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24)
연회가 끝나고 사흘 뒤, 결혼식 준비도 슬슬 막바지에 치달았다.
다프넬 왕자의 일화는 다행히 누구의 입에도 오르지 않고 조용히 사그라들었다. 제빌은, 앞으로도 혹여 잡음이 나오는지 계속해서 지켜보겠다고 했다. 루비나드는 고개를 끄덕이곤 대답 없이 서류에 파묻혔다.
아침부터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를 정리하느라, 정신을 차렸을 때는 시곗바늘이 벌써 오후 세 시를 지나고 있었다. 시간을 확인한 제빌이 오늘, 집무실에서 루비나드를 만난 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폐하. 삼십 분 후에 결혼식 관련해서 상단과의 면담이 잡혀 있습니다.”
“면담? 무슨 면담.”
“전에 보여 드렸던 예산안대로 물품이 제대로 준비는 되었는지, 부족하다면 대체는 가능한지 확인도 해야 하고 의상이나 액세서리도 확인하셔야죠.”
의상.
루비나드의 인상이 팍 찌그러졌다.
“그런 건 그대가 알아서 하면 안 되나?”
“물품 목록은 그렇다고 쳐도 의상은 안 됩니다. 사이즈나 실제로 착용했을 때의 느낌도 봐야 하니까요.”
귀찮은데. 루비나드는 손안의 서류를 넘기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어렸을 때부터 드레스라는 것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예쁘기는 하다만 치렁치렁하고 움직이기 힘들뿐더러 가격은 더럽게 비쌌다. 게다가 그놈의 속옷들은 어찌 그리 몸을 조여 대는지. 그런 걸 굳이 입어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어 검술 수업을 핑계로 편한 옷을 입고 다니곤 했다.
루비나드의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제빌이 단호하게 말했다.
“귀찮으셔도 하셔야 합니다. 결혼식에는 국내 귀족들뿐 아니라….”
또 잔소리가 시작되려고 한다. 제빌의 잔소리는 한 번 시작되면 좀체 끝날 줄을 몰랐다.
뭐, 다양하게 이야기하면 모를까. 무슨 세뇌라도 시키려는 것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그게 지긋지긋해서 황녀에게는 필요 없다며 물러 두었던 공부까지 열심히 하지 않았던가.
이번에도 루비나드는 그의 잔소리를 이기지 못하고 항복했다.
“알았어, 알았다고. 그대가 걱정하지 않아도 제대로 할 거야. 황제로서 힘과 위엄을 보여야 하는 중대한 국면이고, 얕보이면 안 된다는 거 잘 알고 있어.”
제빌의 흉내를 내는 걸까.
사뭇 진지한 얼굴로 투덜거리는 그녀가 귀여워서 웃음이 새어 나올 것 같았다. 게다가 오늘은….
제빌은 달아오르는 귓가를 살짝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책상 위의 서류가 오늘 보실 양의 전부이니 대충 시간에 맞을 것 같습니다. 중요한 부분은 언제나처럼 표시해 두었습니다.”
“으음.”
이래저래 일이 많았다.
루비나드는 국비로 각종 사업을 지원했는데, 일정 규모 이상의 사업은 모두 직접 결제를 한다고 선언했다. 어차피 큰 규모의 금액을 움직이려면 황제의 서명이 필요하니까.
거기에 제국의 속국이나 대공국들에서 올라온 행정 서류, 각종 대금의 결재 서류, 세금 관련 서류 따위가 하루에 적어도 수십에서 수백 건은 올라왔다.
결혼식 하루를 빼기 위해 기한을 당길 수 있는 일들은 모두 당겨 처리했다. 덕분에 그녀가 정신을 잃었던 하루 반 동안의 일이 밀렸는데도 여유가 있었다.
제빌이 어느 정도 제 선에서 정리해 뒀기 때문도 있지만.
“결혼식에 대한 건 그대에게 일임했으니 의상도 그대 눈에 차는 걸 고르면 될 텐데 말이야. 어차피 나는 그런 건 잘 몰라.”
“제 눈에 차는 걸로 골랐습니다. 폐하께서는 그냥 입어만 보시면 됩니다.”
“그 입는 게 귀찮으니 하는 소리 아닌가.”
“결혼식 당일 사이즈가 맞지 않으면 우스갯소리로도 못 쓸걸요.”
“끄응.”
결혼식이 벌써 이 주도 남지 않았다. 확실히 빠듯한 일정이긴 했다.
루비나드도 더는 투덜대지 않고 서류 훑는 속도를 높였다.
“이건… 저번에 그대가 말했던 ‘재미있는’ 사업에 대한 서류군. 사업 일정을 고쳐서 다시 보냈네.”
“네. 아이디어가 참신하고 실생활에 큰 도움이 되긴 할 것 같은데… 이번에도 사업 일정 면에서 무리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베카르티 교수는 전송 포탈의 개량에도 참여하고 있으니까요.”
국비 지원 사업에 가장 열성적인 건 마탑이었다.
