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36)
루비나드는 몇 번이나 베카르티 백작가에 서신을 보냈다.
주로 엔도르빌을 만나러 방문해도 되겠냐는, 허가를 구하는 내용의 서신이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긍정의 대답이 온 적은 없었다.
처음에는 아직 여독이 채 풀리지 않아 어렵겠다고 했고, 그다음에는 감기에 걸렸다고 했다. 며칠 건강을 회복한 뒤 서신을 보내겠다고 해 놓고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초조해져서 다시 재촉하는 서신을 보냈더니 이미 솔라탄에 돌아갔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 저하께서는 죄인의 몸으로 다시 황궁에 발을 들일 순 없다.
제가 다시 폐하를 뵙는 날은 그럴 만한 일이 있을 때가 될 것이라는
말을 남기시고 떠나셨습니다. 』
몇 번을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었다.
그럴 만한 일이라니. 오라버니는 대체 무슨 일을 꾸미는 것일까. 순간 비아냥 가득한 웃음을 짓던 론디아스의 얼굴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아니, 설마. 둘째 오라버니는 첫째 오라버니랑은 다르다. 다른 사람이다.
어릴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럴 터. 괜한 기우라며 스스로를 달랬지만 이미 한 번 끓어오른 의심과 걱정은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오라버니를 배웅한 후, 창가에 서서 가는 모습을 지켜보다 발견한 ‘그 남자’의 모습이 손끝에 생긴 거스러미처럼 계속 신경 쓰였다.
“저하께서 이미 솔라탄에….”
제빌에게도 엔도르빌의 소식을 전했다. 그는 무언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침묵하더니 이내 생글 미소 지었다.
“저하께서는 여전히 폐하를 많이 사랑하시나 봅니다. 정말로 결혼식을 축하해 주기 위해 오신 듯하군요.”
“아니, 하지만….”
제빌은 정말로 느끼지 못한 걸까? 엔도르빌이 내비치던 그 적의를.
떠오르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의 적의였다. 물론, 그게 엔도르빌이었기에 더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건 있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엔도르빌은 아버지보다도 제빌보다도 그리운 존재였기에.
오랜만에 본 오라버니는 광기에 잠식되어 있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자신에게 적의를 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폐하. 주제넘은 일인 것은 알고 있으나, 사람을 시켜 알아보았습니다. 저하께서는 정말로 한동안 몸이 아파 움직이지 못하셨다고 합니다. 오랜 유폐 생활이 건강에 좋지 않았겠지요. 특히 솔라탄은 북쪽이라 추위가 기승을 떨치는 곳이니.”
그런가.
제빌이 가지고 오는 정보는 모두 믿을 만했다. 게다가 론디아스의 사건 때도 정확한 정보를 가져오지 않았던가. 루비나드가 엔도르빌을 생각하는 마음의 편린이야 그도 알고 있을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짓을 고하진 않을 터였다.
제빌만큼은 절대로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테니.
“그대가 그렇다면… 믿겠네.”
제빌은 깊게 고개를 숙이고, 다시 서류 작업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엔도르빌이 방문한 사건은 해결되었다고 치더라도, 또 하나 신경 쓰이는 일이 있었다.
“폐하. 실례지만 문장을 하나 확인해 주실 수 있을지요. 상회에서 새로 갱신하여 보낸 계약서인데 아무래도 이 단어가 신경 쓰입니다.”
제빌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워졌다. 둔하디둔한 그녀도 알아챌 정도로.
애초에 제빌은 무슨 문제가 생기더라도 그녀의 근처에 잘 다가오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점 하나만 잘못 찍혀도 곧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루비나드의 바로 곁에 서서 보고하곤 했다. 그때마다 피어오르는 향기에 그날 밤이 떠올랐다.
결혼식을 올렸던 그 밤. 걱정되어 온 그를 매도하고 원망했던 그 밤.
제빌의 품은 단단하고 따스했다. 거기에 얼굴을 묻은 채 숨을 깊게 들이마시면 제빌의 향기가 콧속 가득 밀려들었다. 이토록 달콤한 향기였던가. 새삼스럽게 그런 생각을 했다.
그날을 떠올리면 반사적으로 얼굴이 붉어지곤 했다. 이유도 모르는 채.
“제빌 경.”
“네, 폐하.”
“…부탁이니 제발 조금만 떨어져 주면 안 되겠나?”
“왜 그러십니까?”
눈치도 빠른 남자가 이럴 땐 둔했다. 둔한 척하는 건지 진짜로 둔한 건지.
