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38)
불쾌한 남자다.
그는 어딘지 다프넬을 떠올리게 하는 면이 있었다. 그 반짝이는 금발도 그렇고, 칭찬인지 유혹인지 알 수 없는 말들도 그랬다.
하지만 다프넬은 저렇게 무례하지 않았다. 시도 때도 가리지 않는 남자도 아니었고 저렇게 사람을 얕잡아 보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지도 않았다. 악의는 보이지 않았지만, 최소한 저 남자는 루비나드를 동등하거나 저보다 높은 존재로 보지 않았다.
“재수 없는 놈.”
제빌이 들었다면 틀림없이 또 잔소리를 했겠지. 그런 생각이 들자 불쾌한 기분은 가라앉고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나 그 미소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
지금 그녀가 누구를 만나러 가는지 알면, 제빌은 화를 낼까? 아니면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냉담한 태도를 보일까. 그도 아니면.
최근의 제빌은 알 수가 없었다.
이전의 담담하고 냉담하던 제빌과 어딘지 열에 들뜬 듯한 지금의 제빌. 국서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이 일상이 되고 그가 처음으로 손에 쥐어 본 것들이 당연한 것이 되면…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일까?
그렇다면 최대한 빨리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가끔 보이는 그의 돌발 행동에는 심장이 남아나질 않으니까.
아까도 그렇다.
언제나 공적인 자리에서는 위엄 있고 기백 있는 황제로서 군림해야 한다고 했던 그가, 왜 그런 짓을 시킨 걸까. 물론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나름대로 가능성 있는 이유가 떠오르긴 했다.
정실이든 후실이든 상관없다. 황제의 총애가 곧 궁의 서열이 된다.
설령 정실이라 해도 황제의 총애를 받는 후실보다는 그 세가 약하다. 그러니 그가 처음으로 준비한 연회에서 루비나드와 다정한 모습을 보였다는 사실에서 특별한 의미가 생겨난다.
제빌이 그냥 자리 채우기용이 아니라 진짜 황제의 정실이라는 의미가.
하지만 그래서 이해가 가질 않았다. 제빌은 언제나 자신보다는 루비나드를 우선시했다. 겨우 그런 이유로 루비나드의 ‘오만하고 기백 있는 군주’라는 가면을 상처 입힐 리가 없었다.
게다가 두 사람의 결혼은… 정말로 계약에 불과했으니까.
“정말이지.”
생각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머리가 복잡해지는 걸 느끼며 루비나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내 평소의 오만한 얼굴로 돌아왔다.
어차피 지금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이다. 언젠가 때가 되면 답을 내릴 수 있는 질문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쓸데없는 것에 매달리기보다는 지금 해야 할 일을 하는 게 먼저였다.
황궁을 뒤로하고 정원으로 나오자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봄 햇살치고는 꽤 강해 루비나드는 반사적으로 눈을 찡긋했다.
정원 가득 피어 있는 아름다운 꽃나무를 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명색이 봄맞이 연회거늘. 루비나드는 속으로 혀를 차고는 빠른 걸음으로 정원 구석으로 향했다.
워낙 구석진 곳이라 찾는 이가 거의 없는 작은 가제보. 지붕을 타고 내려온 담쟁이덩굴과 이제 막 봉우리가 맺히기 시작한 라일락 꽃 사이로 그 남자가 보였다. 백금색의 머리카락과 초록색 눈동자의 남자.
커드닐이었다.
“폐하…!”
벤치에 앉지도 못한 채 계속 서성거리고 있던 그가 초록색 눈동자를 반짝거렸다. 마치 주인을 발견한 강아지 같은 눈빛과 환한 미소에 약해지려는 마음을, 루비나드는 겨우 추슬렀다.
이 남자를 용서하기 위해서 부른 게 아니었다. 꼭 물어야 할 것이 있었다.
“갑작스러운 부름에 응해 주어 고맙군, 보르본 경.”
“폐하께서 부르신다면 언제든 달려올 수 있습니다.”
무언가 더 말하려는 듯 벌어졌던 입술이 닫혔다. 루비나드의 표정을 보고 아마도 감정을 읽은 모양이었다.
