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26)
“오늘은 알현 요청을 받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폐하.”
연회색의 장발이 햇빛 아래에서 투명하게 빛났다.
언제나 로브를 뒤집어쓰고 다니는 마법사답게 피부 역시 유달리 하얬다. 그런데도 다부진 체격이나 큰 키가, 그를 한층 남자답게 보이게 했다.
물론 사나운 눈초리와 꾹 다물린 입도 한몫했지만.
“그대의 요청이니 특별히 승낙한 것이오. 사업 계획을 직접 설명하고 싶다고 했다지?”
“네.”
베카르티가 준비해 온 서류 더미를 꺼냈다.
언제나 그렇듯, 이번에도 그녀의 곁에 있을 제빌의 것까지 세 부. 두툼한 종이 뭉치를 들고도 그는 힘든 기색조차 내보이지 않았다.
전장에서 오랫동안 지냈던 만큼 기초 체력이 좋은 것이겠지. 루비나드는 베카르티가 건네는 종이 뭉치를 받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확실히, 이번 반려 사유를 듣고 보니 제가 기간을 좀 급하게 잡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지원 예산 규모에 맞추려다 보니 그런 것 같아서 이번엔 정말로 실현이 가능한 일정으로 잡아 보았습니다.”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알현실 안을 울렸다.
루비나드는 익숙한 듯 신경조차 쓰지 않고 페이지를 넘겼다.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정리된 사업 계획서지만, 필요한 부분에는 표식이 되어 있었다.
“역시. 지난번에 제출한 일정의 두 배는 필요했군.”
“전송 포탈의 개량 작업이 막바지 진행 중이라 더 빨리 끝내 보려 했었습니다만….”
흘끗, 하고 루비나드와 제빌을 번갈아 바라본 베카르티가 냉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두 분의 결혼식 준비로 황궁 전체가 정신이 없는지, 사무관들이 서류 처리를 빠르게 진행해 주지 않아서 일이 늦어졌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릴.
제빌이 눈을 가늘게 떴다. 베카르티가 제안한 사업들은 수익률이 높은 경우가 많아 루비나드가 특별히 신경 써서 관리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곧바로 알리라 일러 두었는데.
게다가 그들은 두 사람의 결혼식 준비에는 참여하지도 않았다. 그런 걸 루비나드가 용납할 리 없었다.
“오해가 있었나 보군. 그대에게 붙여 준 사무관은 그대 사업을 전담하고 있네. 서류 처리가 늦어지는 건 검토가 필요해서 그런 것들이니 이해해 주게.”
“실험 장소에 대한 허가 신청에 무슨 검토가 그리 필요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장소를 구해 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말이죠.”
현장에서야 일이 늦어지는 게 불안하고 짜증 날 만했다. 특히 베카르티처럼 여러 사업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는 경우엔.
그렇게 생각한 루비나드가 씩 웃곤 입을 열었다.
“그대의 고충은 잘 알고 있네. 다만 실험 장소의 경우, 기존에 포탈이 있던 장소가 아니라 확인 작업이 필요했네. 앞으로는 최대한 빨리 작업을 끝내 달라고 명해 두도록 하겠네.”
“꼭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일이 자꾸 늦어지면 새로운 사업도 늦어질 테니까요.”
얼핏 들으면 무례한 말투였다.
하지만 베카르티 본인에게는 무례를 저지를 생각은 없었다. 정말로 실험이 늦어지는 것에 초조함과 짜증을 느끼고 있을 뿐.
둔한 루비나드가 알아챌 정도였으니 제빌도 물론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았다. 만약 조금이라도 베카르티에게서 불손한 무언가를 느꼈다면 바로….
“일단 기초 마법 이론은 완성된 상태입니다. 다만 이걸 실험하기 위해서는 제국에서는 나지 않는 특수한 약초가 필요합니다.”
루비나드를 향해 있던 검은 눈동자가, 이번에는 제빌을 향했다. 제빌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차가운 눈동자.
제빌은 불쾌감을 억누르고 엷게 웃어 보였다.
“말씀해 주시면 쿠온가에서 최대한 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딜로나의 잎, 케일란의 뿌리, 익실랍의 꽃이 필요합니다.”
순간 제빌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우연인가? 아니면 일부런가?
검은 눈동자에서는 표정을 읽어 낼 수가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는 제빌을 관찰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듯이.
