다.

제빌에게 있어서 커드닐은 불쾌한 기억 중 하나일 터였다. 그녀가 말했을 때, 그도 커드닐을 기억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그 사건’ 역시 생생하게 기억할 터.

그녀의 국서에게는 수많은 장점이 있었지만, 장점이면서 단점인 것 중 하나가 너무 기억력이 좋다는 것이었다.

커드닐은 제빌의 자존심을 짓밟았다. 비웃고, 깔봤으며 자신과 동등하지 않은 존재로 대했다. 그게 제빌에게는 얼마나 상처가 되었을지 루비나드에게는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찾아왔다는 걸 이야기하면서 무슨 낯으로 나타났는지 모르겠다고까지 했다. 그런 자신이 그를 불러내면….

그래서 항상 제빌을 통해 일을 시작하는 그녀가, 처음으로 제빌을 통하지 않고 그를 불러냈다. 그게 잘못인 건가?

“그는 그대를 모욕했던 자야. 그런 자를 부른다고 이야기하면 혹여 그대가 상처 입을까 봐….”

실제로도 제빌은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슬픈 듯 화난 듯 한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얼굴은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청회색 눈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이 꽉 조여 올 정도의 감정을 담고 있었다.

가만히 그녀의 대답을 듣던 제빌은 고개를 내저었다.

“저는… 제가 상처 입은 이유는 폐하께서 저를 속이셨기 때문입니다.”

…어?

루비나드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커드닐을 부른 것은 엔도르빌의 위화감을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하는 제빌은 분명, 그녀가 명하면 묵묵히 수행했을 터.

그런데 왜 루비나드는 그가 상처 입을 거라 생각했을까.

“저는 폐하를 믿고 있습니다. 지금도. 폐하가 보르본 경을 부르셨다면 분명 이유가 있겠지요.”

믿고 있다, 라는 말에 루비나드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자신은 제빌을 믿지 않았던 건가? 그가 상처 입을 거라고, 제멋대로 생각하고 그에게 비밀을 만들었던가?

…왜?

-황녀 저하께서는 정말로 총명하세요. 그 어떤 분야도 어렵지 않게 통달하시지요.

-세상에. 저하는 이 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가씨일 거예요. 옷이 저하를 돋보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저하께서 옷을 돋보이게 하네요.

-와, 이 토끼를 저하께서 잡으셨다고요? 세상에! 정말 대단하세요.

어린 루비나드는 그 모든 칭찬이 진심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자신은 사랑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첫째 오라버니가 짓궂게 굴긴 했지만, 가족들도 모두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황녀란 어차피 장사 도구 아니겠습니까. 그런 것이 뛰어난 머리를 가져 봤자 무슨 의미가 있다고.

-그러니 너무 칭찬해 주지 마시지요. 주변에서 잘한다 잘한다 하니 그것이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제 오라비의 평판을 떨어뜨리는 거라는 것도 모른 채.

-얼굴이 반반하니 그래도 비싼 값에 팔리겠지요. 그 트로피를 얻은 이는 얼마나 자랑스럽겠습니까.

-그건 모를 일이죠. 겨우 일곱 살 때 마법이 부여된 무기라고는 해도 수노를 사용해서 토끼를 잡았다지 않습니까. 그런 괴물이 과연 얌전히 트로피로 있어 줄지. 괜한 골칫덩이를 끌어안게 되는 것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긴. 트로피 이상의 가치는 없지요. 귀찮은 일이 생길 거라면 애초에 받지 않는 것도 방법이겠네요.

-그게 마음대로 되겠습니까? 폐하께서 하라면 해야 하는 거지요.

그들의 칭찬은 그녀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인 데거베일에게 보내는 아부였다. 그들의 진심은 그거였다.

결혼 장사 도구.

루비나드는 다시는 아무나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누구의 말도 믿지 않겠다고.

누구에게도 함부로 마음을 주지 않겠다고.

하지만 루비나드는 사람이었다. 감정이라는 것은 언제나 그녀의 뜻대로 되어 주지 않았고, 그녀는 많은 이들에게 신뢰를 주었다. 루비나드는 자신의 약함을 탓하고 욕하다 결국 받아들였다.

자신은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약한 인간이었다. 그렇다면 선을 두고 믿자. 언제 배신당해도 아프지 않도록. 쉽게 끊어 낼 수 있도록.

이거면 됐다고 생각했다. 한 줌이라도 좋으니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생기고, 그들에게 마음을 허락할 수 있다면 괜찮다고. 가족과 제빌과 그리고 몇 안 되는 신뢰할 수 있는 이들이 있으면 괜찮다고.

하지만.

-너희 연놈들이 뭐가 그리 잘났는데? 너희가 나랑 뭐가 그렇게 다른데! 그 한 번의 실수가 너희에겐 없을 거라 생각해? 너도 나와 같아. 단 한순간으로 모든 걸 다 잃을 거야. 모든 걸!

-전… 전 그녀를 기억조차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그런 일이 생겼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정말로 마음을 준 이들이 그녀를 배신하는 일이 결국 일어나고야 말았다.

루비나드는 한 번도 론디아스를 덜떨어졌다고 생각한 적 없었다. 다만, 그의 짓궂은 장난이 귀찮았고 그와 얽히면 듣는 조롱이 싫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론디아스를 피했던 것뿐이었다.

론디아스의 말은 옳다. 루비나드 역시 한 번의 실수로 모든 것을 잃을 수 있었다. 왜 그는, 루비나드가 그와 다른 의견일 것이라고 생각한 걸까.

처음에는 분명 아니었다. 아버지의 총애가 자신을 향하는 걸 보고 조금은 질투해서 짓궂은 장난을 치긴 했다. 하지만….