들뜬 마음을 가라앉힌 커드닐이 고요한 눈동자로 루비나드를 보았다.
그 눈동자에 떠올랐다.
커드닐이 매일 아침 보냈던 편지들이.
『 경애하는 폐하.
어제는 갑작스러운 방문에 놀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제 무례를 눈감아 주신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제 모든 것의 주인이신 폐하.
제가 어제 드린 말은 모두 제 진심을 담은 것들입니다.
부디 그것만은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언제나 폐하의 곁에 있고 싶습니다. 』
『 제 모든 감정의 주인이신 폐하.
내일 폐하의 결혼식이라는 것이 아직 실감이 나질 않습니다.
비록 저는 폐하의 말씀을 따라야 하기에 그 모습을 직접 볼 순 없겠지만,
아마 틀림없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아름답고 우아한 신부이실 테지요.
그 모습을 직접 보지 못한다는 것이 제게는 축복이자 지옥입니다.
다른 이를 위해 웨딩드레스를 입은 폐하를 볼 수 없다는 것은….
제게는 그런 의미입니다.
하지만 폐하.
설령 삶이 모두 지옥이 되더라도 저는 폐하의 곁에 있고 싶습니다. 』
그런 편지가, 그를 만났던 다음 날부터 매일매일 보내져 왔다.
결혼식 이후의 편지에서는 별것 아닌 신변상의 사건들이나, 잡담에 가까운 이야기를 적곤 했다. 하지만 루비나드를 수식하는 말에서 늘 그녀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게다가 마지막은 언제나 그녀의 곁에 있고 싶다는 말로 맺곤 했다.
그러다가 그제 보낸 편지에서는.
『 제 눈을 멀게 하는 빛이자 제 길을 비춰 주는 빛이신 폐하.
어느덧 봄맞이 연회가 성큼 다가왔습니다.
거리를 물들인 꽃 중 가끔 붉은 꽃잎을 흩날리는 꽃을 보곤 합니다.
그럴 때마다 제 가슴은 마치 상처라도 난 듯 아려 옵니다.
제 세상의 주인이신 폐하.
저는 무엇을 보더라도 끝내 폐하를 떠올리고야 맙니다.
십여 년간 버텨 온 그 시간이 몹시도 괴로웠습니다.
하지만 그건 지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듯합니다.
얼마 전 폐하를 뵙고 온 뒤 저는 진짜 괴로움을 알았습니다.
언젠가 다시 폐하를 만나 뵐 수 있을까요?
제가 폐하께 용서받을 날이 올까요?
그럴 날은 오지 않겠지요.
폐하께서는 한 번 아니었던 것에는 냉혹한 분이시니까요.
꽃이 피고 봄이 와도 제 마음은 여전히 차가운 겨울 속에 갇혀 있습니다.
그 추위 속에서 폐하의 부름을 언제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제게 봄이 오는 그 순간을. 』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제빌이 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인지, 결혼 후의 편지는 대부분 담백했고 자신의 감정을 감추곤 했다. 하지만 그제 온 편지는 이상할 정도로 감정에 가득 차 있었다.
읽으면서 왜일까. 제빌이 떠올랐다.
-저는… 폐하께 버림받으면 완전히 망가질 테니까요.
-그러니 절 버리지 마세요, 폐하.
-그렇죠…. 저는 폐하의 것이 아니죠.
커드닐을 보고 있으면 계속 제빌이 떠올랐다. 저를 버리지 말아 달라고 말하던 그 눈동자는, 장난처럼 흘렸지만 분명 진심이었다.
그 애절함과 간절함은 어찌 보면 커드닐 이상이었다.
커드닐은 루비나드가 왜 그를 부른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니 아마 그 편지에 답장한 것이라 생각했던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토록 눈을 반짝이며 달려온 것일지도.
그렇게 생각하니 차가운 말을 내뱉을 수가 없어졌다.
들뜬 얼굴로 환하게 미소 짓던 커드닐의 얼굴을 애써 떨쳐 낸 루비나드가 그의 시선을 외면한 채 입을 열었다.
