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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 (29)화 (30/115)

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30)

무슨 일이지.

베카르티는 다소 무례하긴 하지만 경우가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약속을 잡은 적은 지금껏 한 번도 없었다. 알현실로 향하던 루비나드의 걸음이 뚝 멈췄다.

그러고 보니 지난 알현 때 제빌의 모습이 꽤 이상했었지.

무어라고 꼭 집어 말하긴 힘들지만, 둘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제빌과 루비나드를 시험하듯 바라보던 베카르티이긴 했으나, 지난 알현 때는 제빌만을 살피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것처럼.

하지만… 왜?

“왜 그러십니까, 폐하?”

루비나드를 부르러 왔던 기사가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갑자기 멈춰 선 그녀가, 혹여 자신 때문에 기분이 상해서 그런 건 아닌지 걱정되는 듯했다.

루비나드는 엷게 웃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것도 아니네.”

베카르티는 한미한 백작가의 차남이었다. 집안은 장남이 이어받을 테니 그는 자신의 살길을 찾을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찾아낸 것이 마법의 재능이었다.

그는 대규모 공격 마법에 특히 뛰어났다. 마력의 운용이나 한 마법에 여러 수식을 넣으면서도 서로 충돌하지 않게 계산하는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는 군 소속의 마법사로서 꽤 높은 자리까지 올랐었다.

선황제가 국토 확대보다는 내정 안정 쪽으로 가닥을 잡은 후에 그는 다시 제 살길을 도모해야만 했다. 그때 들어간 곳이 마탑이었다.

그는 변변찮은 가문에 장남이 아닌 자로 태어나 제 능력만으로 현재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제빌에게 적의를 품을 이유도 없었고, 그럴 만한 계기도 없었다.

그런데 왜?

“크리슈토 경.”

“네, 폐하.”

“교수는 정확하게 누구에게 알현 요청을 한 것인가?”

자신인가, 아니면 제빌인가.

붉은 눈동자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국서 전하십니다.”

“이유는?”

“처음 알현 사유를 말한 뒤 폐하께서 현재 업무를 보는 중이시라고 말씀드렸더니, 그렇다면 국서 전하라도 상관없다고 하셨습니다.”

모호하다.

큰 행사를 코앞에 둔 이 시기에 루비나드가 바쁠 것은 누구나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이렇게 돌연 찾아오면 당연히 국서인 제빌이 대신 맞이할 수밖에 없게 될 터.

그것까지 계산하고 한 일인가? 아니면 그냥 자신을 대신하는 존재였을 뿐일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알현실 앞에 도착했다.

“교수님,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기사는 안에 있을 베카르티에게 루비나드의 도착을 알렸다. 그리고 문을 열고 옆으로 비켜섰다.

그 안에는 연회색 머리카락의 미청년이 느긋하게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바쁘시다고 들었는데 갑작스러운 알현 요청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으음. 그대와 그대의 사업은 이 제국에게 매우 중요한 존재이니.”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베카르티는 어울리지도 않게 겸양의 말을 꺼내곤 루비나드가 소파에 앉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녀가 착석한 걸 확인한 후 자신도 소파에 앉았다.

“그래서 오늘 갑작스레 짐을 찾은 이유는 무엇인가.”

에둘러 말하는 것은 성미에 맞지 않는다. 루비나드가 곧바로 본론을 꺼내자 베카르티가 예를 갖추며 입을 열었다.

“말씀드린 대로, 전송 장치의 개량에 성공했다는 보고를 드리러 왔습니다.”

“그런가! 그건 활용도가 높은 기술이지. 다양한 개량이 가능하게 되면 물류나 교통에 큰 도움이 될 거야. 그대가 큰일을 해 주었군.”

매우 기쁜 소식이긴 했다.

하지만 들뜬 목소리로 칭찬의 말을 내뱉으면서도 루비나드의 머리는 냉정했다. 분명 중요한 소식이긴 했지만, 굳이 당일 갑자기 찾아와서 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본론은 따로 있겠지.

베카르티는 의외로 루비나드를 보고 놀라지 않았다. 만약 제빌을 만나러 온 것이라면, 조금이라도 동요를 보였을 터. 그렇다는 건 분명.

“폐하께서 여러모로 지원해 주신 덕분에 시간을 크게 당길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더 많은 실험을 해야겠지만…. 오랫동안 기다리신 실험이라 빨리 알려 드리려 달려왔습니다.”

아직도 본론에 들어가지 않는 건가.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루비나드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전송 장치 연구 개발팀에게 특별히 포상을 내리도록 하지. 원하는 것이 있나?”

베카르티의 눈빛이 바뀌었다. 어딘지 텅 비어 있는 것 같던 검은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다.

“무엇이든 들어주실 수 있습니까?”

“무엇이든…까지는 약조할 수 없겠군. 짐도 제국의 일원이네. 법에 어긋나는 건 하고 싶지 않아.”

“법에는 어긋나지 않습니다. 다만 폐하께서 쉬이 결정하실 수 있는 일도 아닌 것은 맞습니다.”

법에 어긋나지 않으면서, 쉽게 결정할 수 없는 일이라.

선황제는 독불장군 같은 스타일이었다. 이 제국이라는 마차가 자신이 생각한 궤도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힘으로라도 정상 궤도에 올려놓는. 물론 그 정도로 그의 위치가 확고부동했고 대의명분이 충분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루비나드도 그 못지않았다.

루비나드는 지금까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이 구상한 사업을 모두 이루었다. 마탑에 거금을 지원한다는 소리를 들은 귀족들이 들고일어나,

-마법은 전쟁에 필요한 기술이지 생활에 필요한 기술이 아닙니다! 그들은 백성을 사랑하는 폐하의 마음을 이용해 장사 하려 드는 것입니다.