과거 마법이 사용된 곳은 거의 다 전장에서였다. 대량 학살과 공성전에 특화된 공격 기술. 그 정도의 존재였다.
하지만 베카르티 교수를 필두로 한 몇몇 마탑 교수들이 실생활에 마법을 응용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록한 왕국이 연신 감탄했던 포탈 역시 마탑의 작품이었다.
“기간이 늘어나면 예산 지원도 더 필요하니, 이들이 할 수 있는 최저한의 기간을 잡아 낸 거겠지. 하지만 돈과 상관없이… 이 기술이 실용화된다면 제국민들의 삶의 질은 크게 향상될 것 같아.”
올라온 보고서는 음식을 보존할 수 있는 상자에 대한 것이었다.
마석으로 동력을 공급하고, 상자에 미리 빙결 마법을 약하게 걸어 두어 상하거나 썩기 쉬운 음식물을 오래 보존할 수 있게 만든.
“나쁘지 않아. 실현 가능성이 있는 기한으로 다시 잡아 보내라고 해. 돈이라면 어느 정도 들어도 괜찮으니까.”
“최대 예산 규모는 어느 정도로 잡으시겠습니까?”
“빙결 마법은, 그동안 마석으로 다루기 가장 어려운 마법으로 손꼽혔지. 그게 가능해진다면 확장 가능한 기술은 무궁무진해. 이번에 올린 보고서에서 추산한 예산의 세 배까지는 보증해 주도록 해.”
“알겠습니다. 마탑에 그리 전달해 두겠습니다.”
그 외에 제빌과의 대화가 필요할 정도의 서류는 없었다. 빠르게 훑은 뒤 서명하기를 한참. 그러는 사이 순식간에 삼십 분이 지났다.
텅 빈 책상 위를 보던 루비나드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가야겠지?”
“네.”
“후…. 알았어.”
단호한 제빌의 대답에 루비나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서류에 파묻혀 있을 때가 차라리 좋았다. 사업 계획안을 보며 머리를 굴릴 때는 그로 인해 확장 가능한 다른 사업까지 머릿속에 떠오르면서 즐겁고 행복했는데….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것처럼 축 늘어진 루비나드를 보며 제빌이 피식 웃었다.
“폐하, 위엄과….”
“체통을 지키라는 거지. 알고 있어.”
집무실 문 앞에 선 루비나드가 허리를 곧게 폈다.
이 안은 그녀에게 있어서 가장 마음이 편안한 장소였다. 하지만 이 밖은 이제…,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전장이었다.
불만 가득하던 눈동자에 오만함이 대신 들어찬다. 그녀는 평소의 당당한 황제의 얼굴로 돌아가 문을 열었다.
왼쪽으로 꺾어 얼마 지나지 않아 소알현실이 나타났다. 상인들을 만나기 위해 만들어진 소알현실 안은 생각보다 한산했다.
여러 가지 드레스로 꽉 차 있을 줄 알았는데.
처음으로 상단에서 드레스를 가져왔던 날이 아직도 기억난다. 데거베일의 사람 좋은 웃음에 이끌려 간 소알현실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옷 더미들.
-어떠냐, 루비나드. 네가 원하는 것은, 곧 네 것이 될 것이다.
처음에는 신이 나서 몇 벌이나 골랐었다. 그러나 이내 시들해졌다. 예쁜 걸 보는 건 좋았지만, 막상 입으려니 귀찮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예쁜 드레스를 입은 루비나드를 보며 함박웃음을 지으셨었지. 그 호전적이고 사나운 아버지가 그리도 환히 웃으시는 게 좋아 거부하지 못했었다. 이번에도 아버지는 웃어 주실까.
“제국의 태양, 영원한 영광을 뵙습니다.”
마네킹에 드레스를 세팅하고 있던 상인이 화들짝 놀라 루비나드 앞에 예를 갖추었다. 하지만 루비나드의 시선은 상인이 아니라 그가 매만지고 있던 드레스에 고정되어 있었다.
“으음. 그게 웨딩드레스인가?”
“네, 그렇습니다! 원래는 여러 시안을 보여 드리고 고르는 게 가장 좋지만….”
상인의 눈이 제빌에게로 향했다. 이해한다는 듯 루비나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짐은 그런 걸 그리 즐기지 않아서. 국서가 잘 처리해 준 것 같군.”
창문으로 들이치는 환한 햇살이 드레스 위로 흩뿌려졌다.
새하얀 드레스의 치마 부분은 의외로 심플했다. 다른 귀족 영애들이 입고 다니는 풍성한 치마를 상상했는데, 얇은 천이 여러 겹 겹쳐진 모양새였다. 보기에 썩 가벼워 보이는 데다 걸리적거리지 않아 보여 좋았다.
오히려 화려한 건 상체였다.
가슴이나 등을 깊게 파는 최신 드레스 경향과는 다르게 노출은 거의 없었다. 대신 보통 살결이 보이는 부분에 시스루 느낌의 원단이 있고 그 위를 자잘한 보석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어깨 역시 드러나지 않은 대신 새하얀 레이스와 진주로 잔잔한 꽃이 피어 있었다.