“제가 모르는 약초도 섞여 있어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습니다만…. 양은 어느 정도가 필요하십니까?”
“국서 전하께서 모르는 약초도 있다니, 놀랐습니다.”
비아냥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하지만 표정에 변화가 없어서 확신할 수가 없었다.
제빌은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아직 공부가 부족한 몸이라 익실랍의 꽃이라는 건 처음 들어 보았습니다. 관련 서적 같은 게 있다면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손에 넣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럼 조수를 시켜 전하께 참고 서적을 가져다 드리라고 하죠.”
용건이 끝났다는 듯, 검은 눈동자가 다시 루비나드를 향했다.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흘려들으며 제빌이 이를 악물었다.
이 남자가 최근 ‘그곳’에 다녀왔다는 소식은 이미 들었다. 거기서 뭔가를 알아낸 걸까? 알아냈다면 대체 어쩌려는 셈일까. 이런 식으로 사람을 떠보는 행동을 해서 무슨 이득을 볼 수 있다는 거지?
복잡한 머릿속을 빠르게 정리해 나가는 제빌을, 검은 눈동자가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 * *
예물까지 고르니 두 사람의 당일 복장은 정해졌다. 남은 것은 예식을 치를 연회장의 실내 장식과 귀빈 맞이뿐이었다.
결혼식 준비는.
다른 일이 산더미 같이 쌓여 있었지만, 가장 급한 건 실내 장식이었다.
“후….”
황궁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공식 행사는 안주인의 몫.
즉, 원래는 황후의 몫이었다. 그리고 현재는 국서인 제빌의 몫이었다.
결혼식 준비부터 황궁 내 다른 업무들, 루비나드의 업무 보조까지. 제빌은 하루가 48시간이래도 모자랄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실내 장식을 위한 물건이 반입되자 더 그랬다.
루비나드와는 집무실 외에서는 이야기해 본 것도 꽤 오래되었다. 결혼하게 되면 더 오랫동안 함께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아니, 실제로 식 준비를 같이하면서 그렇게 될 뻔하긴 했지만….
-제빌 경, 굳이 식탁보를 이렇게 좋은 천으로 만들 필요가 있나?
라든가,
-요리 코스가 너무 많은 것 같군. 디저트를 먹을 때쯤 되면 모두 배가 터질지도 모를 일이야. 조금 줄이는 건 어떤가.
라든가.
분명 예산안을 보고 승낙의 표시를 했던 루비나드가 여기저기 트집을 잡으며 예산을 깎으려고 시도했다. 처음엔 좋게 설득했지만 그러느라 시간을 너무 많이 잡아먹었다. 결국.
-폐하, 식 준비는 제게 다 맡기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 제게 다 맡기시고 폐하께서는 조금 쉬십시오.
-아니, 하지만….
-오늘부터 식 전날까지 연회장엔 출입 금지입니다.
너무했나 싶긴 하지만, 준비가 진행이 되질 않으니 어쩔 수 없지.
하긴. 생각해 보면 꿈도 꾸지 못했던 자리에 서 있지 않은가. 이런 걸 행복한 고민이라고 하는 거겠지. 제빌은 엷게 웃고는 연회장을 다시 훑어보았다.
“전하. 장식의 색은, 희망하신 것이 맞습니까?”
연회장 한가득 붉은색과 금색의 천이 장식되었다. 화려한 걸 즐기지 않는 제빌이지만, 역대 황제들의 결혼식을 참고하여 장식한 참이었다. 다만 붉은색은 루비나드의 선연한 머리카락 색으로 최대한 맞춰 달라 부탁해 두었다.
바닥에 이어진 주단 위를 걸어갈 자신과 루비나드의 모습을 상상하다,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상상에 빠져 있기엔 일분일초가 아까웠다.
“좋습니다. 당일 테이블 위를 장식할 꽃은 준비되었습니까?”
“말씀하신 대로 라벤더와 흰 꽃 위주로 구성했습니다. 미리 견본을 보여 드릴까요?”
“네. 언제쯤 볼 수 있습니까?”
“오늘이라도 가능합니다.”
그럼 오늘은 하객 명부를 다시 한 번 확인해 자리를 정하고, 꽃 장식의 견본까지 확인한 후 잠시라도 좋으니 폐하께 가야겠다. 이러다간 폐하가 부족해 미쳐 버릴지도 모르니.
