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35)
이제 막 결혼식이 끝났을 뿐인데 연회장은 다시 분주해졌다.
곧 있을 봄맞이 연회의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매년 4월 초, 황궁 앞 정원 가득 피어난 벚꽃을 보며 연회를 치르곤 했다. 이 자리는 그해에 데뷔탕트를 치르는 영애들이 사교계에 첫선을 보이는 무대가 되기도 했다.
결혼식이 끝나기 무섭게 치러져야 하는 연회라 제빌은 미리부터 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전하, 희망하신 것과 다른 게 있으십니까?”
“없습니다. 지금 그대로 진행해 주십시오. 아, 정원에 놓을 테이블은 준비되었습니까?”
“일정 물량 공수하였으나, 아직 전체 물량이 다 완성되진 않았습니다. 그래도 연회 때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기한을 맞출 터이니 믿어 주십시오.”
제빌은 고개를 끄덕였다. 붉은 천으로 꾸며졌던 연회장 테이블들은, 이제 연한 분홍빛이 도는 천으로 옷을 바꿔 입었다. 거기에 맞게 새로운 꽃병 역시 준비되었다.
“꽃 장식의 견본은 언제쯤 볼 수 있습니까?”
“이번에는 꽃의 종류에 상관없이 다채롭고 화사한 장식을 말씀하셔서 여러 견본을 준비해 보았습니다. 오늘 오후쯤에 보실 수 있으실 듯한데.”
“오늘은 좀 곤란하네.”
제빌과 상인과의 대화에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물론, 제빌이 잘 알고 있는 목소리였다.
“폐하.”
“제국의 태양, 영원한 영광을 뵙습니다.”
루비나드가 연회장을 둘러보았다. 결혼식을 위해 준비했던 장식은 모두 자취를 감추고, 새로운 장식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겨우 어제 있었던 일인데 어딘지 멀게 느껴졌다.
“조금 아깝기도 하군. 저렇게 꾸미는 데 꽤 많은 돈이 들었는데.”
“결혼식엔 어울리지만, 꽃놀이를 즐기는 연회에는 어울리지 않는 장식이니까요. 아까워도 과감히 떼어 내셔야 합니다.”
“알고 있어.”
부루퉁한 얼굴은, 어제 엔도르빌을 막 배웅했을 때보다는 혈색이 훨씬 나아져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창백한 기가 남아 있었다.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던 제빌이 슥, 하얀 뺨을 쓸어 올렸다.
“뭐, 뭔가.”
깜짝 놀란 루비나드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경계하는 눈초리가 어찌나 귀여운지. 제빌은 엷게 웃으며 답했다.
“뺨에 침 자국이.”
“무슨! 제대로 씻어 냈는데!”
“그럼 제가 잘못 봤나 봅니다.”
시치미를 딱 떼자 루비나드가 슬금 한 발 더 뒤로 물러섰다. 난감하다는 듯, 시선을 두 사람에게 주지도 못한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상인을 본 후에야 루비나드는 이 자리에 있는 게 두 사람만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수치스러운 모습은 아니었지만 보여서 썩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루비나드의 얼굴이 살짝 상기되었다.
“흐, 흐흠. 그보다 국서, 잠시 시간 되나?”
“네?”
“아직 많이 바쁜가?”
“무엇 때문에 그러십니까? 뭔가 일이라도….”
루비나드가 지금 제빌을 부를 일이 뭐가 있지? 설마 어젯밤 일이 불쾌했다고, 다시는 그러지 말라는 말이라도 하려는 건가. 하지만 그렇다기엔 그녀의 표정이 뭔가….
지금의 제빌이 가진 정보로는 가늠할 수가 없었다. 혼란스러워하는 제빌에게 루비나드가 엷게 웃어 보였다.
“그런 건 아니네. 대강 마무리되었으면 나머지는 살레인에게 맡기고 잠시 나와 이야기 좀 하지 않겠나.”
살레인의 안목은 믿을 수 있긴 했다.
다만 제빌에게 있어서도 이 연회가 데뷔탕트 같은 것이었다. 부관으로서 연회는 여러 번 개최해 봤지만, 국서로서는 처음으로 개최하는 연회였으니까.