하긴, 둔한 척할 이유는 없으니 진짜로 둔한 거겠지. 확실히 연애 경험이 없는 티가 났다. 루비나드는 변명할 말을 떠올리다 입술을 삐뚜름하게 일그러뜨렸다.
“부담스러워.”
“네?”
“그대가 너무 가까이 오면 부담스럽다고.”
언젠가 제빌이 했던 말이었다. 루비나드가 너무 가까이 가면 다들 부담스러워한다고.
그게 떠올라서 내뱉은 말에 제빌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폐하께서는….”
“음?”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정도 떨어지면 되겠습니까?”
거의 닿을 것처럼 바짝 다가왔던 그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여전히 콧속을 간질이는 향기는 여전했지만, 쿵쿵 뛰는 심장 소리 정도는 숨길 수 있는 거리. 너무 물러나라 하는 건 그에게 상처가 될 것 같아 루비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류에 집중해야지. 제빌이 펜으로 표시해 둔 문장을 읽고 으음, 하는 소리를 내며 고뇌하던 그녀가 이내 웃으며 펜을 들었다.
“말장난이로군. 원래 이 부분은 합의라고 되어 있었어. 그런데 협의라고 기재해서 장난을 치려 한 모양이야. 여기와 주로 거래하는 물품이 뭐지?”
“페이로무 상단이군요. 주로 철물입니다. 무기 외에 생활에 필요한 철물을 공급받고 있습니다.”
“대체할 수 있는 곳은 없나?”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제빌이 계약서를 들고 제 자리로 향했다. 그제야 루비나드는 깊게 숨을 쉴 수 있었다.
하지만 잔향이라고 하던가. 그가 서 있던 자리에 남은 향이 끈질기게도 그녀의 후각을 사로잡으며 제 존재를 들이밀었다.
게다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인가.”
“체스는 좋아하십니까, 폐하?”
“좋아는 하지. 그런데 그걸 꼭 이 한밤중에 해야 하겠나? 그것도 하필 내 방에서.”
매일 밤 제빌은 루비나드의 방을 찾아왔다. 매번 이유도 다양했다.
보드게임을 하자, 차를 마시자, 희귀한 다과가 손에 들어왔다, 결재를 올릴지 말지 고민되는 사업 계획안이 있다 등등.
그때마다 피곤하다고 내쫓았으나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침대에 자리 잡고 앉아 꿈쩍도 하지 않는 그와 실랑이를 하다가 피곤한 나머지 까무룩 잠든 적이 몇 번인지.
“이 시간이 아니면 폐하와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없지 않습니까. 저는 저대로 바쁘고, 폐하는 폐하대로 바쁘시니. 그렇다고 집무실에서 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건, 맞았다.
연회가 바로 내일이었다. 아직 머리가 젖어 있는 걸 보니 조금 전까지 연회장의 마무리를 지켜보고 온 모양이었다. 늦게까지 일했으면 얼른 자면 될 텐데.
“피곤하지 않나?”
“피곤합니다.”
“그럼 쉬는 게….”
매정하게 내치려고 해도 청회색 눈동자로 매달리듯 바라보면 말문이 막힌다. 분명 담담하고 냉철한 눈동자였는데. 언제부터 저런 눈동자를 하게 된 것일까.
어영부영 휘말려 정신을 차려 보니 게임판 위의 체스 말을 옮기고 있었다.
“…난 정말 그대를 모르겠어.”
“체크 메이트. 제 수를 읽기가 힘드신 모양이군요.”
“아니, 그게 아니라. 그렇게 피곤하면 쉬면 될 텐데 왜 밤마다 내 방에 오는 건지를 모르겠어.”
직설적으로 물으면, 애매한 미소가 되돌아왔다. 차라리 속 시원하게 이유를 말해 주면 이토록 답답하지는 않으련만.
“이제 끝났으니 그대는….”
“확실히 시간이 너무 늦었군요. 자는 게 좋겠습니다.”
“설마 오늘도….”
“네. 자고 가려고 합니다.”
게다가 놀다 가는 건 그렇다고 쳐도 왜 자고 가는 건지는 정말로 이해가 가질 않았다.
두 사람이 진짜 부부라서 밤의 의무를 다하는 것도 아니다.
원래 루비나드 혼자 쓰던 침대이긴 하지만, 황제의 침대. 크기가 꽤 커서 둘이 나란히 눕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가벼운 포옹 외의 스킨십은 없었다. 그저 자신을 끌어안고 잠을 청할 뿐이었다.
