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25)
루비나드와 제빌은, 오랜 시간 함께해 온 만큼 의견이 갈리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언제나 제빌이 루비나드에게 맞추는 편이었다.
그러나 오늘.
“폐하, 이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니. 이게 제일 나아. 나머진 치우게.”
“하지만….”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팽팽하게 긴장되었다.
드물게도 단호한 말투로 루비나드의 의견을 정면에서 부정하는 제빌.
그런 제빌의 말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거칠게 반응하는 루비나드.
국방에 대한 의견을 나눌 때조차 이토록 팽팽한 적이 없었다. 어지간해선 두 사람의 생각이 일치했으니까.
하지만 이번엔 두 사람 다 양보할 마음은 없어 보였다.
“난 이런 건 질색이네.”
“제가 사는 것이니, 제 의견을 따라 주십시오.”
제빌이 강하게 자신의 의사를 피력하자, 루비나드의 입술이 비뚜름해졌다. 언제나 이쯤에서 물러났던 제빌 역시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쓰는 것 아닌가. 그러니 내 의견을 따라야지.”
“드레스에도 보석이 있으니 지금 폐하께서 고르신 예물은 너무 심플해서 묻힐 겁니다.”
“난 심플해서 좋다고 하는 거야. 다른 건 둘째 치고, 반지는 평소에 하고 다녀야 할 텐데 그대가 고른 건 너무 화려하잖나.”
두 사람의 앞에는 두 종류의 액세서리 상자가 놓여 있었다.
한쪽은 장식도 거의 없지만, 약간 푸른 빛이 도는 다이아몬드 목걸이, 귀걸이, 팔찌, 반지가 든 상자.
다른 한쪽은 강렬한 불꽃을 이미지 한, 크고 화려한 문양의 바탕에 레드 다이아몬드가 박힌 액세서리가 든 상자.
어제, 드레스를 시착한 후 고르려 했던 예물 중 루비나드는 블루 다이아몬드 세트를, 제빌은 레드 다이아몬드 세트를 예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사람 모두 의견을 굽히지 않아 결국 오늘 다시 이야기로 한 참이었다.
“폐하의 머리카락과도 잘 어울리고, 드레스가 하얀색이니 강렬한 붉은색이….”
“이게 좋아. 그대의 색이잖나.”
강경하던 제빌의 말문이 막혔다.
여기서, 갑자기? 그런 말을 하신다고?
“결혼 예물이니 그대의 색을 몸에 지니는 게 더 걸맞지 않겠어? 붉은색 다이아몬드는 그대를 위해 브로치로 만들도록 하지.”
문득 루비나드의 눈이 제빌의 목으로 향했다.
언제나 그의 목을 장식하고 있는 건, 그의 눈동자를 꼭 닮은 색의 리본과 흠집 가득한 보석 브로치였다. 꽤 낡은 것 같은데 차라리 리본까지 선물해 주는 게 나을까.
“이참에 리본도 새로 해 줄까?”
“…네?”
루비나드의 말에 나갔던 넋이, 루비나드의 말에 다시 돌아왔다.
제빌은 마치 그녀가 당장이라도 제 리본을 뺏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정색하며 브로치를 꽉 쥐었다.
“푸른색을 좋아하는 거라면, 이번에 커튼이나 침대 시트를 만들라 말해 둔 천으로 새 리본을 만들어….”
“괜찮습니다.”
딱 잘라 거절한 제빌이 슬쩍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루비나드와의 거리는 한참이나 먼데. 괜스레 심술이 난 루비나드가 불쑥 제빌에게로 상체를 숙였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한 발 더 뒤로 물러났지만, 그 거리조차도 순식간에 메워졌다.
“왜, 왜 그러십니까.”
하얀 귀가 발갛게 물들었다.
이미 그녀의 말이 준 충격만으로도 충분히 머리가 아찔했다. 그런데 이렇게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다니.
리본을 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그 리본이 뭐길래 그리 소중히 하는가 싶어서.”
리본.
이 리본은….
그런가. 폐하는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그러리라고 짐작은 했지만, 막상 실제로 그렇다는 걸 알게 되니 기분이 좋진 않았다. 제빌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몹시 소중한 분이 주신 겁니다.”
“소중한 분? 누구?”
제빌에게 정인이 있었던가?
