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20)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다프넬이 돌아간 후 적막을 깬 것은 제빌이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다. 루비나드가 황제인 이상 후궁은 반드시 구성해야만 하니까. 오히려 제빌 역시 그걸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왜…. 이토록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일까.
“으음….”
루비나드는 신중한 얼굴로 턱을 괴었다. 사르르 흘러내려 살랑이는 붉은 머리카락이 어쩐지 얄미웠다.
곧바로 거부 반응이 나오질 않는다. 그것은 루비나드 역시 다프넬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는 뜻이었다.
흔들리고 있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폐하께서는 이런 상황을 대비해 저를 국서로 들이셨습니다. 그러니 폐하께서 거절하신다면, 저는 있는 힘을 다해 폐하를 보필할 것입니다.”
담담한 듯 말했지만, 실오라기라도 잡고 싶은 기분이었다.
제발 이대로 루비나드가 제 말에 숨은 뜻을 눈치채고 거절의 말을 꺼내길 바랐다. 하지만 루비나드는 그가 바라는 반응을 돌려주지 않았다.
고개를 살래살래 저은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국서를 들여 후계를 만들라는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지. 내게 사랑을 갈구하는 이들을 상대할 여유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왕자는 그런 건 필요하지 않다고 하잖나. 친우에게 그런 걸 갈구하진 않겠지.”
당신이라는 사람은 어쩜 이토록 둔할까.
다프넬은 알고 있다. 왜 제빌이 자신의 마음을 숨기는지를. 그 눈치 빠른 남자는 제빌만 보고도 루비나드가 ‘사랑’을 방해물로 생각한다는 걸 알아챈 것이다.
게다가 다프넬의 마음은 절대로 친애의 정이 아니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는….
지금 왕자는 명백하게 루비나드를 향한, 이성으로서의 호감을 드러내고 있다. 루비나드가 거부하지 않도록 장난인 척 가볍게. 가랑비에 옷 젖듯 저런 표현에 익숙해진 루비나드가 언젠가는 그를 거부하지 않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제빌은 아니라고, 그 왕자에게 속고 있는 거라고 외치고 싶었다.
“왕자는 내게 자신을 이용하라고 했어. 그대를 국서로 앉힘으로써 국내 귀족의 불만을, 왕자를 후궁에 들여 동맹국의 신뢰를 얻을 수 있다면…. 내겐 나쁘지 않은 일이지.”
안 된다.
차라리 다른 남자라면 제빌도 이토록 반대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왕자만은 안 된다.
다프넬은, 쉬이 마음을 허락하지 않는 루비나드가 유일하게 호감을 느낀 남자였다. 지금은 설령 사랑이 아니더라도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바뀔지도 모른다.
제빌, 자신이 그랬듯.
게다가 그 왕자가 바라는 건 루비나드가 가장 꺼리는 것 중 하나였다. 그녀가 누구에게도 준 적 없는, 누군가에게 준다면 꼭 상대가 제빌이어야만 하는 그 감정을.
“일단 후궁이 만들어지면 국내 귀족들의 아우성 역시 커질 겁니다. 왜 타국의 왕자만 들이고 다른 후궁은 뽑지 않으시냐고.”
차분하게 반박해 보았지만, 이번에도 루비나드는 고개를 저었다.
“록한과의 동맹은 견고하지. 하지만 선대가 이룩한 것이야. 외교에서는 아직 나보다 아버지의 영향이 더 크네.”
루비나드가 자세를 바로 했다. 가볍게 기지개를 켜는 것을 보아 이미 생각 정리를 끝낸 모양이었다.
제빌에게는 불길한 몸짓이었다.
“이 결연으로 선대와 맺었던 동맹이 여전히 유효함을 알릴 수 있겠지. 록한과의 관계는 덤이고. 외교에서도 내가 힘이 있다는 걸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니 국내 귀족들은 설득해 봐야지.”
루비나드는 진심이었다. 진심으로 다프넬을 후궁에 들이려 하고 있었다.
제빌의 심장이 어린 날의 기억처럼 술렁인다. 그가 처음으로 두려움을 자각했었던 그날.
