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17)
숙청은 조용히, 그리고 빠르게 진행되었다.
론디아스의 공범으로 지목된 에넥스 후작은 멸문에 가까운 처벌을 받았다. 그들은 돈이 그런 용도로 사용될 줄 몰랐다고 항변하였으나, 연락책을 맡았던 몽셸락의 증언은 달랐다.
-론디아스 저하께서는 분명 서신에 ‘길드에 의뢰하고 싶은 일이 있다. 그대들에게도 득이 될 일이니 금전을 지원해 주었으면 한다. 만약 이를 거부한다면 붉은 새의 편이라 생각하겠다.’라고 쓰셨습니다.
론디아스가 일을 의뢰할 만한 길드.
그것도 거금이 필요한.
조금만 머리가 돌아가도 암살자 길드를 떠올리리라. 그걸 몰랐다고 하면 자신이 천하의 멍청이라 말하는 셈이었다.
게다가 그가 말한 서신은 에넥스 후작가의 서재에서 나왔다. 후작은 서신을 본 적도 없다며 절규하였으나, 필적 감정 결과 작성한 이는 틀림없이 론디아스 본인이었다.
-폐하! 제가 얼간이도 아니고 그런 서신을 서재에 보관할 리 있겠습니까? 이건 모함이며 함정입니다!
에넥스 후작의 항변은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제빌이 반박했다.
-지금 같은 상황을 대비한 걸지도 모릅니다. 황제 시해의 죄는 경중을 따지는 것조차 송구할 정도의 중죄. 증거가 확실하면 증언만으로도 처벌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처럼 모함으로 몰아가기 위해 남겨 두었다 생각하는 게 타당하겠지요.
-무슨 말씀을…! 국서 전하, 저는 그런…!
-아니라면 증명해 보십시오. 에넥스 후작가는 무력으로 로간 제국에서 손꼽히는 명가. 그 사병단을 모두 뚫어 내고 서신을 서재에 넣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말입니다. 그걸 할 수 있는 건 누구인지도.
후작의 말문이 막혔다. 제빌의 말대로였다.
후작가에서 일하는 사용인은 철저한 신원보증을 통해 극소수만 선별했다. 그러니 그들이 포섭당해서 무언가를 했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그렇다고 서신을 저택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서재에 몰래 두고 나갈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가 있다고 생각하기도 어려웠다. 무예의 실력이 뛰어나다고 잠입에도 뛰어난 건 아니니까.
결국, 그들의 뛰어남이 그들의 유죄를 증명하는 꼴이 되었다.
-안타깝군, 후작. 짐도 선황께서도 에넥스의 힘을 높게 평가하였으나, 그게 태양을 항해서야 곤란하지.
루비나드는 주동자인 에넥스 후작가와 가장 많은 돈을 후원한 로이카나 후작가, 두 곳에 가장 강한 처벌을 내렸다. 그 외에 얽힌 다른 가문들에게도 죄의 경중을 따져 책임을 물었다.
모든 게 끝난 건 암실 시도가 있었던 날로부터 겨우 닷새가 지난 후였다.
“폐하.”
“음?”
그 날, 론디아스의 죽음을 알리는 서신이 도착했던 날로부터 겨우 이틀이 지났다.
루비나드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하지만 제빌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강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루비나드가 지금까지 론디아스를 내버려 둔 이유 역시 그랬다.
지금까지 장자가 아닌 이가 황위를 이었을 때 장자를 살려 둔 역사가 없었다. 화근을 미리 제거하는 것은 황제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루비나드는 그를 살려 두었다.
그가 자신의 오라비였기에.
그녀는 차갑고 냉정한 사람이었지만, 제 사람에게는 묘하게 무른 면이 있었다. 그런 그녀가 가족의 죽음에 무덤덤할 리 없었다.
“오늘 날씨가 좋습니다.”
“그런가?”
루비나드가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해가 쨍쨍하지는 않았지만, 푸른 하늘을 수놓은 하얀 구름이 꽤 보기 예뻤다.
그녀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스몄다.
“그렇군.”
“…그, 오늘 서류도 슬슬 마무리되어 가는데 괜찮으시다면….”
“음?”
이어지지 않는 말에 루비나드가 고개를 갸웃했다.
