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27)
-격이 맞는다고 생각해? 그대와 황녀 저하가? 포기하는 게 좋지 않나?
-후작가에도 밀리는 몰락 직전의 공작가, 그것도 삼남. 황녀 저하의 남편감으로 이름조차 올리지 못하는 그대가 감히 내게 이런 조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주제넘은 일이라는 걸 정녕 모르는 거야?
참으로 건방진 말이었다. 그가 대체 무엇이기에 제빌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대체 무어 그리 잘났기에.
겨우 가문 하나, 제빌이 고를 수도 없었던 부모 하나 잘 만난 게 그리도 잘난 일이던가. 그렇게 따지자면 그는 루비나드에게 감히 추파를 던져서도 안 되었다.
황녀와 공작가의 차남은 ‘격’이 다르니까.
앞에 어떤 말이 오갔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 두 마디만으로도, 제빌의 금방이라도 눈물 흘릴 듯 상처받은 얼굴 하나만으로도 루비나드가 커드닐을 경멸하게 되기엔 충분했다.
-글쎄. 내 생각엔 그대가 더 주제넘은 것 같아.
차갑게 내뱉자 남자의 얼굴이 두려움으로 일그러졌다. 설마 루비나드가 들을 줄은 몰랐었겠지.
대부분의, 제빌을 모욕하는 이들이 그런 것처럼.
-몰라 봐서 미안하군. 공작가의 차남이라는 자리는 황녀의 놀이 친구까지도 모욕할 수 있는 자리였다는 걸.
-저하, 그게 아니라….
그는 무언가를 변명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하지만 필요 없었다.
어떤 변명을 대든 그가 제빌을 모욕할 이유가 될 순 없었다. 어떤 이유든 남을 상처 입히는 행동을 정당화시켜선 안 되는 것이니까.
-내게는 그대보다 제빌이 훨씬 소중해. 귀찮게 구는 그대보다 훨씬 더.
일부러 쿠온 공자라는 말 대신 이름을 불렀다. 초록색 눈동자가 상처 입은 듯 흔들렸고, 청회색의 눈동자는 묘한 반짝임을 품었다. 하지만 루비나드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가 제빌을 모욕한 순간, 루비나드의 안에서도 그가 사라졌다.
그러니 그녀는 잔혹해질 수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있어서 없는 것과 같았으니까.
-다시는 내 눈에도, 제빌의 눈에도 띄지 말게. 황녀로서 명령하지.
-저하, 제발 제 말을…!
루비나드는 애절한 목소리를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대신 제빌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게 왜 이런 곳에서 기다리는 거야. 괜한 시비에 휘말리잖나.
씩 웃으며 제빌의 어깨를 톡, 두드린 그녀는 다음 수업을 위해 걸음을 옮겼다. 하얗게 질린 얼굴의 소년을 스쳐 가던 루비나드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그대의 구혼장은 거절해 두도록 하지. 나는 집안보다는 사람을 보거든.
황녀의 남편감을 고르는 것은 황제였다.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좀체 운을 띄우지 않아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가문들이 모두 긴장하고 있었다.
이 남자는 그런 상황 속에서 루비나드에게 처음이자 마지막 구혼장을 보냈던 자였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자리가 아닌, 루비나드 자신을 원한다고 했었다. 설령 거짓이라 해도 ‘그녀의 존재’ 자체를 원한다는 말에 조금은 기뻤다.
그래서 귀찮다 귀찮다 하면서도 매정하게 내치지 못했던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가 최소한 인간으로서의 기본을 갖췄을 때의 이야기였다.
루비나드의 입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대가 감히 어찌 짐의 앞에 얼굴을 보이는가. 짐의 명령을 잊었나? 아니면 황녀였을 때 한 명령은, 지금은 무효라고 생각하기라도 한 건가.”
