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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 (32)화 (33/115)

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33)

엔도르빌 디 테비시안은 제2 황자로, 제 형인 론디아스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유약하다. 제1 황자 아래에서 기를 못 편다. 심약하다.

체격이 나빠서는 아니었다. 조금 마르긴 했지만, 키도 크고 뼈대도 굵은 편이었으니까. 다만 형과 성격이 정반대였다.

루비나드를 대하는 태도도 그랬다. 질투하고 미워하는 론디아스와 달리 엔도르빌은 언제나 어린 누이동생에게 상냥한 사람이었다.

-안녕, 루비나드. 오늘은 날씨가 정말 좋구나. 오빠랑 같이 후원에 갈까?

-무슨 일이니. 표정이 좋지 않은데. 오빠한테 말해 볼래?

-형은 아버지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받아서, 그 기대를 채우지 못해서 텅 비어 버린 사람이야.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네가 부러워서 그러시는 거야. 그러니 너무 상처받지 마.

다른 이들은 엔도르빌을 약하다고 했지만, 루비나드는 그를 다정하다 칭했다. 사려 깊고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사람.

루비나드에게는 없는 것을 가진 사람이었다.

론디아스가 폐위되고 엔도르빌이 황태자의 자리에 올랐을 때, 어떤 면에서는 다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와는 생각이 전혀 다른 첫째 오라버니와 달리 엔도르빌은 분명 내정을 안정시키는 걸 우선시해 줄 것이라 믿으며.

희대의 성군이 되리라 믿었다.

하지만.

-너희들도 내가 우스우냐? 감히, 감히 제국의 황태자를 조롱해?

-당장 다른 것으로 가져와라. 내 명령을 듣지 못하겠다는 뜻이냐?

-이런 빌어먹을! 또 나를 우롱해! 또!

왜일까.

엔도르빌은 황태자의 자리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이상해졌다. 론디아스처럼.

온화한 미소가 가득하던 얼굴은 악귀의 것처럼 살기가 가득했고, 입가에서는 비아냥과 망상만이 흘러나오게 되었다. 누구도 웃지 않았는데 그를 비웃었다며 광분하기 일쑤였고 변덕이 죽을 끓었다.

론디아스보다 더 포악해지는 성미에 사용인들이 하나둘 병이나 가정 사정을 핑계로 사직서를 내기 시작했다.

그래도 루비나드는 엔도르빌을 믿었다. 아마도 갑자기 떠맡은 황태자라는 자리가 너무 무거워서 그런 것이리라. 마음 따스하고 정이 깊은 오라버니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자리라 그런 것이리라.

그 자리에 익숙해지면 괜찮아질 것이라 믿었다.

왜냐면 그녀에게는 여전히….

-루비나드. 내가 이상해지는 것 같아. 자꾸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구나.

-아무도 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는데 내 귀에는 들린단다. 나를 욕하고 깔보고 멸시하는 소리가. 왜일까, 루비나드. 왜일까.

-네 귀에는 들리지 않니? 날 비웃는 저 소리가.

엔도르빌은 미쳐서도 루비나드만큼은 믿었다.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진정하시라고,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하면 잠시나마 흥분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그렇게 위태로운 시간이 흘러갔다.

엔도르빌이 황태자의 자리에 오른 지 석 달이 지난 어느 날. 루비나드가 잠시 역사 수업을 위해 황궁 밖으로 나간 사이 엔도르빌은….

-저하.

아직도 하얗게 질렸던 제빌의 얼굴이 생생하다. 그는 채 뱉을 수 없는 말이라는 듯 한참을 망설이다가 루비나드에게 말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시중들던 이를 몇이나 해하셨다고….

루비나드는 곧바로 수업을 중단하고 황궁으로 향했다. 일이 벌어진 지 며칠이 지난 후에 도착했는데도, 엔도르빌의 방에서는 여전히 피 냄새가 났다.

그는 멍하니 소파에 앉아 있다가 루비나드를 보자 눈을 반짝였다.

-루비나드.

겨우 며칠이었다. 성도 변방에 대해 실제로 그 눈으로 보고 역사 속 사실에 관한 공부를 하기 위해 겨우 며칠 자리를 비웠을 뿐이었다.

그사이 오라버니는… 완전히 광기에 잠식당해 있었다.

-오라버니,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어요.

-이제… 이제 너까지도 날 속이는구나! 이토록 선명하게 들리는데 왜 네게는 들리지 않는단 말이냐?