라고 이야기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루비나드는 오만한 미소를 머금은 채 그들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지금보다는 건강해서 종종 공식적인 석상에 나타나기도 했던 아버지의 후광을 빌렸다.

-제국의 황제가 못 할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폐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현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신하의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웃음거리가 되었다. 충분히 예상한 일이었다.

어린 계집을 황좌에 올려 두었더니 제 아비를 믿고 설친다. 선황제도 노망이 난 것이 틀림없다. 저런 계집에게 황위를 물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귀족들을 모욕해 가면서까지 편을 들다니.

그런 구설이 끊임없이 돌았다. 루비나드는 그 모든 것을 비웃었다.

결과가 나오면 세상의 평가가 어떻게 바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루비나드는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녀 자신의 기준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수치스러운 일이든 모욕받는 일이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하기 쉽지 않은 일이라. 루비나드가 오만한 미소를 띠었다.

“그대는 짐을 얕보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짐은 그대에게 포상을 주겠다고 했다. 그 포상이 합당한 것이라면, 짐이 이 제국에서 이루지 못할 일은 없다.”

그야말로 오만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말을 현실로 구현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있었다.

그리고 그건 베카르티가 기다리던 한마디이기도 했다.

“…그럼, 폐하. 감히 아뢰옵건대 제 청을 두 가지만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 청이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지겠지.”

“하나는… 제 연구팀을 위한 상여금을 수여해 주실 수 있을지요.”

“그대들의 공을 포상하기 위한 것이라면 물론이지. 그리고 또 하나는?”

제빌과 루비나드를 일부러 떨어뜨려 놓으면서까지 하려는 부탁. 루비나드는 그걸 빨리 듣고 싶었다.

재촉하는 목소리에 베카르티가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또 다른 하나는….”

기분 탓일까.

그 냉정한 얼굴 속에서 입꼬리가 살짝 밀려 올라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 * *

“좋은 밤이야, 제빌 경.”

놀라울 일은 아니었다. 제빌 역시 그녀의 방문을 기다리며 옷차림을 단정히 해 두고 있었으니까. 그는 루비나드에게 자리를 권하고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보라색 눈동자는 또 생각에 잠겨 있었다. 결혼식을 목전에 두고 왜 자꾸 일이 생기는 것일까.

그는 입술을 비집고 나오려는 한숨을 삼키고 루비나드의 뒤를 따라 자리에 앉았다.

“폐하께서는 썩 좋은 밤이 아니신 것 같습니다만.”

“으음, 그건 아니지만 말이야. 아무래도 생각이 많아지다 보니 얼굴에 드러나는 것 같아.”

생각이 많아질 만한 소리를 들으셨다는 걸까.

루비나드는 기척에 예민했다. 그래서 사람조차 붙일 수 없어 알현실 안에서 오간 이야기는, 제빌조차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녀가 빨리 입을 열어 주길 바라며 제빌이 찻주전자를 들었다.

“난 언제나 그대의 휴식을 방해하는 것 같아.”

“폐하께서 오실 것 같아 미리 준비해 둔 겁니다. 다만 시간 예측은 조금 빗나갔군요. 찻물을 다시 데워 오라 하겠습니다.”

“아니, 괜찮아. 지금은 너무 뜨거운 것보단 차라리 마시기 쉬운 차가 좋을 것 같아.”

그러시다면야. 제빌은 순순히 찻주전자를 기울여 잔에 따랐다. 붉은색의 액체가 투명하리만치 영롱한 색을 머금고 가득 차올랐다.

가만히 차오르는 잔을 바라보던 루비나드가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으음. 그대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겠지만, 베카르티 교수 일 때문에 상의할 게 있어서 왔네.”

아직 온기가 남은 붉은 액체에서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아른거리는 하얀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루비나드가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상의하실 게 있으시다면 얼마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하지만, 말씀하지 않으시면 아무리 저라도 알현실에서 두 사람만 나눈 대화까지는 알지 못합니다.”

제빌 나름의 재촉이었다. 그걸 눈치챈 듯 루비나드가 피식 웃더니 잔 손잡이를 쥐었다. 미지근한 온기에 찻잔은 여전히 차가웠다.

잔을 입에 대고 기울이자 딱 마시기 좋은 온도의 액체가 입안으로 밀려들었다.

“일단, 오늘은 꽤 경사스러운 날이네. 그가 연구하고 있던 전송 장치의 개량이 성공했다고 하더군. 다만 아직 첫 실험이 성공했을 뿐이라 이후 조건과 환경을 달리하여 몇 번 더 실험해 보고 싶다고 하네.”

제빌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그것뿐이라면 루비나드가 이토록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그의 사업이 성공하고, 그게 다른 영역까지 적용되면 얻게 될 금전적인 이득은 지원한 금액을 훨씬 상회하는 것이 될 테니까.

그러니 본론은 따로 있을 터.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이어질 말을 기다리는 제빌을 보며 루비나드가 입을 열었다.

“그는 포상으로 두 가지를 요구했네. 하나는 연구팀에 대한 상여금. 그간 어려운 실험으로 고생했을 그들을 치하하는 의미니 당연한 일이지. 그리고 다른 하나는….”

루비나드의 입이 다시 멈췄다. 그 표정 역시 어둡게 가라앉았다.

제빌의 머릿속에 지난 밤 보고받은 베카르티 교수의 최근 행적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를 조사한 결과 역시.

아마도 그가 부탁했을 포상이라는 것은.

“우리의 결혼식에 어떤 인물을 초대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네. 그 인물은….”

망설이던 루비나드가 말을 채 잇기도 전에, 제빌이 그녀의 말꼬리를 가로챘다.

“혹시 그 인물이라는 건.”

청회색 눈동자가 낮게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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