붉은 입술에 불쾌함과 오만함 가득한 미소가 스몄다. 남자는 파르르 떨리는 제 몸을 연무장 바닥에 내던졌다. 기사들의 땀이 스며든 나무 바닥에서는 꽤 고약한 냄새가 났다.
그런데도, 바닥에 납죽 엎드린 남자는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얼마 전 폐하께서 다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달려왔습니다.”
“그대가? 왜? 그날, 내가 그대에게 다시는 얼굴을 보이지 말라 한 것은 내게 신경도 쓰지 말라는 뜻이었네. 내게 무슨 일이 있었든 그대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듣는 이의 가슴이 술렁일 정도로 절절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루비나드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갑기만 했다.
이 정도는 이미 각오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그녀의 냉담한 태도를 보자 마음이 아픈 것 역시 사실이었다. 남자는 이를 악물고 제 감정을 가라앉혔다.
감정적이 되어선 안 된다. 어렸을 때의 실수를 또 되풀이할 순 없었다.
그에게는 꼭 해야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폐하의 명령, 제대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다시는 폐하의 눈에도, 쿠온 경의 눈에도 띄지 말라 하셨던 말을 어찌 잊겠습니까. 하지만….”
겨우 고개를 든 남자의 얼굴은 엉망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다. 다 큰 남자가 저렇게 유약한 표정을 짓다니. 최소한 이 제국에서는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누군가의 눈에 보이기라도 하면 일생 동안 웃음거리가 될지도 모를.
그 수치를 무릅쓰고라도 그는 루비나드에게 용서받고 싶은 모양이었다.
보라색 눈동자가 낮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폐하…. 어린 날의 치기와 무례로 내뱉은 말을 없던 것으로 해 달라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건 제가 내뱉은 말이었고, 평생 다 갚지 못할 죄이니까요. 다만, 지금은 그 말을 내뱉은 걸 후회하고 있습니다.”
설령, 유도당한 말이었다고 하더라도.
지금이라면 그런 뻔한 수에 걸려 들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걸 이용해 그를 밀어내고 자신이 신임을 얻었겠지. 하지만 남자는 어렸고, 이미 그 일은 일어났다.
루비나드에게 버려진 것은 자신이었다.
“십육 년이나 지난 일에, 이제야 후회를 한다?”
웃기지도 않은 일이었다. 무언가 바라는 게 있는 거겠지.
루비나드는 타인의 호의에는 둔하지만, 악의에는 민감했다. 아니, 설령 둔감했더라도 눈앞의 남자가 제빌에 대해 여전히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다는 것쯤이야 쉽게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남자가 진심으로 사죄할 생각이었다면 자신이 아니라 제빌을 먼저 찾았을 테니까.
“폐하의 명에 따를 생각이었습니다. 다시는 두 분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 황궁에의 직위에는 눈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랬다.
보르본 공작가는, 일곱 공작가 중에서 어느 정도는 힘을 가진 곳이었다. 그곳의 차남이니 보통이라면 황궁에 적을 올렸으리라. 하지만 그녀가 매년 결재하는 인사 명단에 그의 이름은 없었다.
하지만, 그랬다면.
“그러면 그대로 조용히 숨을 죽였어야지. 무슨 낯으로 짐을 찾아왔는가.”
가늘게 뜬 눈동자에서는 적의뿐 아니라 살기마저 스며 나왔다.
짐작 가는 바는 있었다.
그녀가 제빌에게 청혼했던 날, 그녀의 책상 한구석에서 곧 떨어질 듯 위태롭게 걸쳐져 있던 꽃다발. 그 꽃다발을 보낸 남자가 바로 이 남자, 커드닐 디 보르본이었으니까.
솔직히 그날도 어이가 없었다. 감히 무슨 낯으로 제빌과 같이 일하는 집무실에 찾아와 그 꽃을 두고 간 건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아서.
“폐하께서….”
