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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 (36)화 (37/115)

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37)

봄맞이 연회가 시작되었다.

화사하게 꾸민, 아직은 앳된 티가 나는 귀족 영애들이 각기 파트너의 손을 잡고 나타났다. 그 얼굴에 담긴 감정 역시 만족, 불만, 체념, 떨림, 혐오 등 제각각이었다.

평소라면 데뷔탕트를 치르는 영애들이 중심이 되었을 연회였다.

하지만 오늘만은 달랐다. 연회의 이목이 온통 한 사람에게 쏠려 있었으니까.

“대단히 품격 있는 연회입니다, 국서 전하.”

“결혼식을 올린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 정도 규모의 연회를…. 역시 대단하십니다.”

“국서 전하께서 과일을 즐기신다 들어 희귀한 과일을 구해 왔습니다. 아직 제국에서는 몇 맛본 적 없는 과일인데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뭐랄까.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루비나드는 구역질이 올라오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제빌 때문은 아니었다. 주변 사람들 때문이지.

귀족이라는 것은 동화 속에 나오는 것과 달리 기회주의적이다. 제가 비벼 볼 만한 언덕이 나타나면 자존심도 긍지도 버리고 달려드는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제빌이 당하고 있으니 기가 찼다.

“하긴. 그대를 위해서는 좋은 일인가.”

작은 중얼거림은 누구의 귀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악단의 음악 소리에 묻혀 버렸으니까.

“여러분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더 오래 머물고 싶지만, 다음 일정 준비를 위해 잠시 폐하와 상의할 것이 있어 이만. 즐거운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저런. 내 핑계를 대고 빠져나오면 저들의 시선 역시 우리를 향하게 될 것 아닌가. 제빌치고는 보기 드문 실수로군.

루비나드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가 이내 오만한 미소를 띠었다. 귀족들에게 속내를 내보이면 뼛속까지 뜯어 먹힐 터. 진실 된 그녀의 모습도, 약한 모습도 절대 그들에겐 보여 줄 수 없었다.

“왜 하필 내 핑계를 댄 건가. 다들 우릴 쳐다보지 않나.”

제빌이 엷게 웃으며 루비나드의 옆에 앉았다.

물론, 일부러 이목을 끈 것이었다. 그녀의 곁에 자신이 있음을 만천하에 알리고 싶어서. 루비나드의 곁을 허락받은 건 아직까진 자신뿐이라는 걸 자랑하고 싶어서.

어디선가 보고 있을 그 남자에게도.

“싫으십니까?”

“으음. 그대를 위해서라면 참아 보기는 하겠지만, 귀족들의 탐색하는 듯한 시선은 썩 기분 좋은 게 아니라서. 저들은 내 속내를 낱낱이 파헤치려 들지 않나. 유쾌할 리가 없지.”

힐끗 귀족들을 바라본 그녀가 동경 어린 눈으로 자신을 보는 어린 영애들을 향해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 눈동자는 한없이 냉정했다.

“겉으로는 날 찬양하고 동경한다 떠들면서 뒤에서는 무슨 소릴 할지 누가 알겠어.”

론디아스와 다프넬의 사건을 겪으며 루비나드의 귀족 불신이 더 심해졌다. 제빌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 테이블 위의 쿠키에 시선을 주었다. 이날을 위해 특별히 황궁 요리사가 구운 것으로, 최고급 재료를 사용한 건 물론이고 연회를 즐기며 먹을 수 있도록 작고 예쁜 모양의 쿠키였다.

그걸 하나 집어 든 제빌이 루비나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폐하.”

“…음?”

루비나드가 고개를 갸웃했다. 사르르 흘러 떨어지는 머리카락이 하얀 제복 위를 물들였다.

제빌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루비나드의 입가에 쿠키를 내밀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하는 말씀은 이걸로 막아 두시지요.”

짓궂긴. 하지만 제빌의 말이 맞았다. 여기엔 듣는 귀가 너무 많았다. 바로 곁에 있는 제빌만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였지만, 귀족들의 귀는 토끼보다도 예민했다.