제빌의 말문이 막히는 건 드문 일이었다. 게다가 말을 하다가 멈추는 건 더더욱. 루비나드가 손에 든 펜을 놓고 제빌을 보았다.
“…데.”
“데?”
목이 탁 막힌 것처럼 뻑뻑했다. 입을 여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바람이 드는지 시리고 울렁거렸다. 제빌은 깊게 심호흡을 하고, 제 손을 폈다 쥐었다 하며 한참을 침묵했다.
왜 이 한 단어가 잘 나오질 않을까. 몇 번이나 연습했는데.
겨우 단어 하나일 뿐인데.
“왜 말을 하다 마는 건가, 제빌 경.”
“그러니까… 데….”
“데?”
“데… 데… 데이트라도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데이트…?
루비나드의 고개가 다시 기울어졌다.
“데이트?”
“남녀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정을 쌓는 것을 말합니다. 폐하께서 괜찮으시다면, 오늘 황립 식물원이 휴관이니….”
같이 가시는 건 어떻습니까.
거기까지 말하고 싶었는데 숨이 모자랐다. 아니면 확실히 말을 끝맺는 게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제빌은 어설프게 말을 흐렸다.
거절당할지도 모른다. 지금의 루비나드는 사실 데이트 같은 걸 할 정신이 없을 테니까. 오히려 혼자 있는 시간을 원할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제빌은 그 청을 내뱉었다.
죄책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힘들 그녀에게 힘이 되어 주고 싶다는 마음이 더 강했다.
“휴관이니?”
설마 무슨 뜻인지 못 알아들으신 건가. 청회색 눈동자가 주인을 향했다.
그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스며 있었다. 보기 드문, 장난기 가득한 미소였다. 그 미소에 힘을 얻기라도 한 것처럼 울렁이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는 심호흡과 함께 말을 이었다.
“…함께 산림욕이라도 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그대와 함께?”
“네.”
흐음, 하고 루비나드가 손가락으로 턱을 쓸었다. 그녀의 입가에 여전히 맺혀 있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가 얄미웠다.
“그대가 정 원한다면 못 갈 건 없지.”
“폐하께서 싫으시면 됐습니다.”
으스대듯 나온 대답에 제빌이 딱 잘라 말했다.
귓바퀴가 발갛게 물든 것이 꽤 창피했던 모양이다. 투정 부리듯 나온 말에 루비나드가 다급해졌다.
“아니, 장난이었어. 그대가 데이트라는 단어를 쓰니 괜히 놀리고 싶어져서…. 나도 그대와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생각하던 참이네.”
흐음, 하고 생각하는 척하던 제빌이 루비나드를 흘긋 곁눈질했다. 그녀는 초조한 듯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또 귀여워서 피식 웃음이 흘러 버렸다.
“…왜 웃는 건가.”
폐하께서 너무 귀여우셔서요.
부루퉁한 얼굴에 그리 대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아직 이르겠지. 제빌은 제 진심을 꾹 삼킨 후 웃으며 대답했다.
“폐하께서 함께해 주신다니 너무 기뻐서요. 그럼 어서 마무리하고 가지요. 저는 고레야스 경에게 이야기하고 오겠습니다.”
정중하게 예를 갖춘 뒤 집무실을 나서는 제빌의 뒷모습은 꽤 들떠 보였다. 하지만 루비나드는 그의 감정을 채 읽지 못하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저 제빌이 데이트이니 어쩌니 뜬금없는 소리를 하며 저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려는 이유야 짐작이 갔다. 론디아스의 사망 소식에 침울해진 그녀를 위로하려는 거겠지.
그리고 그의 짐작대로 루비나드는 꽤 마음이 가라앉아 있는 상태였다.
“…고마워, 제빌.”
그렇게 중얼거린 루비나드가 반짝 눈을 떴다. 그리고 다시 펜을 들었다.
한시라도 빨리 일을 마치고 제빌과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 * *
“하…. 확실히 조금 숨이 트이는군.”
크게 기지개를 켠 루비나드가 흐트러진 자세로 의자에 앉았다.
평소라면 누가 볼지도 모르니 예의를 지키라고 잔소리했을 제빌도 오늘만큼은 조용했다. 두 사람 사이에 한참이나 정적이 흘렀다.