-여기서 뭐 하느냐, 루비나드.

-멍멍이….

아주 어렸을 때의 기억. 루비나드가 아직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을 때의 기억이 여전히 남아 있다. 론디아스는 귀찮다는 듯 루비나드를 안아 들곤 퉁명스럽게 이야기했었다.

-저것이 무서우냐.

-응…. 멍멍, 무셔.

-너는 황녀다. 저런 것을 무서워하지 말아라.

-하…녀?

-황녀. 이 나라에서 가장 고귀한 핏줄이라는 뜻이다. 이 나라를 대표하는 자라는 뜻이기도 하지. 네가 두려워하면, 네 백성들이 두려워한다는 뜻이 된다.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론디아스의 얼굴이 너무 늠름해서, 아직도 흐릿하게나마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는 명실상부한 이 나라의 황자였다.

여섯 살 차이. 그때의 론디아스는 겨우 열 살이었다. 네 살짜리를 안고 걷기엔 꽤 힘들었을 터. 그런데도 오라버니는 루비나드를 내려놓지 않았다. 그리고 강아지가 보이지 않는 곳까지 가서 무심히 내려놓았다.

-선생들이 다 널 똑똑하다 하더니 결국은 어린아이구나.

눈을 감으면 툭, 하고 머리를 쓰다듬고 걸음을 옮기는 그 뒷모습이 떠올랐다. 그런 사람이었다. 첫째 오라버니는.

그런 사람이 결국 변했다.

그의 위치가, 루비나드의 위치가 변해서였을까. 아니면 중간에 무언가가 잘못되었던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원래 시간이 흐르면 다들 변해 버리는 것일까.

믿었던 사람조차 시간이 지나면 변하고 배신한다. 그게 루비나드의 마음을 뿌리째 흔들었다.

“저는… 그저 폐하께서 절 믿지 못하셨다는 것에 화가 났을 뿐입니다. 제가 폐하께 믿음을 드리지 못했다는 것에.”

그런데도 제빌은 여전히 자신을 탓했다. 그가 부족해서, 그가 믿음을 주지 못해서 그런 것이라 말하고 있었다.

루비나드는 자신이 저지른 일이 어떤 것인지 깨닫고는 머리가 하얘졌다.

상처 입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왜 다들 날 배신하는 거지?

왜 모두가 변하는 거지?

그렇게 모두를 원망했던 루비나드가…, 자신이.

제빌에게 똑같은 짓을 했다. 그녀는 제빌의 믿음을 배신한 것이다.

“…나는….”

루비나드는 덜덜 떨리는 제 손끝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을 들어 제빌을 보았다.

청회색의 눈동자는 가만히 자신을 내려 보고 있었다.

“나는….”

루비나드의 머리가 좀처럼 돌아가질 않았다. 하얗게 질린 채 아무리 지나도 생각이라는 게 떠오르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도.

한참을 그렇게 서 있던 루비나드의 머리에 겨우 현재 상황이 떠올랐다.

본궁 안에서는 한창 연회가 계속되고 있었다. 이렇게 정원에 서 있다가 누군가 나오기라도 하면 구설을 좋아하는 귀족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일단,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자.

루비나드는 제빌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눈에 띄는 가장 높은 꽃나무 아래로 들어갔다. 다른 나무에 가려지도록 풀숲을 해치고 들어간 그녀가, 주변을 둘러보며 누구도 볼 수 없는 곳임을 확인하고는 겨우 제빌의 손을 놓아 주었다.

“폐하…?”

제빌은 잡혔던 손으로 제 입가를 틀어막고 있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행동을 해서 놀란 것일까.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피부가 조금 붉어 보였다.

“제빌 경.”

루비나드는 그를 끌어 나무 기둥 뒤에 숨겼다. 그 누구도 두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없도록. 그리고 자신도 그에게 바짝 달라붙었다.

그동안 제빌의 곁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는 건 계속 피했었다. 그의 향기나 온기가 그녀의 심장을 들뜨게 하곤 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게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이제 어떻게 해야….

“나는… 나는 그대를 믿지 못한 게 아니야. 나는 분명.”

아니, 믿지 못했다. 커드닐의 이름을 꺼내면 분명 그가 상처 입을 거라고 생각했다.

커드닐에 대해 이야기했던 그 밤, 제빌이 보였던 그 감정.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하얘지는 것 같고 가슴 속이 울렁거리던 그 감정. 그걸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제빌이 공사를 구분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변명이야. 맞아. 나는 그대를 믿지 못했어. 그동안 그대가 공사를 구분하지 못한 적은 한 번도 없는데, 그대는 여전히 어린 시절 그대로인데.”

자신은 왜 변해 버린 걸까.

왜 그토록 스스로가 혐오해 왔던 짓을 해 버린 걸까. 루비나드는 점차 흐려지는 눈을 들어 올렸다. 무언가가 뺨을 타고 흘러내릴 것만 같아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청회색의 눈동자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다.

루비나드는 무언가를 붙잡듯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부드러운 코드가 그녀의 손아귀에서 일그러졌다.

“제빌, 알려 줘.”

루비나드는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누구도 듣지 않는 곳에서 황제의 가면을 벗었다. 그저 한 명의 사람, 그냥 ‘루비나드’로서 그에게 물었다.

“내가 어찌하면 그대에게 속죄할 수 있는 거지?”

얼음 같은 눈동자가 투명하게 그녀를 비췄다. 그 눈 속의 루비나드는 한없이 여리고 가냘팠다. 제빌이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그는, 눈동자 속 루비나드를 향해 입을 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