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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 (28)화 (29/115)

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29)

갑작스러운 말에 루비나드의 얼굴이 굳었다.

그런 반응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제빌은 웃을 수 있었다.

“폐하께서는 제 유일한 친우이자 주인 아닙니까. 그런 폐하께 버림받으면 누가 절 주워 주겠습니까. 직업도 없는 폐인이 될 테지요.”

불빛의 농간일까. 새어 나올 리 없는 감정이 얼핏 비쳤다.

그림자처럼 얼굴에 드리워졌다 사라지는 어둠이 신경 쓰였다. 루비나드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뺨에 가져갔다. 어둠을 걷어 내려 살짝 뺨을 쓰다듬었지만, 도리어 제 손에 가리어 그림자만 더 짙어졌다.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제빌이 생글 미소 지었다.

“그러니 절 버리지 마세요, 폐하.”

왜일까. 루비나드는 빗속에서 떠는 작은 아이가 떠올랐다.

제빌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상상인데 쉬이 지워 지지가 않았다.

“내가 그대를 왜 버리겠나.”

“일 못 한다고 버리거나 사랑하는 남자가 나타났다며 버리실지도 모르지요.”

“허튼소리.”

루비나드는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망가진 이들을 보았다.

그들은 제 몸과 마음을 무너뜨리면서도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 마치 마취라도 당한 것 같았다.

어쩌면 루비나드도 그렇게 될지 모른다. 언젠가, 자신이 모르는 감정을 깨닫게 되는 날이 온다면. 그러나 그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언할 수 있었다.

“내가 그대를 버릴 일은 없어.”

“…그걸 어찌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남색 머리카락 아래 청회색 눈동자가 공허했다. 하지만 이내 머리카락으로 숨어들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루비나드가 툭, 그의 팔을 치며 말했다.

“내가 가진 적도 없는 걸 어찌 버리겠나. 그대가 내 곁에 있어 주는 것이지.”

아아, 이거였나. 제빌은 제 불안감의 뿌리를 알았다.

루비나드는 필요할 때 필요한 말을 해 주는 사람이었다. 둔감한 주제에. 그러나 한 번씩 그 무구함이 지나칠 정도로 잔혹해지는 경우가 있었다.

지금처럼.

“그렇죠…. 저는 폐하의 것이 아니죠.”

그렇게 중얼거리는 옆얼굴에 옅은 미소가 스몄다. 마치 모든 걸 놓아 버린 듯한 미소였다.

“오히려 그대가 더 걱정이야. 결혼까지 해 놓고 너무 빨리 다른 여성에게 호감이 생기면 어쩌나 싶어. 그대가 알아서 잘 하겠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폐하.”

제빌은 담담한 목소리로 그리 답하고 뺨에 닿은 손을 가만히 잡아 내렸다. 손끝에서 느껴지던 온기가 사라지고 대신 싸늘한 공기가 그녀를 감쌌다. 조금 전까지의 훈훈함이 거짓말인 것처럼.

제빌이 일어나면서 휙 찬 바람이 일었다.

“폐하께 흠이 될 일은 절대 하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렇게 말한 그는 다시 소파로 향했다.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놓인 서류 더미를 정리한 제빌이 빠르게 글자를 읽어 내렸다.

마치 등 뒤의 시선에서 도망치려는 듯이.

* * *

어제의 제빌은 환상이었던 걸까. 그는 평소대로 담담하게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계속 그를 흘긋거리던 루비나드의 머릿속에 간밤의 그가 떠올랐다.

-저는 폐하께 버림받으면 완전히 망가질 테니까요.

그 뒤에 붙은 이유는, 납득이 가는 것이었다. 황제의 최측근이었던 그가 만에 하나라도 루비나드의 눈 밖에 난다면 누가 거두어 줄까. 하지만 설령 그렇게 된다고 하더라도 제빌은 분명 또 탈출구를 찾을 수 있을 터.

게다가 그 말을 내뱉을 때의 눈빛이 신경 쓰였다.

예전에는 그저 무심히 스쳐 지나갔었다. 하지만 웨딩드레스를 시착했던 날, 제빌의 그 웃는 얼굴을 본 후로 계속 그의 눈빛이나 표정이 신경 쓰였다.