한 번 미쳐 버린 엔도르빌은 좀체 제정신으로 돌아오질 않았다. 심지어 만에 하나의 사태를 방지하고자 루비나드가 사용인들을 모두 내보낸 상황에서도 엔도르빌은 소리가 들린다고 말했다.

방에는 그와 루비나드밖에 없었는데도.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는 루비나드만큼은 해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자리를 비우기만 하면 또다시 칼을 휘두르고 마법을 사용했다.

그 이야기는 선황인 데거베일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는 황실 주치의를 보내 엔도르빌의 상태를 살피게 했지만, 원인은 알아내지 못했다. 그렇게 또 몇 달이 지나고 그 일이 벌어졌다.

-꺄아아아아아!

-사, 살인마!

-미친놈이 광장에서 검을 들고 날뛰고 있다!

조금이라도 좋으니 기분 전환이 되었으면 했다. 그래서 선황은 그를 한적한 호숫가 곁 별장으로 보내라고 했다.

동선도 철저하게 구상해 두었다. 사람들이 많은 거리는 피했고, 호위 기사가 여럿 붙어 일반인들에게 해를 가하지 못하게 했다. 주치의의 의견에 따라 혹시 모를 사태를 위해 마차 문에도 자물쇠를 달았다.

말이 휴양이지 사실상 유폐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제1 황자가 불상사를 일으켜 폐위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심지어 제2 황자는 평소 유약하긴 하나 온화하고 정이 많은 이라며 놀림인지 칭송인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들었던 터였다.

마음의 병 때문에 갑자기 거칠어진 것이라면 치료에 최선을 다해 본래의 온화한 모습을 되찾으면 된다. 물론 루비나드 역시 그와 함께 지낼 생각이었다. 그나마 곁에 있을 수 있는 건 루비나드뿐이었으니까.

-뭐? 벌써 출발하셨다고?

그런데 왜일까. 엔도르빌은 그날따라 예정보다 세 시간이나 일찍 움직였다. 뒤늦게 부랴부랴 준비를 마친 루비나드가 뒤를 따랐지만, 호숫가에 다다르도록 마주칠 수가 없었다.

그야 그랬겠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일이 또 발생했으니까.

그의 마차가 정해 두었던 루트를 벗어나 성도 한가운데, 가장 사람이 많은 거리로 향했던 것이다.

나중에 마부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엔도르빌 자신이 명한 것이라고 했다. 사람 소리가 듣고 싶으니 광장으로 가자고 했다고. 황태자 전하의 명이니 감히 어길 수 없었다고, 자신도 목숨을 부지하고 싶었다고 울면서 이야기했다.

어찌 그를 탓할 수 있을까.

엔도르빌은 가장 번화한 거리 한가운데서 살육전을 벌였다. 무방비 상태의 제국민들을 학살했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다만, 혼자서 무기를 지닌 채로.

그런 사건을 저지른 이를 황태자의 자리에 둘 순 없었다. 데거베일은 한탄을 내뱉고 그를 폐위시켰다.

-황태자, 엔도르빌 디 테비시안의 직위를 빼앗고 솔라탄에 유폐한다.

솔라탄은 사람이 거의 없는 무인 지대였다. 과거에는 한 백작가의 직할령이었으나, 전화에 휩싸여 마을 전체가 불타 사라졌다. 그 후로 누구도 거기에 살려 하지 않았다.

엔도르빌은 그 무인 지대에 갇혔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론디아스도, 엔도르빌도. 왜 황태자라는 미래가 보장된 자리에 앉아 그런 사건들을 벌인 것일까. 자리가 사람을 변하게 만든 걸까? 그렇다면….

한 번 아닌 건 냉정하게 끊어 내던 루비나드가 끊어 내지 못한 것.

마음 한구석에, 온기를 머금은 채 계속 남아 있던 어린 시절의 기억.

비록 후드를 뒤집어쓰고 로브로 몸을 가리고 있어 누군지 가늠조차 어려웠지만, 그 눈동자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 온화하고 따스한 기억 속 그대로의 보라색 눈동자만 보아도.

“…오라버니.”

엔도르빌의, 온화하고 부드러운 보라색 눈동자가 싱긋 휘어졌다.

“…지금은 안 됩니다, 폐하. 나중에 이야기를 나누시지요.”

모두의 이목이 루비나드와 제빌에게 쏠려 있었다. 지금 다가갔다간 후드 속의 인물에게도 관심이 집중될 터였다.