“오늘 그대를 부른 건… 물어볼 것이 있어서네.”
아아.
낮고 작은 탄식이 흘렀다. 커드닐의 눈동자에 짙은 실망이 떠올랐다.
기대해선 안 된다는 건 알고 있었다. 아직은 너무 성급하다는 것도. 그런데도 루비나드가 보낸 초대장 하나에 마음이 계속해서 들떴다.
어쩌면 자신의 절실함이 기적을 불러일으킨 건 아닐까. 루비나드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건 아닐까. 자신의 감정을 알고 거기에 답해 주려고 하시는 건 아닐까.
희망은 그의 이성을 짓뭉갰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절대 그럴 리 없었다. 루비나드가 그렇게 무른 사람이었다면, 온 귀족들의 차가운 눈초리 속에서 지금처럼 황권을 키울 수 없었을 터였다. 그녀는 냉철하고 이성적이었다.
무서울 정도로.
게다가 론디아스. 비록 어렸을 때 뒤에서 루비나드에 대한 험담을 다소 하긴 했지만, 그는 엄연히 루비나드의 핏줄이었다. 선황제와 엔도르빌에게 지극한 루비나드를 보면 아마도 가족이란 그녀에게 특별한 의미이리라.
그런 그녀가 론디아스를 멀리 유배 보냈다.
사형을 당하는 일이 거의 없는 황족에게 내릴 수 있는 가장 큰 벌이었다. 루비나드는 온정을 가지고 있던 제 핏줄에게까지도 그리 냉혹했다. 처음부터 미움받았던 커드닐에게 줄 한 줌의 자비 따위는 존재하지 않을 터.
그런데도 기대하고 만 자신이 우스워 커드닐은 엷은 조소를 띠었다.
“그대는… 결혼식 날에 황궁에 왔었나?”
그의 얼굴을 보지 않은 탓에, 루비나드는 커드닐의 감정을 전혀 읽지 못했다. 그래서 담담한 목소리로 제 용건을 꺼냈다.
그가 보냈던 편지에는 볼 수 없다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분명 그날, 황궁을 떠나기 위해 마차에 오르던 오라버니의 곁에는 커드닐이 있었다.
초록색 눈동자가 낮게 가라앉았다.
“저를 보셨습니까?”
용건을 알고 나니 이해가 되었다.
루비나드가 왜 자신을 불렀는지. 연회장에서 엔도르빌을 보는 그녀의 눈동자는 누가 봐도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어서, 얼마나 제 오라비를 아끼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 오라비가….
“오라버니께서 마차에 오르실 때, 그대의 모습이 보였네.”
루비나드의 눈이 처음으로 커드닐에게 향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녀를 붙잡고 애원하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차가운 얼굴의 남자가 거기에 서 있었다. 루비나드는 이 얼굴을 지겨울 정도로 많이 봐 왔다.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얼굴.
그녀에게 접근한 이들이 하나같이 짓는 표정이었다.
루비나드의 마음에서 조금 있던 죄책감과 망설임이 깨끗하게 사라졌다.
“아, 그때….”
엔도르빌의 황궁 행은 비밀스럽게 결정되었다. 그 누구도 모르게.
베카르티가 루비나드의 지시를 받아 움직였고, 일에 대해선 믿을 수 있는 그 남자가 누군가에게 말을 흘렸으리라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커드닐이 거기에 있을 수 있었을까.
그와 베카르티는 아무런 연결점도 없는데.
“말해 주겠나. 왜 그대가 오라버니와 함께 있었는지.”
보라색 눈동자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커드닐은, 비수처럼 자신을 찌르는 시선을 받으면서도 웃었다.
그녀가 보내는 적의나 의심조차도 그에게는 너무나 달콤했기에.
“…….”
그러나 아무것도 말하지는 않았다.
아직 때가 아니었다.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는 때는 곧 오리라. 그때까지만 침묵을 지키면 된다. 설령 그로 인해 루비나드가 자신을 의심하고 오해하더라도.
모든 게 끝나면 분명.
커드닐은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 같은 감정을 손바닥으로 억누르며 그저 웃기만 했다.
그저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