그런데 대체 왜?
“이제는 폐하를 안고 자지 않으면 잠이 오질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제빌의 눈가는 나날이 퀭해지고 있었다. 심지어 가끔, 그가 검토해 준 서류에 서명하다 고개를 들면 꾸벅꾸벅 졸고 있기까지 했다.
대체 왜 이러는 걸까.
“제빌 경.”
“네.”
“이러다간 그대가 쓰러질 것 같아 겁이 나네. 심지어 내일은 그대가 주최하는 첫 연회 아닌가. 그러니 그만 돌아가서 쉬도록 해.”
“저는….”
고집스럽게 말을 잇는 제빌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그만하라는 뜻이었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폭 쉬더니 미련이 남은 얼굴로 침대를 바라보았다. 누가 보면 버려지기라도 하는 줄 알겠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하지만 오늘은 그를 돌려보낸 후 꼭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제빌에게는 차마 보일 수 없는.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은 루비나드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대, 여기서 자고 가면 한숨도 못 자는 것 같던데.”
“오해십니다.”
오해는 무슨.
제빌의 체온이 높은 덕인지 그와 침대를 함께 쓰고 난 후, 루비나드는 푹 자고 일어나는 경우가 많아졌다. 하지만 그녀가 몇 시에 일어나도 제빌은 물끄러미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곤 했다.
제대로 잠을 자고 있다면 그럴 수는 없으리라.
“…오늘은 절대 안 되네. 이러다 정말 큰일 날 것 같아.”
루비나드가 제빌의 눈가를 손으로 쓸었다. 언젠가, 제빌이 귀빈실에서 지내던 때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소파에 앉은 채 한숨도 자지 못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던 제빌.
혹시.
“불편해서 그런가?”
“네?”
제빌이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생각해 보면 제빌에게 자신은, 아내였던 기간보다 주인이었던 기간이 더 길었다. 그러니 같은 침대에서 잠을 청한다는 것 자체가 불편할지도 몰랐다.
아니, 그렇다면 본인 침대에 가서 자면 될 텐데.
그렇게 루비나드의 생각은 미로에서 헤매는 것처럼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곤 했다. 대체 제빌이 왜 이러는 것일까, 하는 가장 최초의 의문으로.
“불편해서 잠들지 못하는 거라면 굳이 내 곁에 있을 필요는 없어. 아.”
아니면.
어쩌면 제빌은 아직도 루비나드가 마음을 다잡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밤마다 곁을 지켜 주는 것일지도.
그 마음은 고맙지만, 루비나드는 그렇게까지 약하지 않았다.
“아직도 내가 침울해 있을까 봐 걱정해 주는 건가? 그런 거라면….”
이제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게. 그렇게 말하려는 루비나드의 귓가에 제빌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이것도 아닌가?
그럼 대체 왜.
또 처음의 의문으로 되돌아간다.
“폐하.”
“음?”
“확실히 폐하의 말씀대로 내일은 중요한 날이니 제 방으로 가 보겠습니다.”
오, 드디어.
루비나드는 고개를 끄덕이곤 냉큼 제 침대로 가서 앉았다. 빨리 가라는 듯한 그녀의 태도에 제빌이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으음. 그대도 잘 쉬도록.”
바스락바스락 이불 속을 파고드는 시늉을 하는 그녀에게 제빌이 심술궂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 또 오겠습니다.”
“…응?”
놀라 고개를 든 루비나드에게, 제빌은 첫날 밤 보았던 그 요염한 미소를 띠어 보이곤 밖으로 나가 버렸다. 홀로 남은 루비나드는 황당하다는 듯 닫힌 방문을 바라보다 덮은 이불에 몸을 맡기는 대신 책상으로 향했다.
내일 연회에서 꼭 만나야 할 이에게 보낼 초대장을 작성해 봉투에 넣어 두었다. 제빌이 보지 못하도록 봉인까지 해서. 내일 시종장인 클라렌에게 부탁하면 잘 전달해 주리라.
해야 할 일을 마친 루비나드는 겨우 침대 위에 몸을 뉘었다.
왜일까.
황제에 즉위한 후 삼 년이라는 시간 동안 계속 쓴 침대였다. 침구 역시도. 그런데 오늘따라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방이 추워서 그런 걸까. 분명 보온이 잘되는 침구였는데.
왠지 모를 쌀쌀함을 느끼며 루비나드는 이불을 끌어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