사교계의 영애들이 에메랄드보다도 깊고 숲의 나무보다도 싱그럽다고 평한 초록색 눈동자에 얼핏 물기가 서렸다. 금방이라도 톡 떨어질 것 같은 물방울이 위태롭게 눈매를 타고 일렁였다.
“사실은 좀 더 천천히, 폐하의 용서를 받은 후 찾으려 했습니다. 그러던 중 폐하께서 위험한 일을 당하셨다는 말을 듣고 더는 기다릴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커드닐이 그녀의 명령을 순순히 따른 것은 언젠가 그의 검은 속내를 알아채고, 자신을 용서해 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커드닐의 예상보다도 더 음험하고 치밀한 사내였다.
그뿐이랴. 감히 제가 넘볼 수 없던 자리를 결국 쟁취해 내고야 말았다.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루비나드의 곁에 서는 것만큼은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처음 그녀에게 구혼장을 내밀었을 때부터, 아니, 그 사냥 대회의 숲속에서 처음 붉은 머리카락의 소녀를 보았던 그날부터….
지금까지도.
“저는 여전히 폐하만을 경애하고 그리고 있으니까요.”
물기 어린 눈동자가 결국은 똑, 한 방울 눈물을 떨구고야 말았다. 둔한 루비나드조차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커드닐은 모든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눈동자, 표정, 입술의 떨림까지 그 모든 게 그녀에게 고한다.
저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라고.
“폐하. 이대로 폐하께 용서받지 못한 채, 폐하의 곁에 서지도 못한 채 그 기회조차 잃을 수 있다는 걸 깨닫고 저는 이곳으로 달려왔습니다.”
깜빡, 흔들린 눈꺼풀에 그의 시야를 흐리게 했던 물방울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맑아진 시야에, 표정을 지운 얼굴로 자신을 보는 루비나드가 보였다.
“명령을 어겼다며 제 목을 치셔도 좋습니다. 폐하께서 위험한 일을 당하셨었다고 들은 그 순간, 폐하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제 마음은 이미 한 번 죽었으니까요. 그렇게 되느니 차라리 전 죽는 게 낫습니다. 하지만 혹시라도….”
시선이 루비나드의 손에 엉겨 붙는다.
그의 절실함이 그녀가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 못하게 들러붙었다. 루비나드는 그저 가만히 그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혹시라도 폐하께서 은혜를 베풀어 허락해 주신다면, 평생을 두고 폐하의 곁에서 그 죄를 갚으며 살고 싶습니다.”
폐하의 곁에서.
루비나드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이해했다.
그는 지금 루비나드에게 두 번째 구혼을 하고 있었다. 표정이 사라졌던 그녀의 얼굴에 냉담함이 돌아왔다.
“그대는 국서가 될 수 없네. 이미 국서는 쿠온 경으로 결정되었으니.”
“잘 알고 있습니다. 애정을 받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후궁에조차 들어가지 못해도 좋습니다. 제가 감히 어떻게 그런 걸 바라겠습니까.”
그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마지막 남아 있던 물기가 후두둑 흩뿌려졌다.
“그저 절 곁에 두고 써 주시면 됩니다. 다시는… 다시는 아무것도 해 보지 못한 채, 폐하께서 위험하셨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일상을 보내고 있을 때 당신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살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그저….”
커드닐이 루비나드의 손을 향해 제 손을 뻗었다.
아무렇게나 늘어진 손을 마치 보물이라도 되는 양 제게로 끌어 가볍게 입을 맞춘다. 어째서일까. 루비나드는 그 움직임에서 제빌을 떠올렸다.
그의 떨림이, 제빌이 그랬던 것만큼이나 무언가를 품고 있었기 때문일까. 그녀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그래서 채 뿌리치지 못했다.
“폐하의 곁에서, 폐하를 지키고 싶습니다.”
초록색 눈동자가, 보라색 눈동자를 보며 호소했다.
그리고.
청회색의 눈동자가 그 모든 것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