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31)
루비나드가 돌아간 후, 제빌은 생각에 잠긴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나.
보라색 눈동자에 담긴 감정을 어찌 모를까. 그걸 알면서도 제빌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치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위험 요소였다.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그러니 제 발로 황궁에 기어들어 와 주겠다면 도리어 감사한 일이었다. 하지만 영리한 자들이다. 제빌조차도 최근조차 이변을 눈치채지 못했을 만큼. 그러니 분명 이번엔 ‘사전 준비’를 위해 방문하는 것에 불과하리라.
진짜는 다음 방문 때다. 계기만 만들어 주면….
“후.”
머릿속이 복잡하다.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제빌은 대신 방문을 나섰다.
황궁은 늦은 밤인데도 인기척이 끊이질 않았다. 이제 곧 치러질 결혼식을 위해 수십 명의 국빈이 방문해 있었다. 사람이 많으니 확실히 늦은 밤에도 적막하지 않았다.
그게 제빌의 생각을 정리하는 데는 방해였다. 루비나드와 자신의 결혼식을 축하해 주기 위해서 방문해 준 건 고마운 일이지만….
제빌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후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후원은 꽤 넓어서 깊은 곳으로 들어가면 사람이 거의 오지 않는 곳이 드문드문 있었다. 루비나드 역시 자주 후원에 가는 만큼, 그런 곳에 벤치를 몇 만들어 두었다. 그리고 여유가 많을 때는 벤치에 가만히 앉아 몇 시간이건 꽃을 바라보곤 했다.
루비나드.
이제 며칠만 지나면 자신은 정말로 그녀의 남편으로서 이름을 올리게 된다. 서약하게 된다. 신의 앞에서.
그러고 나면….
-그러니 절 버리지 마세요, 폐하.
루비나드는 마치 작은 아이라도 보는 듯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안쓰럽다는 듯. 안타깝다는 듯. 어릴 때의 제빌을 보던 그 눈동자 그대로.
-내가 그대를 버릴 일은 없어.
아아, 기뻤다. 불안감을 말로 표현하면서도 기뻤다. 루비나드가 자신을 버리지 않겠다고 확답해 준 것 같아서 행복감마저 느꼈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이 그를 절망에 빠뜨렸다.
-내가 가진 적도 없는 걸 어찌 버리겠나.
불안감의 원천.
제빌은 처음부터 각오하고 있었다. 루비나드가 자신만을 남편으로 둘 것이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다.
자신이 수많은 남자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괜찮다고 자만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루비나드에게 있어서 자신만은 특별한 존재라고. 대체할 수 없는 존재라고.
그렇게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루비나드는 처음부터 그를 가진 적이 없다고 하였다. 제빌은 한 번도 그녀에게 특별한 존재인 적이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
“폐하. 저는….”
어둠 속에 잠긴 후원을 거닐며 그녀에게는 내뱉지 못할 말을 중얼거렸다. 낯선 목소리가 그의 생각을 방해한 것은 그때였다.
“안녕하십니까, 국서 전하.”
적막을 깬 목소리는 정말로 싫은 남자의 것이었다.
아직 미숙했던 제빌이 남긴 작은 유리 조각. 그걸 쥐고 손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놓지 않는 남자. 다프넬이 했던 협박의 근원이 된 사건을 일으킨.
“보르본 경.”
커드닐 디 보르본.
“밤이 늦었는데 잠이 오지 않으십니까.”
생글 웃는 얼굴은 바로 어제 만난 듯 친근했다. 하지만 사람의 감정에 예민한 제빌은 쉬이 알아챌 수 있었다.
이 남자가 자신에게 보내는 적의를.
“잠시 바람을 쐬러 나왔습니다. 경께서는 무슨 일이십니까.”
제빌의 물음에 커드닐이 웃음을 지웠다.
이 남자는 꽤 영리한 편이었다. 루비나드에게 보낸 선물만 해도 알 수 있었다. 다른 이들이 쓸데없는 보석이나 드레스 같은 사치품을 보낼 때 이 남자만이 꽃다발을 보냈으니.
관찰력도 있고 신중하다. 아마 계속해서 그런 선물을 보냈더라면 루비나드는 흔들렸을지도 모른다. 어린 날의 실수로, 그토록 애절하게 사랑을 고백하는 이 남자를 계속 밀어내는 건 너무 잔혹한 짓이 아닐까. 그렇게.