‘전부’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이번 이야기는 내게도, 왕자에게도 나쁜 이야기가 아니야. 어쩌면 그가 가장 적임일지도 모르지.”
제빌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마치 그녀의 말에 순응하겠다는 듯.
하지만 남색 머리카락 사이로 엿보이는 청회색의 눈동자는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 * *
“오늘도 날씨가 좋군요. 폐하께서 허락하신다면, 후원에서 그림을 그려도 될까요?”
“상관없네. 후원은 공개된 장소니 그대가 뭘 한다 해도 말리지 않을 거네.”
언제 이야기를 꺼낼까.
제빌의 초조함과 달리 다프넬은 느긋했다.
“아, 감사합니다.”
차를 가져온 시녀, 세비안에게 하지 않아도 될 감사 인사를 할 정도로. 시녀는 조금 놀란 눈으로 다프넬을 보더니 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루비나드가 특히 아끼는 시녀인 만큼 금세 제 감정을 지우고 방 밖으로 나갔다.
루비나드는 초연한 얼굴로 영양가 없는 잡담만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세월이란 많은 것을 바꿔 놓는다. 무언가를 숨긴다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던 맑은 소년은, 이제 능구렁이가 되어 있었다. 그게 왜 루비나드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일까.
“국서 전하께서는 예술을 즐기십니까?”
갑자기 이야기가 제빌에게로 튀었다. 마치 그가 딴생각하고 있음을 안다고 말하는 것 같은 타이밍. 제빌은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저는….”
“제빌은 책밖에 모르는 고루한 사람이네. 예술은 잘 모르지. 관심도 없고.”
루비나드의 기억 속 제빌은 언제나 책을 들고 있었다.
그저, 그녀를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해 책을 읽게 된 것뿐이었는데. 제빌의 입꼬리가 일그러졌다.
처음엔 시간 때우기였지만, 점차 책에 빠져든 건 맞았다. 그 안에는 제빌이 모르는 세계가 펼쳐져 있었으니까. 그가 황태자와 같은 교육을 받은 루비나드에게, 처음부터 지금까지 뒤처지지 않고 따라갈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책에서 습득한 지식 덕분이었다.
“폐하를 보필하는 데 예술은 별로 쓸모가 없잖습니까.”
“하긴. 그건 그렇지. 나도 예술을 즐길 시간은 없으니.”
돌려 까는 말을 루비나드가 받아 줬다는 환희도 잠시.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건, 제빌의 앞에서만 보여 주는 미소였다. 어딘지 사람을 설레이게 만드는 무방비한 미소.
반사적으로 제빌이 다프넬을 보았다. 그는 태연한 척하고 있었지만, 귀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제빌은 자신에게만 허락된 미소를 훔쳐본 무법자를 노려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역시 두 분께서는 오랜 세월을 함께하신 만큼 잘 맞으시는군요.”
“그저 긴 세월을 보내기만 한 게 아니니 더 그렇지. 짐이 황태녀의 자리에 오른 후부터는 거의 매일 붙어 있었으니.”
“그렇죠….”
다프넬은 어딘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답지 않은 표정에 루비나드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는가.”
“아…, 실은…. 오늘 폐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래 드릴 수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
다프넬이 쭈뼛거리며 꺼내 든 것은 하프와 닮은 악기였다. 하지만 하프보다는 훨씬 작았다. 루비나드가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신기하군. 이건 무엇인가?”
“‘리라’라고 합니다. 이렇게 작지만, 하프의 음색과 비슷한 소리가 나지요.”
“호오, 그걸 연주해 주려 한 건가.”
다프넬이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어릴 때 동행한 신하에게 혼나던 그의 얼굴과 꼭 닮아 있었다. 신경 써서 악기를 가져온 그의 앞에서 예술은 잘 모르겠다는 둥의 이야기를 했으니.
루비나드는 피식 웃곤 그에게 말했다.
“그대의 연주라면 꼭 들어 보고 싶군. 음악을 잘 모르는 짐의 귀에도 좋았으니까 말이야. 들려 줄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기운 없는 얼굴은 어디 갔는지, 다프넬이 환하게 웃었다.