그런 중요한 행사인 만큼 제 눈으로 모든 걸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건 루비나드였다. 그녀가 부르는데 어찌 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제빌은, 그제야 루비나드의 뒤에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살레인을 발견했다. 그녀에게 가볍게 묵례하자 그것만으로도 제빌의 의중을 읽어 낸 시녀장이 더 깊게 허리를 숙였다.
“이야기 도중 미안했네. 나머지는 시녀장과 이야기하도록.”
“알겠습니다, 폐하.”
루비나드가 먼저 앞장섰다. 제빌은 습관적으로 그 뒤를 따랐다.
별다를 것 없는, 평소와 같은 행동. 하지만 이제는 달라져야만 했다. 그걸 루비나드도 절절히 깨달은 참이었다.
그에게 국서의 의무가 있다면, 자신에게도 황제의 의무가 있는 것일 테니.
“왜 뒤에 서는 건가?”
“아.”
그제야 제 실수를 눈치챈 제빌이 쓰게 웃었다. 연회 준비로 머리가 가득 차 무의식중에 습관대로 행동했다. 제빌이 그녀의 곁에 서기도 전에 루비나드가 그의 팔을 끌었다.
“이제 국서가 되었으니 내 곁에 서야지.”
아아. 이런 날이 올 거라곤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사실, 아직도 실감이 나질 않았다.
그제까지, 밤에 잠들 때면 이 현실에서 깨어날까 두려웠다. 사실은 이 모든 게 꿈이고 현실에서는 여전히 작은 소년인 채로 홀로 제 방에서 떨고 있는 게 아닐까. 제게 닥치는 그 모든 비난에 맞설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두려워 울고만 있던 어린 소년인 것이.
아침에 눈을 뜨면 지난 기억이 꿈이 아닌가 의심하느라 바빴다.
어젯밤 제 품에 안긴 붉은 머리카락을 보며 처음으로 안도했다. 결혼식이 끝났고, 신의 앞에서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음을 선포했다. 온 나라가 그들의 성혼 선포를 들었다.
루비나드는 신과 제국민들의 앞에서 그의 아내가 되었다.
그리고 이젠 놓아 줄 생각이 없었다.
“피곤하지?”
문득 들린, 격의 없는 말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연회장 안에서 일하는 이들은 특별히 쿠온 가문에서 데려온 제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루비나드에게 그런 장난도 칠 수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밖은 다르다. 어젯밤의 피로연을 끝까지 즐기고 며칠 밤 더 묵다 가겠다는 내빈이 많았다. 몇몇은 벚꽃에 흥미를 보이며 봄맞이 연회에의 참여 의사까지 밝혔다.
그들 앞에서도 이런 모습을 보이면 황제의 위엄에 누가 될지도 모른다.
“폐하.”
“알고 있어. 그래도… 그대와 나 사이 아닌가. 누가 듣더라도 조금 흉이나 보고 말지 않겠어?”
뒤돌아보며 씩 웃는 얼굴이 사랑스러워 말문이 막혔다. 루비나드는 다시 앞을 보며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따라 한참 걷다 보니 어느새 또 후원의 꽃향기 속에 파묻혀 있었다.
왜 또 여기에 오신 걸까. 또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걸까. 문득 지난번에 왔을 때가 떠올랐다.
커드닐과 만났던 그날 밤 말고, 그 전. 루비나드의 앞에서 추태를 보였었던 날이. 오늘은 그런 모습을 보여선 안 될 텐데. 그런 생각을 하는 제빌의 머릿속에 과거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저하께서는 제가 강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형들의 괴롭힘에서 제빌을 구해 줬던 루비나드.
그녀에게 제빌은, 그렇게 물었었다.
조금은 긍정해 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있었다. 설령 입에 발린 말이라도 좋으니 누군가에게 그렇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유일하게 그를 긍정해 준 루비나드라면 어쩌면….
그 바람에 루비나드는.
-그걸 내가 어찌 알겠어?
씩 웃으며 그리 대답했었다.
황당했다.