하지만 커드닐은 그렇게 천천히 다가오는 대신 곧바로 루비나드를 만나는 쪽을 택했다. 아마 무언가 사정이 바뀐 거겠지.
아주, 큰 사정이.
“오늘은 전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여하간, 그런 남자니 황궁의 후원에서 예비 국서인 제빌을 습격하는 멍청한 짓을 하진 않을 터였다. 론디아스도 아니고.
“제게?”
“네.”
“저희의 이야기는 그날 다 끝난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만.”
바로 얼마 전, 루비나드에게 거절당한 참이었다. 심지어 한 번 한 말은 번복하지 않겠다는 소리도 들었다. 즉, 그가 제빌의 앞에 나타난 것 역시 루비나드에게 있어서는 명령의 불이행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는 뜻이었다.
“알고 있습니다. 제가 그날 저지른 죄는 쉬이 속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아직 전하와 폐하의 진노가 가라앉지 않았다는 것도.”
살갗이 따가울 정도의 적의를 내보이면서, 입으로는 용케 저런 사과의 말을 내뱉는군.
제빌은 눈앞의 남자가 신기했다. 아예 아무런 감정을 드러내 보이지 않는 것이야 쉬운 일인데 저런 건….
“아마 들으셨겠지만, 폐하를 뵈었습니다.”
루비나드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제빌의 귀에 들어간다.
제국의 귀족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제빌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들었습니다.”
“폐하께서는 제 이야기를 들어 주셨지만, 저를 용서하지는 못하셨습니다.”
루비나드는 한 번 눈에서 벗어난 건, 다시는 줍지 않는다.
그녀에게 있어서 타인이라는 건 그런 존재였다. 제빌 역시 언제 그런 꼴이 될지 모를 일이었다. 그게 제빌을 두렵게 만들었다.
그녀의 것이 되지 못한 제빌의 가장 큰 공포.
“폐하의 이야기를 듣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은 가장 먼저 전하를 뵈러 왔어야 하는 게 아니었던가, 라고.”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따갑다. 제빌이 느낄 걸 알면서도 내뱉는 걸까. 아니면 설마 제대로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어느 쪽이건 제빌이 보기엔….
“감히 변명하자면, 전하께 뱉었던 그 말들은 어린 날의 어리석음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걸로는 채 변명이 되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다만….”
커드닐에게서 풍기던 적의의 냄새가 사라졌다. 대신 갑작스러운 적막이 주변을 휘감았다.
“…사실대로 말해 저는 전하께 질투하고 있었습니다.”
이건 이 남자의 진심이다. 제빌은 저도 모르게 입 안쪽을 꽉 깨물었다.
“언제나 폐하의 곁에서, 폐하의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하시는 전하가 부럽고 미웠습니다. 그래서 그날, 저는… 전하와의 대화에서 그런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그날, 먼저 말을 꺼낸 건 제빌이었다. 제빌이 먼저였다.
“용서해 달라고는 감히 말하지 않겠습니다.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절….”
커드닐은 천천히 흙바닥 위에 무릎을 꿇었다.
달빛 아래에서 백금발이 창백하게 빛났다. 건강한 색의 피부도 은백색의 달 아래에서는 희게만 보였다. 그래서일까.
미운 남자인데도, 제빌은 이 남자가 안쓰러워 보였다.
“노예라고 여기시건 길가의 돌멩이라고 생각하시건 그건 중요치 않습니다. 전하께서도 폐하께 연모의 정을 품고 계시니 이해하시겠지요? 제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그분께서 다치시는 걸 보고 싶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잃는 공포를 다시 맛보고 싶지 않습니다.”
애절한 목소리였다. 제빌조차 저도 모르게 가슴 한구석이 저릿해질 정도로 호소력 있는 목소리였다.
달빛 아래 모든 것이 창백하게 질려 있는 풍경 속에서 초록색 눈동자만이 생기를 머금고 빛나고 있었다.
“경께서는….”
그래서 충동적으로 말하려 했다.
지금 그대가 하려는 것을 그만두라고. 그러면…. 하지만 그러기 전에 낯익은 발소리가 들렸다.
“…폐하가 오시는군요.”
놀란 커드닐이 고개를 들었다. 초록색 눈동자가 제빌이 본 그 어떤 때보다 생기 있게 빛났다.
