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16)
덜덜 떠는 목소리가 들린 뒤, 허가도 기다리지 않고 벌컥 문이 열렸다.
론디아스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짙은 남색이었다.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못 본 지 십여 년이 지났으나 놈의 재수 없는 얼굴은 여전했다.
모든 것을 가졌던 그가 유일하게 가지지 못했고, 아무것도 없던 루비나드가 유일하게 가졌던 것.
론디아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들어오십시오, 폐하.”
마치 공기가 된 것 같다. 제빌은 그가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방 안을 훑어본 후 제 뒤를 향해 말을 걸었다.
그 뒤에 들어온 것은 밉디미운 계집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라버니.”
루비나드는, 마지막으로 봤던 그날과 달라진 게 없었다. 그래서 론디아스의 심기가 더 틀어졌다.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온 주제에. 뭐 저리도 담담하단 말인가.
어차피 강자는 자신이고 론디아스는 약자이기에 신경 쓸 필요도 없다는 걸까. 배배 꼬인 생각만이 머리를 맴돌았다.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황제 폐하.”
비아냥거림이 섞인 걸 어찌 모를까. 루비나드는 적의에 특히 예민했다.
론디아스가 그녀를 볼 때마다 멸시하고, 무시하고, 비아냥거린다는 것쯤이야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오늘은 그 정도가 더 했다.
시종이 사라진 시점에서 아마 알았을 터였다. 루비나드가 모든 걸 알게 되었다는 걸. 그러니 루비나드는 쓸데없는 설명을 단축하고 시간을 절약하기로 했다.
곧, 먼 길을 떠나야 할 오라버니를 위해.
“제가 온 이유는 이미 알고 계시겠지요.”
“미천하고 어리석은 저로서는 가늠조차 어렵군요. 이 부족한 것을 밀어내고 장자 계승의 전통마저 깨부수고 황좌에 앉으신, 유능하고 우아하신 폐하께서 알려 주시지요.”
으득. 제빌이 이를 갈았다.
자포자기한 론디아스가 고약한 언행을 할 건 예상했다. 하지만 저렇게 더러운 비아냥을 쏟아 낼 줄은 몰랐다.
그가 폐위된 건 자신의 잘못 때문이었다. 그간의 행실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지금 그는 루비나드에게 그 허물을 씌우려 하고 있었다. 생각한 것보다 더 비열하고 더러운 놈이다.
제빌은 당장이라도 검을 뽑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루비나드를 보았다. 그녀는 가라앉은 눈으로 입을 열었다.
“이유를 물으면 답해 주시겠습니까.”
“이유? 이미 다 알고 있지 않나.”
론디아스의 눈동자에 독기가 서렸다. 지금까지 루비나드가 받아 온 적의는, 어린애 장난으로 느껴질 정도의 적의.
론디아스의 진짜 맨얼굴이었다.
“폐하의 앞입니다. 말조심하십시오, 저하.”
“그럼, 그럼. 위대하신 황제 폐하를 내 어찌 감히 건드릴 수 있겠어? 안 그래?”
마치 제빌에게 묻는 듯한 말투였다. 하지만 눈은 루비나드를 향해 있었다.
가는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오라버니께서 폐위되신 건 그 정도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자비로 그 목을 부지하고, 이런 생활이나마 유지할 수 있었던 게 아닙니까. 왜 이런 짓을 하신 겁니까.”
차라리 론디아스가 자신을 노렸다면 이해라도 갔을 것이다.
겨우 제빌과의 결혼을 막고자 이런 짓을 저질렀다는 게 이해가 가질 않았다. 루비나드의 씁쓸함 가득한 목소리에 독기 어린 목소리가 이어졌다.
“내 자리였다. 지금 네 자리가 내 것이었단 말이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던, 한낱 장사 도구에 불과한 네가 앉을 자리가 아니었다.”
론디아스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제빌 역시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마치 루비나드를 지키려는 듯한 움직임에 론디아스가 비웃음을 띠었다.
“단 한순간의 실수로 잃은 내 모든 것을 앗아 간 너. 그리고….”
론디아스의 눈동자가 제빌을 향했다. 그는, 청회색이 무색할 정도로 활활 타오르는 것 같은 눈동자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 발자국만 더 앞으로 나와라. 조금이라도 폐하께 위해를 끼친다면 그대로 베어 버리겠다. 그런 살기가 가득 차 있는 눈동자였다. 론디아스는 그런 그를 놀리듯 손을 양옆으로 뻗어 보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황태자였던 내게 건방진 소리를 내뱉던 저놈. 내가 세상에서 가장 증오하는 두 사람이 결혼한다는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느냐. 당연히 선물을 해야지.”
“저희에게 보낸 습격자가 그 선물입니까.”
“그런 셈이지.”
틀렸다. 오라버니는 완전히 미쳐 버렸다.