생각해 보면 일할 때의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이 감돌 때가 많았다. 하지만 사적인 시간을 보낼 때는 언제나 이야기꽃이 피곤 했다. 대부분은 제빌이 먼저 운을 띄웠었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던 루비나드가 문득 입을 열었다.
“제빌 경, 그대는 꽃을 좋아하는가?”
이참에 제빌에 대해서 좀 알아보도록 할까.
그런 생각에 던진 질문이었다. 제빌은 그녀가 선호하는 커피콩의 산지까지도 꿰고 있는데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다니. 이렇게 불공평한 일이 어디 있을까.
평소엔 물어봐도 ‘그런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라던가, ‘폐하께서 아셔야 할 정도의 일은 아닙니다.’라고 대답하기 일쑤였다. 그 대답이 벽을 치는 것 같아 괜스레 서운해서 어느 순간부터는 아예 묻질 않았었다.
이번에도 역시 그런 대답이 돌아오는 걸까.
루비나드의 걱정이 무색하게, 제빌은 기쁜 듯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꽃도 좋지만, 정확히는 식물이 좋다고 해야겠지요.”
물론, 거짓말이었다.
제빌은 식물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세상의 모든 식물이 말라 죽었으면, 하는 마음마저 품고 있었다.
물론 이유는 루비나드였다.
그녀는 가끔 꽃이나 나무를 보러 후원으로 발길하곤 했다. 그때마다,
-으음, 잘 자랐군. 앞으로도 쑥쑥 커서 내게 늠름한 모습을 보여 주게.
라며 친근한 목소리로 말을 걸곤 했다.
이제 내겐 그런 다정한 눈빛 보여 주지 않으시면서. 가슴 속 가득 질투심이 끓어올랐다. 하지만 식물에게 질투를 한다는 바보 같은 소리를 어찌할 수 있을까.
게다가 루비나드가 좋아하는 걸 싫어한다고 할 생각은 없었다.
“으음. 식물은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지. 며칠 자리를 비웠을 때 단단한 씨앗을 뚫고 싹을 틔우거나, 조그만 떡잎이었던 것이 쑥 커서 꽃까지 피워 낸 모습을 보면 정말 사랑스러워.”
생명이 태어나고 자라는 모습은 언제 봐도 경이로웠다. 그 신비에는 가슴이 벅차오르는 무언가, 감동 같은 것마저 느끼고 만다.
문득 루비나드의 눈이 제빌에게로 향했다.
“그러고 보면… 그대도 키가 많이 컸지.”
키만 큰 건 아닌데.
게다가 제빌이 그녀의 키를 넘어선 건 구 년도 전의 일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나보다도 작았는데 말이야.”
“벌써 이십삼 년 전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렇지….”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지.
몰랐던 건 아니다. 다만 세월이 가는 게 참 빠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루비나드는 아직 그 시절에 머물러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제빌이 이렇게 커 버렸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있었겠지.
문득 루비나드가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왜 그러십니까.”
또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시려고.
제빌이 경계하는 얼굴로 묻자 루비나드가 웃으며 답했다.
“내가 지켜봐 온 성장 중에 최고를 꼽자면 그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저, 말입니까?”
“키나 몸집이 비교할 바 아니게 성장하지 않았나. 몸뿐 아니라 지식도 성장했지. 게다가 어릴 땐 예쁘다 커서는 밉게 변하는 이들도 많다던데….”
한참 말을 하던 루비나드의 입술이 멈췄다.
마주친 청회색 눈동자가 묘한 빛을 띠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기도 하고 사납게 일그러질 것 같기도 하다. 아니, 매달리는 것인가? 뭐라고 딱 잡아 말하긴 어렵지만 광포하면서도 애절해 보였다.
순간적으로 말을 잊은 그녀에게, 제빌이 다음을 재촉했다.
“많다는데…, 저는 어떻습니까?”
“어… 어? 아, 많다는데 그대는….”
제빌의 재촉에 재차 입을 연 루비나드가 다시 한 번 멈췄다.
어디선가 기척이 느껴졌다. 그들이 있는 온실의 입구에서. 하지만 친위대가 지키고 있어 누구도 출입할 수 없을 터.
잔뜩 긴장한 루비나드의 시선이 온실 입구로 향했다. 제빌의 시선 역시 그쪽을 향했다. 그리고 나타난 것은….
“어?”
“의외의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