나는 미물일 뿐이라며 자학하는 제빌에게, 그녀는 확신을 주지 않았다. 그럴 거라면 왜 제빌 스스로가 강해져야 한다는 말을 한 걸까.
어이가 없어서 대답조차 하지 못하는데, 루비나드가 멋대로 말을 이었다.
-씨앗을 보고 어찌 자랄지 누가 장담할 수 있단 말인가. 그대 역시 어찌 성장할지 누구도 모르지. 다만, 그렇기에….
환한 미소를 여전히 기억한다.
그 전에도, 루비나드는 그에게 있어 태양 같은 존재였다. 처음 만났던 그 순간부터 계속.
하지만 그날 루비나드는, 제빌에게 ‘태양’ 그 자체가 되었다.
-기대되지 않나? 그대가 어떻게 성장할지.
제빌은 언제나 무시당하고 천대받는 존재였다.
그에게 기대를 품어 주는 이도, 애정을 가져 주는 이도 없었다.
루비나드는 그에게 결핍되어 있던 모든 것을 주었다.
아아, 나는 당신의 곁에 설 수 있는 남자가 되고 싶다. 언젠가 당신이 날 소개하면서 ‘내 오랜 친우이자 가장 믿을 수 있는’ 자라고 소개해 주었으면 좋겠다.
모두가 당신과 날 보며 잘 어울린다고 말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찌꺼기도, 미물도, 검 하나 휘두를 줄 모르는 계집 같은 놈도 아니고 당신의 곁에 서기에 어울리는 남자라고 말해 주면….
-혹시 모르지. 그대가 나보다 더 멋지게 성장해서, 오히려 그대를 보고, 그대의 친우인 내가 더 인정받을지도. 저 제빌 경의 친우라니, 틀림없이 멋진 분이실 거야! 라고.
그런 날이 온다면….
아니, 그런 날은 오지 않는다.
제빌은 루비나드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었다.
왜냐면…, 제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따라갈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루비나드의 발끝에도 미칠 수가 없다는 것을. 그렇기에 발버둥 쳐야만 했다.
이 보잘것없는 미물에게는 그 길밖에 없었다.
그녀의 곁에 서기 위해서는.
“자, 앉지.”
언제나의 벤치 앞에 서서 씩 웃은 루비나드가 먼저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 톡톡, 제 옆자리를 두드렸다.
제빌이 순순히 옆에 앉자 루비나드가 엷게 웃으며 말했다.
“그대가 지친 것 같아서 말이야. 조금쯤 바람을 쐬어 줘야 또 힘내서 일할 게 아닌가.”
지쳤나? 조금 그럴지도 모른다.
아니, 당신이 그렇다고 말하면 틀림없이 그런 거겠지.
제빌은 마주 웃어 보이며 답했다.
“좋은 기분 전환이 되겠군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어젯밤의 일이 쑥스러운 것이다, 루비나드는.
그녀를 걱정해 밤에 찾아와 준 제빌이 고맙기도 했을 테고, 그의 진심 섞인 장난을 매도한 게 미안하기도 했을 것이다. 큰 식을 치르고 나서 쉬지도 못한 채 바로 다음 연회를 준비하는 그가 안쓰럽기도 했을 테고.
그래서 제빌에게 조금이라도 휴식을 주고 싶어서 찾아왔다. 어젯밤, 제빌이 그녀에게 그랬듯이.
그 마음이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으음. 올해는 날씨가 좋아서 꽃이 조금 일찍 피었어. 그대에게도 꼭 보여 주고 싶었네.”
피어 있는 꽃 속에서, 가장 아름답게 핀 것은 다름 아닌 루비나드였다.
그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제빌이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폐하.”
“음?”
“저는… 강해졌습니까?”
루비나드는 그날의 대화를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 리본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걸 알면서도 제빌은 대답을 기다렸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놀란 듯 휘둥그런 눈으로 제빌을 바라보던 루비나드는….
“…….”
장난기 가득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거기에 담긴 대답은 무엇이었을까. 루비나드에 대해서라면 뭐든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제빌조차 확답하기 어려웠다. 다만 그 눈동자에 담긴 것이 부정은 아닐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어디선가 산들산들 꽃향기가 피어올랐다.
봄의 향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