그 모든 것이 제빌의 눈에는 하나의 연극으로 보였다. 그저 가증스럽기만 하다. 당장 저 악기를 빼앗아 현을 모두 끊고 부숴 버리고 싶었다.
제빌의 마음이야 어떻건, 다프넬은 악기를 고쳐 쥐고 부드럽게 현을 쓸었다.
“정말로 하프 같은 음색이군.”
루비나드가 제빌에게 얼굴을 가까이하고는 작게 속삭였다. 제빌은 엷은 웃음으로 답하고 입을 다물었다. 은은한 선율이 둘 사이를 감쌌다.
짙은 피부, 금색 머리카락의 미청년이 진중한 얼굴로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은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볼거리였다. 거기에 감탄과 함께 선율에 빠져드는 미녀의 모습이 어우러지자 한 폭의 그림이 된다.
그 속에서 남색 머리카락의 청년만이 으득, 이를 악물었다.
* * *
어제는 결국 다프넬의 연주를 듣는 것으로 여유 시간을 모두 보냈다. 다행히 남은 서류가 적지 않아 다과회는 금방 끝났지만….
-왕자의 예술적 소양은 어린 시절 이상인 것 같군. 하긴, 어릴 때는 풀피리를 불어 준 게 다였으니 정식 악기와 비교하면 안 되겠지만.
그가 연주한 곡 중 하나는, 어린 시절 다프넬이 풀피리로 들려준 곡과 같은 것이었다. 그때가 떠올랐는지 서류에 서명하면서도 루비나드는 계속 다프넬의 이야기를 했다.
처음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 집무실에 있는 동안 공무 이외의 화제로 이토록 이야기한 것은. 아니, 루비나드와 만난 후로 다른 사람을 화제로 두고 이렇게 오래 이야기한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
싫은 티조차 내지 못하고 제빌은 그녀의 말을 모두 들어야만 했다.
그의 주인이 다프넬을 후궁에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이상, 제빌은 국서로서 다프넬을 품어야만 했다.
정비인 그는 후궁의 관리자가 되어야만 하니까.
“…후우.”
오늘도 또 다프넬과의 다과가 예정되어 있었다.
아무리 국빈이라지만 지나치게 잦은 횟수다. 이제 연회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아마도 오늘, 모든 것이 결정되겠지. 집무실을 나온 제빌은 마치 가슴 안을 가득 채운 것을 터뜨리듯 큰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였다.
“안녕하십니까, 국서 전하.”
다프넬의 목소리가 들린 것은.
“…다프넬 저하.”
“이제는 제가 전하의 아랫사람이 될 텐데 편히 불러 주세요.”
생글생글 웃는 흑갈색 눈동자가 싸늘했다. 제빌의 눈동자만큼이나.
“로간 제국을 찾아 주신 소중한 국빈이시니까요. 아직 저도 국서로 정식 책봉된 것이 아니고, 저하께서도 아직 이야기가 마무리되지 않으셨으니 그때까지는 예를 지키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정중한 말투. 하지만 가시는 꽤 날카로웠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다프넬이 엷게 웃었다.
“국서 전하께서는 여전하시군요.”
“….”
어린 시절 다프넬의 눈에는 자신이 어떻게 비쳤을까.
루비나드의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는 하찮고 불쌍한 소년? 아니면 귀찮은 벌레? 어쩌면 제빌의 모습 따윈 사실 제대로 기억조차 하지 못할지도.
제빌이 대꾸하지 않자 다프넬이 어깨를 으쓱했다.
“나쁜 뜻은 아니었습니다, 전하. 기분 상하셨다면 사과드리지요. 그보다….”
다프넬의 시선이 집무실 쪽으로 향했다. 밖의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지 아직 반응이 없지만, 언제 그녀가 나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야기를 이어 가기엔….
다프넬이 가져온 게 썩 좋지 못한 이야기였다. 최소한 제빌에게는.
“자리를 좀 옮길까요? 전하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청회색 눈동자가 가늘게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