그렇게 되면 그 ‘광인 폐태자’가 성도에 돌아왔다는 걸 모두가 알게 된다.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알고 있네. 알고 있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루비나드는 축하의 말조차 흘려들으며 계속 엔도르빌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쌍의 보라색 눈동자가 한참이나 무언의 대화를 나누었다.

곁에 있는 베카르티도, 그리고 이 자리에 있어선 안 될 사내의 모습도 보지 못한 채.

* * *

“잘 지냈니, 루비나드.”

피로연조차 끝난 시각. 루비나드는 방으로 향하는 대신 소알현실로 향했다. 거기엔 평소의 옷차림으로 갈아입은 제빌과 평소보다 조금 화려하게 차려입은 베카르티, 그리고 엔도르빌이 있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오라버니.”

엔도르빌의 눈동자가 흘끗 제빌을 향했다.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그를 묘한 미소를 띤 채 바라보던 엔도르빌이 다시 루비나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물론이지. 네 남편이 잘 돌봐 준 덕분에 많이 나아졌단다. 너는… 더 예뻐졌구나.”

잠시 멍한 얼굴로 엔도르빌을 바라보던 루비나드가 생글 웃었다.

어딘지 지어 낸 것 같은 웃음이었다.

“오라버니께서는 늘 제게 예쁘다, 사랑스럽다고 말해 주곤 하셨지요. 이제는 그런 말이 어울리지 않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내게 너는 언제나 사랑스럽고 예쁜 누이동생이란다. 언제나 말이야.”

루비나드는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흠칫 몸을 떨었다. 정처 없이 떠돌던 눈동자가 제빌에게로 향했다.

생긋 미소 짓는 청회색 눈동자가 그녀의 마음을 다독였다.

“…베카르티 교수와 아는 사이이신 줄은 몰랐습니다.”

“마탑에서 공부할 때 알게 된 사이야. 벌써 이십 년도 전의 이야기지. 무뚝뚝하고 예의가 없는 친우라 네게 실례되는 말을 하진 않았을지 걱정이구나.”

“능력 있는 자는 대우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리고 사실, 예법에는 어긋난 게 없으니 실례라고 할 것도 없지요. 그는 잘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

의미 없는 말만 오간다. 서로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을 텐데도.

루비나드는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미 충분할 정도로 실감했을 텐데, 여전히 기대하고야 만다. 어린 날의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바라게 된다. 그때처럼 엔도르빌이 상냥하게 웃어 주는 것을.

하지만 직접 만나 보고 깨달았다. 베카르티에게 부탁해, 포상으로 그녀의 결혼식에 참석하게 해 달라고까지 한 엔도르빌은 이미….

“솔라탄 근처에는 포탈이 없어 여정이 꽤 기셨지요. 피곤하실 텐데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오라버니께서 사용하시던 방을 치워 두었습니다.”

“아니, 괜찮아. 나는 이미 폐위된 몸이잖니. 성에서 지내다가 누군가의 눈에 띄기라도 하면 분명 문제가 되겠지.”

루비나드와는 달리 곧게 뻗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엔도르빌은 웃었다. 루비나드는 술렁임을 억누르며 물었다.

“그럼 어디서 여독을 푸시겠습니까? 준비시키도록 하겠습니다.”

“며칠만 베카르티에게 신세를 지기로 했어. 그러니 걱정하지 말렴.”

온화한 미소가 가시처럼 루비나드를 찌른다. 루비나드는 엔도르빌의 눈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엷게 웃었다.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 베카르티 교수를 통해 말씀해 주세요.”

“고마워. 결혼 축하해, 나의 사랑하는 누이동생.”

엔도르빌이 루비나드에게 가까워졌다. 십여 년 만에 보는 동생을 끌어안고, 그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루비나드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럼 좋은 밤 되렴. …국서 전하께서도 좋은 밤 되시길.”

딱딱하게 굳어 서 있는 루비나드를 내버려 둔 채, 엔도르빌은 베카르티와 함께 방을 나섰다. 가만히 뒤에 서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제빌이 루비나드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십니까, 폐하.”

“어? 어…. 아무것도 아니야. 괜찮아.”

말투를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루비나드를 동요하게 만든 한마디. 그리고 처음 만났을 때부터 보인 태도.

루비나드는 확신했다.

엔도르빌은… 그녀를, 제빌을 적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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