아니, 그럴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고 스스로도 이야기했었다. 그녀에게 굳이 숨길 이유도 없었을 테고.
그럼, 대체 누구지?
“비밀입니다.”
“…나한테도?”
비밀이라며 생글 웃는 제빌의 얼굴이 예뻤다. 그건, 미소가 예뻐서만은 아니었다. 그 얼굴에 떠오른 행복함과 아련함 때문이었다. 누구를 떠올리기에 저런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걸까.
괜히 기분이 나빠졌다.
나는 그대에게 숨기는 것 따위 아무것도 없는데, 그대는 내게 비밀이 있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자 가슴 속 어딘가에서 울컥이는 감정이 밀려 올라왔다.
“네. 폐하께도 비밀입니다.”
제 손에 구겨진 리본을 예쁘게 펴며 미소 짓는 제빌.
루비나드는 울컥이는 감정이 무엇인지조차 깨닫지 못한 채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 * *
“방문해 주어 감사하오. 다음에도 록한의 수준 높은 예술을 감상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겠소.”
록한의 사절단이 떠나는 날이 왔다.
다프넬의 걸작은 끝내 세상에 드러내지 못했다. 다만, 하녀들 사이에서 제빌의 명령으로 고풍스러운 액자 하나가 불살라졌다는 뒷이야기가 돌았다.
천이 살짝 벗겨지면서 드러난 그림 속 인물은 붉은 곱슬머리였다고. 하지만 그림이 사라진 지금, 그 진의를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루비나드는, 다프넬에 대한 감정은 접어 둔 채 웃었다. 평소의 오만하고 나른한 얼굴 대신 당당한 얼굴로 외교 사절을 배웅하는 그녀의 얼굴은 꽤 늠름했다.
사절단의 대표인 디그로 역시 미소로 그녀의 배웅에 답했다.
“저희야말로 제국의 예술을 볼 수 있어 즐거웠습니다. 지난번에 방문했을 때와는 결이 많이 달라졌더군요. 다음이 기대됩니다.”
“식 참석을 위해 남으신 로그난 경 역시 불편하지 않게 모시다가 안전히 귀국하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제빌은 예비 국서이자 황제의 부관 자격으로 배웅 자리에 동석했다. 디그로는 감사의 표시로 예를 갖춘 후 포탈 속으로 사라졌다.
손님을 배웅한 황궁은, 또 다른 손님을 맞을 준비로 분주해졌다. 이제 곧 식 참석을 위해 각국의 귀빈들이 궁을 방문할 터였다.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서 모든 귀빈실을 대청소했다.
제빌의 방만 제외하고.
“이제 여기가 그대 방 같군.”
록한의 사절단을 배웅한 후, 책을 읽고 있던 제빌의 방에 루비나드가 찾아왔다. 셔츠와 바지만 입은 편한 복장으로 늘어져 있던 제빌이 깜짝 놀라 소파에서 일어났다.
물론 그 와중에도 청회색의 리본은 풀지 않고 있었다.
대체 누가 준 것이기에. 루비나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폐하.”
“모처럼 쉬는 시간을 방해해서 미안하네.”
정말로 변하지 않는 남자다. 예나 지금이나 여유가 생기면 꼭 손에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그 자세가 꽤 마음에 들었다.
제빌의 반대편에 앉은 루비나드가, 그가 손에 들고 있는 책 표지를 보았다.
「 퀘나르딘 산맥에서 발견된 새로운 약초에 관하여 」
거의 공작가의 계보에서 제명당할 뻔했던 쿠온가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 특수작물의 재배를 통해 영지의 경제를 활성화했고, 그를 통해 막대한 부를 쌓았다. 제빌의 제안으로.
“그대가 모르는 약초가 아직 남아 있었나? 하도 관련 책을 읽기에 세상 모든 약초를 다 알게 된 줄 알았어.”
“과찬의 말씀을. 하지만 아직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오지는 많고, 거기에서 새롭게 발견되는 동식물 또한 매년 수 종을 넘어섭니다. 그러니 끊임없이 공부해야 합니다.”
선황이 전쟁에서 내정으로 관심을 옮기면서 마탑도 살아남을 방도를 찾았다. 그러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게 특수작물이었다.