“…예쁘긴 한데 너무 화려하지 않은가?”
“제국 황제의 웨딩드레스니까요. 최대한 심플한 걸로 고른 겁니다.”
“으음, 하지만 레이스도 너무 많고 보석도 너무 많은데. 하긴, 저렇게 보석이 많아서야 반짝거리는 통에 내 얼굴은 거의 보이지도 않겠군.”
그게 차라리 나을지도 몰라. 그렇게 중얼거리는 루비나드를 보며 제빌은 그저 웃기만 했다.
상인 옆에 서 있던, 재봉 시녀가 제빌을 보며 말했다.
“전하, 잠시 자리를 비켜 주실 수 있겠습니까? 시착을 하시려면….”
“아. 그럼 전 잠시 후에 다시 오겠습니다, 폐하.”
“으음. 오래 걸리지 않길 바라야겠군.”
루비나드는 힘없이 중얼거린 후 드레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제빌이 문을 열고 나오자 얼마 지나지 않아 상인도 밖으로 나왔다.
“그대는 옆방에서 기다리십시오.”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전하.”
상인이 옆의 대기실로 옮겨 간 후에도 제빌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닫힌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 안에 루비나드가 있다. 자신과의 결혼식을 위한 드레스를 입기 위해. 그녀에 대한 마음을 처음 자각했을 때부터 꿈꿔 본 적도 없는 상황이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대가 왜 이러는지는 알고 있어. 주제도 모르고.
차가운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는 제빌과는 전혀 사정이 달랐다. 그럭저럭 집안의 힘도 있었고, 황녀의 남편감 후보로 이름이 오르내리기도 했다. 제빌은 그런 그가 부럽고, 미웠다.
-격이 맞는다고 생각해? 그대와 황녀 저하가? 포기하는 게 좋지 않나?
격이 맞지 않는다는 건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꿈꾼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 한편으로는 분명 말도 안 되는 꿈을 꾸고 있었다. 언젠가, 자신이 루비나드의 남편이 되는 꿈을. 그녀와 부부의 연을 맺고 평생을 함께하는 꿈.
마치 물거품 같은 꿈이었다.
-후작가에도 밀리는 몰락 직전의 공작가, 그것도 삼남. 황녀 저하의 남편감으로 이름조차 올리지 못하는 그대가 감히 내게 이런 조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주제넘은 일이라는 걸 정녕 모르는 거야?
그의 비웃음 가득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제빌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주제넘은 일이었다. 자신은 누군가를 질투할 자격조차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어쨌다는 걸까.
지금 루비나드의 곁에 있는 건 그가 아니라 자신이었다.
루비나드가 입고 있는 드레스는, 그녀의 신랑감 후보에 이름을 올렸던 수많은 공자와 영식들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떨거지 쿠온 가문의 찌꺼기, 제빌.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전하,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재봉 시녀가 문을 열고 제빌을 불렀다. 그는, 생각에서 빠져나와 소알현실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
제빌은 입구에 선 채 그대로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그 안에 있는 건 그가 꿈꿔 왔던 환상보다도 더 아름답고 환상적인 무언가였다.
수많은 드레스 도안 중 가장 루비나드에게 어울리는 옷을 골랐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잘못되었다.
루비나드가 입었다면 그 어떤 드레스라도 지금처럼 아름답게 빛났을 테지.
“이상한가?”
어색한 듯 웃는 얼굴조차 사랑스러웠다. 머리도 화장도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저 입고 있는 옷만이 평소와 달리 희게 빛나고 있었다.
상인은, 이 드레스를 고른 제빌에게 경고했었다. 상체에 보석이 많이 달린 옷이라 입은 이의 얼굴이 덜 돋보일 수도 있다고.
하지만 그는 틀렸다. 보석 따위로는 루비나드를 가릴 수가 없었다.
환하게 빛나는 보석조차 그녀를 위한 조명이었다. 하늘하늘한 치마도, 어깨를 감싼 꽃도 모두 그녀를 돋보이기 위한 장치에 불과했다. 루비나드는 그 어떤 것보다도 환하고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역시 너무 화려하지?”
“아니요.”
제빌이 계속 반응하지 않자 멋쩍었는지 루비나드가 치맛자락을 꽉 쥐며 물었다. 그제야 제빌은 고개를 내저을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해도 괜찮네. 내가 봐도 좀 어색하기에 그대 의견을 들으려 부른 것이니 말이야.”
제빌은 연신 고개를 저었다.
말을 꺼내야 하는데 머리가 하얘져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다만 그녀를 말려야 한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한참이나 할 말을 생각하던 제빌이 겨우, 그녀에게 가장 하고 싶은 말 한마디를 떠올렸다.
“폐하.”
“으음.”
“지금, 저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환하게 웃는 제빌의 얼굴은…, 루비나드조차 처음 보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