그 능력을 제발 나라를 위해 사용해 주면 좋을 텐데. 루비나드는 마음속으로만 구시렁거리며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먹여 드리겠습니다.”

“…뭐?”

제빌이 재빠르게 손을 치워 버렸다. 황당해서 쳐다보니, 돌아온 말이 저것이었다. 루비나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제빌은 흘끗 귀족들을 보더니 루비나드 쪽으로 상체를 기울여 속삭였다.

“다들 보고 있지 않습니까.”

“나도 잘 알고 있어. 그러니 더더욱 지금 그대의 말이 이해가 가질 않아. 나더러 지금 그대 손에 있는 걸 받아먹으라는 건가?”

“네.”

“…제빌 경, 그대 혹시 수면 부족으로 인해 이상해진 건 아니겠지?”

분명 어제는 푹 잤을 텐데.

제빌만을 위해 만들어진 침구는, 루비나드가 보기에도 꽤 훌륭하게 완성되어 있었다. 청금석 특유의 신묘한 색이 잘 묻어난 데다 금색의 자수도 잘 어울렸다. 아직 날이 쌀쌀해 두꺼운 이불부터 준비하라 일러 두었으니 충분히 편안했을 텐데.

“혹시 잠자리가 불편했나?”

“아니요. 다들 보고 있으니 조금은 사이좋은 모습을 보여 둘까 해서요.”

“…능력으로 뽑은 국서라 했으니, 너무 사이좋은 모습을 보이는 건 좀 그렇다고 말한 건 그대였네만.”

“국서와 황제가 사이좋은 게 무슨 흠이냐고 하신 건 폐하셨지요.”

사실 이럴 마음은 없었다. 제빌 역시 루비나드가 자신을 이상하게 여기는 건 내키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아까부터 제빌에게 말을 거는 척하면서 계속 루비나드를 흘끔거리던 젊은 귀족들이 신경 쓰였다. 지금도 제빌이 언제 일어나는지 살피며 루비나드를 열에 들뜬 눈으로 보고 있었다.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들이 쉬이 루비나드에게 접근하지 못할 무언가가.

그리고 그 남자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루비나드는 이미….

“그래도 이건 조금 도가 지나친 것 같은데.”

“이렇게 다들 바라보는데 폐하께서 드셔 주시지 않으면….”

제빌의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마치 비에 젖은 강아지 같다.

명백하게 그녀의 반응을 끌어내기 위해 연기를 한다는 게 보이는데도, 루비나드는 넘어가 줄 수밖에 없었다.

“정말이지…. 다시는 이런 짓 안 할 거야.”

“알고 있습니다.”

루비나드는 잠시 멈칫, 했다가 붉은 입술을 벌려 제빌의 손 쪽으로 다가왔다. 쿠키 대신 커다란 손 쪽에 시선이 흘렸다.

저 손으로 밤새 제 등을 토닥여 주었다. 루비나드는, 창피한 것도 잊고 그의 품속에서 잠들었었다. 다음 날 일어나 제빌을 보낸 후 제 머리를 얼마나 쥐어뜯었던지.

그래도 자신을 위해 그렇게까지 해 주었는데 피하면 미안할 것 같아 필사적으로 평정을 유지했다. 처음으로 제빌의 앞에서 연기를 했다.

그런 것도 모르고 이 남자는….

루비나드는 손가락에 닿지 않게 조심조심 입술로 쿠키를 물었다.

“…이런, 미안하네.”

주변의 수군거림이 거세졌다. 하지만 제빌의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쿠키의 크기가 너무 작은 탓에 살짝 손끝에 입술이 와 닿았다. 그제야 자신이 질투에 눈이 멀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를 깨달았다. 그는 재빨리 손을 떼어 제 입가를 가렸다.

열기가 오르면서 뺨이 화끈거려 왔다.