약초이기도 하고 독초이기도 한 그것들은, 마법을 사물에 부여할 때 역시 지대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당시 국가 지원을 받지 못하던 마탑이 구하기엔 몇몇 특수작물은 지나칠 정도로 비쌌다.
거기에 쿠온가가 등장한 것이다.
“새로운 특수작물을 찾는 건가?”
“네. 기존의 약초만으로는 부족해져서요. 다양한 상품을 갖춰야 경쟁력 역시 올라가지 않겠습니까.”
“그자들이 뭘 예쁘다고 그렇게까지 해 주는 거야. 그들이 부유해진다고 한들 이제 그대와는 상관없는 일이지 않나. 가주는 장자인 그대의 큰 형이 될 텐데.”
제빌은 엷게 웃기만 했다. 루비나드는 모르고 있었다. 아니, 세상 그 누구도 모른다. 현재 제빌이 쿠온 가문에 있어서 어떤 존재인지. 하지만 설명할 마음도 없었다. 그걸 알아내면 영리한 그녀는 무언가를 눈치챌지도 모른다.
루비나드는 대답 없는 제빌이 마뜩잖은 듯 인상을 찌푸렸다.
이 화제를 계속 유지하면 폐하의 진노를 사게 될 것 같은데.
그녀의 낌새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제빌이 책을 덮으며 말을 돌렸다.
“그보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아. 마탑에서 알현 요청이 왔다고 하는군. 베카르티 교수가 직접 사업 계획을 설명하고 싶다는 모양이야.”
“베카르티 교수가요…?”
제빌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베카르티 교수는 괴짜로 유명했다. 그 출중한 용모와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도 여전히 혼자인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그의 냉소적인 태도와 무례한 언사가 가장 유명했다.
-저는 마법사지 사무관이나 장사치가 아닙니다. 지원하기 싫으면 말지, 이래라저래라 명령하지 마시죠.
루비나드가 사업 계획서의 보완을 요청하며 반려하자, 그는 그렇게 말했었다. 불쾌해하는 제빌과 달리 루비나드는 뭐가 그리 마음에 들었는지 그를 따로 불러 만나기까지 했었다.
-그대의 서류로는 지원받기 합당한지 여부를 가릴 수 없었네. 그대를 내 밑에 두고 우습게 봐서도 아니고, 돈을 받으려면 아부를 떨라는 뜻도 아니었다네. 다만 짐은 이게 사업으로써 성립하는지를 확신하고 싶을 뿐이야.
연한 회색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를 지닌 마법사는, 마치 평가라도 하는 듯한 얼굴로 루비나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불쾌했던 제빌이 나서기도 전에 마법사는 고개를 숙였다.
-제가 오해를 한 모양이군요.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말씀하신 보고서는 다시 수정해서 내도록 하죠.
베카르티가 고개를 숙인 건 그날뿐이었다.
그 후에도 몇 번이나 서류나 지원 문제로 황궁과 부딪쳤고, 이 고집불통의 마법사는 그때마다 고개를 빳빳하게 든 채 조목조목 이치를 따졌다. 그때마다 제빌은 속이 터졌고 루비나드는 재미있어 했다.
“사업 계획부터 알현을 요청한 건 처음이라 조금 기대되는군. 내일 오후쯤 시간이 괜찮을 것 같던데, 그대도 괜찮나?”
제빌은 루비나드의 일정을 되짚어 보았다.
시간상으로 문제는 없겠지만, 사실 베카르티와는 그리 마주치고 싶진 않았다. 적의는 없는 것 같은데 묘하게 기분 나쁜 남자였기에.
뭔가 품평하는 듯한 눈으로 끊임없이 바라보는 것이….
“제빌?”
“아, 잠시 일정을 다시 떠올리느라…. 내일은 괜찮을 것 같습니다.”
“으음. 그럼 내일 아침에 서신을 보내 두도록 하지. 쉬는 데 방해해서 미안했어.”
“폐하께서도… 좋은 밤 되십시오.”
루비나드를 배웅한 제빌이 다시 소파에 앉았다.
신경이 쓰였다. 이상할 정도로.
그냥 보고서면 끝날 일인데 왜 알현을 요청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베카르티가, 굳이…?
“…조사해 두도록 하죠.”
거의 스칠듯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걸로도 충분했다.
루비나드조차 느끼지 못한 엷은 인기척이 사라졌다.
제빌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책을 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