아니, 제빌은 저 눈동자를 본 적이 있었다. 아주 옛날. 그가 루비나드에게 끈질기게 구혼하며 쫓아다니던 그 시절. 그때의 그는 몹시도 아름답고 생생하게 빛나고 있어서….
“이만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아직 루비나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커드닐이 뭐라고 말을 꺼내려 하기도 전에, 꽃나무 뒤로 붉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발소리만 듣고도 그게 폐하라는 걸 알아차렸다고?
커드닐은 오싹한 감각이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걸 느꼈다.
“경과는… 다시 자리를 마련하여 이야기하도록 하죠.”
이야기는 다 끝났다는 듯 제빌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황궁 쪽으로, 발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어차피 그 남자의 목적은 다 알고 있었다. 오늘 루비나드를 만나게 되면 곤란하다는 것도.
그리고 제빌은 그를.
“누구와 이야기하고 있었던 건가? 말소리가 들리던데.”
나타난 것은 예상대로 루비나드였다. 왜 이 시간에 이분이 여기에 있는 것일까.
“시간이 늦었습니다, 폐하. 기사의 호위도 없이 후원에 나오시다니요. 위험합니다.”
“또 잔소리를 시작하려 하는군. 그대가 후원으로 향하는 게 보여 따라왔을 뿐이야.”
귀찮다는 듯 손사래를 친 루비나드가 그의 등 뒤를 보았다. 분명 말소리가 들렸는데 거기엔 아무도 없었다.
잘못 들은 것인가? 아니, 그렇다기엔….
“식 참여를 위해 궁에 방문해 주신 내빈이셨습니다.”
“누구?”
“….”
제빌은 말하기 곤란한 일이 생기면 거짓말을 하는 대신 입을 다무는 습관이 있었다. 곤혹스러운 듯 눈을 내리까는 그의 속눈썹 위로 달빛이 맺혔다.
“알았어. 더는 묻지 않을 테니 그런 얼굴 하지 말게.”
어차피 또 정보원이겠지. 제빌은 수도 없이 많은 정보원을 가지고 있었다. 귀족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여론의 동향, 제국민들 사이에서의 여론, 각 귀족의 은밀한 비밀 이야기까지.
가끔 루비나드가 농담으로 제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아는 게 아니냐고 할 정도였다. 그러니 또 그런 일인 거겠지.
왜 이 밤중에 후원까지 오나 했더니.
“폐하께서는 이런 시간에 주무시지 않고 왜 나오셨습니까. 내일 아침도 일찍 일어나셔야 할 텐데.”
“아버지의 방에 다녀왔어. …그 이야기를 하려 했지만, 주무시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더군. 내가 들어섰는데도 기척조차 느끼지 못하고 주무시는 걸 보니….”
루비나드에게도 심란한 밤인 듯했다.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제빌이 한 발 루비나드에게 다가섰다.
붉은 속눈썹 위에 스민 달빛이 사랑스러워서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잠이 오지 않으시면 제가 곁에서 자장가라도 불러 드릴까요.”
“뭣.”
황당하다는 듯 고개를 치켜든 루비나드의 눈에 청회색 눈동자가 보였다. 장난스러운 목소리와 달리, 그 눈은 몹시도 진지했다. 마치 진담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실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그대도 돌아가서 쉬도록 해. 그대도 나만큼 아침이 이르니까.”
“실없는 소리라니요. 남편 될 자가 아내에게 베갯머리에서 자장가를 불러 준다 한들….”
“아직은 남편이 아니지 않나! 자꾸 그런 소리를 할 거라면 난 돌아가겠네. 그대는 여기서 밤을 새우지 그래, 아주!”
달빛 아래에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루비나드의 뺨이 발그레했다. 정말로 토라진 듯 홱 뒤돌아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제빌이 중얼거렸다.
“저는 언제나 진심입니다, 폐하. 저는.”
살며시 열린 색 붉은 입술이 차마 아까는 자아내지 못했던 말을 내뱉었다.
“저는 당신의 것이 되고 싶습니다.”
하지만, 겨우 입 밖으로 낸 그 말 역시 들어 줄 이 하나 없이 달빛 아래 사르르 녹아들었다.
사흘 뒤로 다가온 결혼식이 하루빨리 오길 바라며 제빌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