“…그, 그럼 저는 다음 악단이 잘 준비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허둥지둥 몸을 일으킨 제빌이 다급한 걸음으로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루비나드가 등받이에 기대 입술을 삐뚜름하게 올렸다.

해 달라는 대로 해 줬는데 왜 도망가는 걸까. 그런 제빌이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동시에 그녀에게 있어서도 다행인 일이었다. 당분간 제빌의 시야에서 벗어나 활동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녀는 ‘초대’한 남자를 만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확실히 조금 전의 광경이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귀족들은 수군거리면서도 쉬이 그녀에게 다가오지 못했다. 루비나드의 귀에 들리면 곤란한 말을 나누느라 바쁜 모양이었다.

멀찍이 떨어져 있으면서도 계속 곁눈질하는 시선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루비나드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런 그녀의 앞을 누군가가 막아섰다.

“그대는….”

감히 황제의 앞을 가로막은 이는, 반짝이는 금색 머리카락의 미남자였다.

루비나드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이 남자는, 피로연에서도 인사를 나눈 적이 있었다.

“황자.”

“좋은 아침입니다, 폐하. 이른 시간부터 부부 사이가 좋으시군요.”

능글능글 웃는 얼굴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누가 봐도 의례적이라 느낄 법한 가벼운 미소도, 그녀를 핥는 듯이 바라보는 뱀처럼 야비한 빨간색 눈동자도. 루비나드가 그리 좋아하지 않는 부류의 인간이었다.

그런데도 그녀가 그를 딱 잘라 낼 수 없었던 것은.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소.”

그가 로간 제국의 맞수이자, 이 대륙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제국. 악토그라토리아의 제2 황자였기 때문이었다.

결혼식 피로연이 끝난 후 귀국하지 않아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봄맞이 연회에까지 참여했을 줄이야. 분명 참여자 명단에는 이름이 올라 있지 않았는데.

“황자는 참석 명단에 보이지 않았던 것 같은데.”

“꽃놀이는 그리 좋아하지 않아서 말입니다. 그런데 폐하께서 참석하신다는 말을 듣고, 갑작스러운 사정이 생긴 다른 귀족의 이름으로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왜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루비나드의 안색이 희게 질렸다.

이 남자는 얼마 전 피로연에서도,

-여제라고 하시기에 좀 더 우락부락하고 강한 인상이실 거라 상상했는데.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른, 엄청난 미녀가 나와서 놀랐습니다.

-폐하께서는 어떤 남자 상이 취향이십니까?

-저는….

루비나드를 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어 보이던 눈빛을 떠올리면 소름이 돋는다. 에브니겔 황자가 난봉꾼이라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대놓고 로간 제국의 황제에게 추파를 던질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것도 결혼식 피로연에서.

옆에 서 있던 제빌이 드물게도 불쾌한 듯 살짝 눈썹을 찌푸렸으나 둔한 건지 신경 쓰지 않는 건지 남자는 한참이나 루비나드에게 질척거리다 떠났다.

오라버니를 오랜만에 본 감회에 사실 다른 건 그리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남자는 불쾌함으로 가득 찬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그런가. 황자도….”

에브니겔은 마무리 인사를 하려는 루비나드의 손을 덥석 잡아 제 입으로 끌었다. 불의의 기습 같은 행동에 그녀가 순간 힘을 주고 버티자, 그가 놀란 얼굴로 루비나드의 손과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폐하께서는… 생각보다 힘이 세시군요.”

“레이디 취급에는 익숙지 않소. 내게는 이런 인사보다는, 이쪽이 더 어울리겠지.”

루비나드는 잡힌 손을 빼서 황자에게 내밀었다. 악수를 청하는 그 모양새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에브니겔이 홀린 듯한 얼굴로 그 손을 맞잡았다.

“만나서 반가웠소, 황자. 즐겁게 보내다 가시게.”

아까 끝내지 못한 인사를 맺은 루비나드가 휙 몸을 돌려 연회장 밖으로 나섰다.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에브니겔이 문득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재미있는데.”

붉은 눈동자가 즐겁다는 듯 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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