-지금, 저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합니다.

마치 신랑이, 사랑하는 신부에게 하는 말 같았다. 제빌에게 그런 사적인 감정이 있을 리가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루비나드가 그렇게 착각할 정도로 그는….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겨우 드레스를 입었을 뿐인데. 제빌의 마음에 깃들어 있던 복잡한 마음을 알 리 만무한 그녀는 그저 그렇게 생각했다. 그 후로 계속 제빌에게 신경을 쓰게 되었다.

그러면서 알게 된 게 있었다.

제빌은 시종 무덤덤해 보이지만, 아주 가끔 그 눈에 알 수 없는 감정이 깃들 때가 있었다. 마치 가득 차서 넘쳐 버린 물컵처럼 감정이 차오르다가 잠시 흘러넘친다. 하지만 그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어제 제빌의 눈동자에서는… 아주 조금, 커드닐과 비슷한 감정이 느껴졌다.

“손을 움직이셔야지요, 폐하.”

“음? 아, 음. 그렇지.”

멈춘 펜을 귀신같이 알아챈 제빌이 얼굴조차 들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제야 제 손이 멈춘 걸 깨달은 루비나드가 화들짝 놀라 아무렇게나 손을 움직였다.

“아.”

“왜 그러십니까?”

“…서명을 실수했네.”

평소 사용하던 서명과 너무 달랐다. 유려하고 우아한 글씨는 어디 갔는지, 어린아이가 조급하게 휘갈긴 선 같았다. 작게 한숨을 내쉬는 그녀의 곁으로 제빌이 다가왔다.

“별일이시군요. 안 보고도 정확하게 서명하시는 분이.”

“그러게.”

그대 때문이다만.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걸 꾹 참은 루비나드가 마지막 장을 찢어 내려 했다. 내용을 베껴 적고 다시 서명할 셈이었다.

엉망인 서명을 내려다보던 제빌이 입을 열었다.

“잘하면… 이을 수도 있겠는데요. 시도해 보시겠습니까?”

“이걸?”

“네. 손을 좀 빌려주시겠습니까.”

종이를 낭비하지 말라는 루비나드의 호통에, 결재 서류의 글자들은 모두 깨알같이 적혀 있었다. 이거 한 장을 새로 쓰는 데만 해도 꽤 시간이 걸리리라. 만약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었다.

뭐, 시도해 보는 정도야. 안 되면 다시 쓰면 되는 것이니.

루비나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제빌에게 제 손을 내밀었다.

“펜을 쥐셔야지요.”

부드러운 손길이 그녀의 손에 깃펜을 쥐여 주었다. 그 위를 뜨거운 온기의 손이 덮었다.

평소라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펜을 보며 감탄을 하건, 어떻게 그대가 황제의 서명을 똑같이 하는 거냐며 의문을 던지건, 앞으로는 그대가 모든 서명을 대신해도 되겠다며 농을 했을 터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깃펜의 움직임보다도 제빌의 숨결이 더 신경 쓰였다.

“…이렇게….”

무의식중에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손을 붙잡은 채 움직인다는 건, 즉 몸이 밀착했다는 뜻이었다. 그가 무언가를 중얼거릴 때마다 뜨거운 숨결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가깝다는 게 이렇게나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별생각이 없었는데.

루비나드는 달아오르려는 뺨을 왼손으로 꾹 눌렀다.

“왜 그러십니까?”

“어?”

“이가 아프십니까? 아니면 입안에 혓바늘이라도….”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조금 더워서 그러네.”

“그것도 드문 일이군요. 한여름에도 대련하실 때가 아니면 땀을 거의 흘리지 않으시는 분이.”

“그러게 말이야.”

어제 제빌의 방에 가지 않는 게 더 나았을까?

저녁 내내 고민했다. 커드닐의 생각을 알 수가 없었고, 사랑이라는 걸 알 수가 없었다. 알 수 없는 것뿐이라 속이 답답해졌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제빌이 생각났다.

그녀에게 제빌은, 이제 정말로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친우였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생각이 많아질 줄 알았더라면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반응에 도리어 마음이 더 어지러워졌다. 생각할 것만 더 잔뜩 끌어안은 느낌이었다.