루비나드를 떠올리자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스몄다.
“그럼 하객들의 자리를 확인한 후 견본을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시간쯤 걸릴 텐데 가능하겠습니까?”
“바로 만들어 오게 하겠습니다.”
상인이 황급히 떠난 후, 한 남자가 제빌에게로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붉은 끈으로 갈무리한 종이 뭉치가 들려 있었다. 불참 의사를 표했다가, 다시 참석 의사를 밝힌 이들의 명단이었다.
제빌은 종이를 받아 들고 빙긋 웃어 보였다.
“고맙습니다, 카란.”
남자, 카란은 마주 웃어 보이고는 예를 표했다. 다만 인사말을 하진 않았다. 제빌의 호위로 뒤따르고 있던 루비나드의 친위대 기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전하, 저자는….”
“제 일을 돕는 사람입니다. 다만 목이 망가져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서…. 혹시 무례해 보였다면 이해해 주십시오.”
목이 망가진 사람이라니. 국서 전하는 그런 사람을 곁에 두고 쓰시는 건가. 기사는 새삼스럽지만, 왜 황제가 그를 골랐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귀족들 사이에도 약자는 있기 마련이다. 굳이 따지자면 제빌은 약자 중에서도 가장 바닥에 속한 사람이었었다. 귀족 사회와는 연이 먼 자신조차도 이름을 들어 봤을 정도로.
약체 공작가에 태어난, 약하디약한 삼남. 심지어 제 어미를 잡아먹고 태어난 사람이라고 했다.
얼마나 많은 수모를 겪었을지 기사는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렇게 약한 사람이 힘을 쥐게 되면 언제나 문제가 생긴다. 그동안 받아 왔던 모든 것을 복수하려 하기 마련이니까. 그게 자신이라고 해도 힘을 남용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제빌은 달랐다.
약한 이를 곁에 두고 존중할 줄 알았다.
“제가 이해할 일은 아니지요. 전하께 새삼 존경심이 솟습니다.”
기사의 작은 중얼거림은, 평소 예민했던 제빌의 귀에 들어가지 못했다.
“…베카르티 교수?”
참석자 명단에서 믿을 수 없는 이름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손 아래에서 얇은 종이가 파삭, 구겨졌다.
* * *
제빌의 궁의 관리 일을 도맡게 되면서 루비나드에게는 잠깐이지만 여유 시간이 생겼다. 보통은 제빌과 새로운 사업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거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최근의 제빌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그녀조차 얼굴을 거의 보지 못했다.
“내가 도와주면 더 빨리 끝날 것을.”
그런 생각에 연회장으로 달려갔었다. 제 딴엔 열심히 일을 도왔건만.
“후.”
연회장에는 출입 금지라고 못 박혔으니 갈 수 없다. 그러면 여유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제빌에게 책이 있다면 루비나드에게는 검이 있었다.
목검을 쥐고 자세를 바로잡는다. 가만히 눈을 감으면 술렁이고 복잡했던 마음이 사르르 가라앉고 대신 맑은 빛이 보였다. 그 빛을 향해 부드럽게 검을 휘두른다.
가상의 적을 세우는 대신, 스승인 기사단장이 가르쳐 준 방법이었다.
빛은 베이지 않는다. 그저 가만히 그 자리에 있을 뿐. 그 빛을 베려면 어찌해야 할 것인가. 그리 생각하고 움직여 보라고 했다.
움직이는 적을 베어야 하는 루비나드에게, 그런 훈련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물어본 적이 있었다. 오히려 적이 있다고 가정하고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는 게 더 좋지 않냐고. 스승은 그저 웃으며 해 보라고 하기만 했다.
사실 여전히 그 진의는 알기 어려웠다. 어지간한 남자들도 감히 그녀의 검 앞에서는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가 된 지금도. 그래서 루비나드는 혼자서 검을 휘두를 땐 스승이 말한 그 빛을 베려 했다.
하지만 그 집중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누군가?”
누군가의 기척이 그녀를 방해했기에.
루비나드가 움직임을 멈추고 기척이 나는 쪽으로 검을 겨누었다. 그리고 꼭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보라색 눈에 비친 자는….
“오랜만에 뵙습니다, 폐하.”
오래전 그녀를 분노케 했던 남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