“…됐습니다. 이 정도면 조금 피곤하셔서 실수하신 정도로 우겨 볼 수 있겠네요.”

제빌이 씩 장난기 서린 미소를 보냈다. 그 얼굴이 낯설어 루비나드는 흠칫 놀라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확실히. 어설픈 낙서 같았던 것이 조금 일그러진 제 서명이 되어 있었다.

“그대가 내 서명도 할 수 있을 줄은 몰랐어.”

“매일 보는 거니까요. 어설프게나마 따라 해 본 것뿐입니다.”

할 일이 다 끝났다는 듯 제빌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후. 집중하자. 일을 위해 제빌까지 끌어들여 이런 상황을 만들지 않았던가. 깊게 심호흡을 하고 깃펜을 든 루비나드의 눈에는 평소의 냉철함이 돌아와 있었다.

항상 그렇듯 집무실을 채운 고요를 깬 것은….

낯선 노크 소리였다.

“…? 이 시간에 누가 오기로 했던가.”

“아니요. 오늘은 알현 예정이 잡혀 있지 않습니다.”

“그렇겠지. 서류가 이만큼이나 남았는데 알현할 시간이 날 리가 없으니.”

아직 책상 위를 가득 메우고 있는 서류 더미를 보던 루비나드가 힐끔 문을 곁눈질했다. 제빌이 재빨리 일어나 문으로 다가갔다.

“누구십니까?”

“전하, 마탑에서 베카르티 교수가 찾아오셨습니다.”

루비나드가 고개를 갸웃했다. 베카르티가 갑자기?

“무슨 용무라고 하십니까?”

“전송 장치의 개량 결과에 대해 폐하께 보고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합니다.”

지난번, 그의 재촉을 받고 나서 실험 장소 확인을 서두르라 일렀다. 마탑의 지원까지 받아 빠르게 허가를 내 주었는데 덕분에 실험이 빨리 끝난 모양이었다.

“오늘은….”

“내일부터는 다시 새로운 실험에 들어갈 예정이라 직접 보고할 수 있는 건 오늘뿐이라고 하는데, 보고서를 따로 올리시라 할까요?”

보고서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게 있다. 특히 베카르티는 보고서를 쓰는 데 약했다.

오랫동안 전장에 있었기 때문일까. 직설적이고 간결했다. 기승전결에서 기와 결만 쓰는 경우가 수두룩했다. 처음의 사업 계획서도 그것 때문에 반려되었었다.

직접 보고를 받는 편이 더 낫겠지. 루비나드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내가 만나고 오도록 하지. 그대는 이것 말고도 또 해야 할 일이 있지 않나. 연회장의 내부 장식도 슬슬 마무리 단계라 확인해야 할 테고. 서류 정리가 끝나면 가도록 해.”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루비나드를 막을 순 없었다. 베카르티의 알현 요청 사유는 지극히 타당한 것이었기에.

제빌은 예를 갖추어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폐하. 그럼 다시 뵙는 건 내일이 되겠군요.”

“글쎄. 베카르티 교수는 직설적인 성격이니 말이야. 생각보다 금방 끝날지도 몰라.”

“그래도 혹시 모르니 미리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폐하.”

“으음. 내일 보지.”

루비나드는 싱긋 웃어 보이고는 집무실 밖으로 나섰다.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제빌이 책상 앞에 앉았다.

감정적이 되는 건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필요한 건 정보. 그리고 계획과 행동뿐. 이미 그의 뒤를 캐기 시작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제빌의 손에 보고서가 들어올 것이다.

그 후에 생각해도 늦지 않는다. 그보다 지금 당장은….

루비나드의 말대로다. 이제 사흘 앞으로 훌쩍 다가온 결혼식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짓는 것.

그게 제빌에게 있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었다.

“후우….”

제빌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오색 찬란한 색으로 빛나던 햇빛 속에서 그 무엇보다도 아름답고 붉게 빛나던 자신의 신부를 떠올렸다. 그러자 술렁이던 가슴이 조금 가라앉았다.

반짝 눈을 떠도 그 잔상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제빌은 부드럽게 풀린 얼굴로 미소 짓고는,

다음 서류로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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