최소한 루비나드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몽셸락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유일하게 이해 가지 않았던 부분이 동기였다. 차라리 황제의 자리를 되찾기 위해서 루비나드를 노렸다고 하는 게 나았다. 이런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이유를 대는 것보다는.
더는 들을 필요도 없었다. 보라색 눈동자가 차갑게 굳었다.
“…렇게 보지 마.”
얼음덩어리처럼 차가운 눈으로 보는 건 제빌만으로도 충분히 거슬린다.
언제나 걱정하는 듯한 눈으로, 건방진 눈으로 보던 제 여동생마저 그런 눈동자로 자신을 보는 건….
론디아스가 이를 으득 갈며 소리쳤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그건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너희 연놈들이 뭐가 그리 잘났는데? 너희가 나랑 뭐가 그렇게 다른데! 그 한 번의 실수가 너희에겐 없을 거라 생각해? 너도 나와 같아. 단 한순간으로 모든 걸 다 잃을 거야. 모든 걸!”
제빌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수도 없이 상상했다. 자신이 한 행동들을 알면 루비나드는 그를 용서하지 않을 터였다. 설령, 그게 루비나드를 위한 행동들이었다고 해도. 그리고 루비나드가 그 모든 것을 다 알게 된다는 건….
제빌에게 있어서는 ‘모든 것을 잃는 것’이었다. 죽음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제빌은 무의식중에 감정을 삼켰다. 루비나드는 호의에는 둔하지만, 적의나 악의에는 예민하다. 혹여 제가 잘못 감정을 흘렸다가 그녀가 알아채게 할 순 없었다.
자신의 더러움을.
“오라버니의 뜻은 잘 알았습니다.”
루비나드는 제 오라비의 어리석음을 더 이상 좌시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를 위해서도, 제빌을 위해서도.
그녀는 최후까지 망설였던 한마디를 내뱉었다.
“죄인 론디아스 디 테비시안에게 명한다. 그대를 성도에서 추방한다. 디에고리 공작령의 루그라디아에의 유배형에 처한다.”
루그라디아라니. 들어 본 적도 없는 지명이었다. 다만 그가 저지른 죄명을 생각해 보면 아마 성도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리라.
론디아스가 비웃음을 띤 채 이죽거렸다.
“그럴 바엔 차라리 죽이지 그러십니까, 폐하. 들어 본 적도 없는 시골구석에 처박혀서 썩어 가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어.”
평소라면 곤란하다는 듯 입바른 소리를 내뱉었을 그녀였다. 위선자니까.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오만함조차 비치지 않는, 경멸 가득한 눈동자로 론디아스를 보고 있었다.
“사람들 앞에서 형을 내리지 않은 것이 짐이 줄 수 있는 유일한 자비다.”
그녀의 말투가 여동생의 것이 아닌, ‘황제’ 루비나드의 것으로 변해 있었다.
론디아스는 깨달았다.
지금 그녀의 마음속에서 그는 더 이상 오라비가 아니게 되었다는 것을.
“형 집행 준비는 이미 끝났다. 죄인은 바로 마차에 오르도록.”
그 한마디만 남겨 둔 채 루비나드는 방을 나가 버렸다. 론디아스가 그녀에게 덤벼드는 순간만을 기다리던 제빌도 아쉬운 마음을 접고 방을 나섰다.
“유배형은 너무 원만한 처벌이 아닐지요. 황제 시해 미수범인데.”
“그의 위치가 공작만 되었어도 그랬겠지. 하지만 그는 황가의 핏줄이다. 그것도 장자인. 신의 핏줄을 함부로 해할 순 없는 노릇 아닌가. 게다가 저 오만하고 독선적인 남자에게는 유배가 죽음보다도 더 굴욕일 것이야.”
루비나드의 말이 옳았다. 그렇기에 제빌은 걱정되었다.
궁지에 몰린 쥐는 기회조차 기다리지 않는다. 그저 죽기 살기로 물어뜯을 뿐. 저런 얼간이라도 일단은 이 제국의 적통 후계자니까.
그러니….
“폐하의 뜻이 그러시다면.”
내가 손을 쓰는 수밖에. 제빌은 정중한 목소리로 대답한 후 주인의 뒤를 따랐다.
* * *
“빌어먹을 놈들.”
론디아스의 입에서 또 욕설이 튀어나왔다.
유배지까지의 호위라던 기사 놈들은 처음부터 론디아스를 희롱했다.
적자 주제에 황좌를 빼앗긴 얼간이라는 둥, 그런 주제에 포기도 모르고 감히 황제 폐하를 노린 멍청이라는 둥, 생긴 것부터 이미 비열하고 치졸하게 생기지 않았냐는 둥.
갈 길이 멀다 하면서도 미적대는 놈들을 두고 보기가 힘들어 먼저 마차에 올라 출발해 버렸다. 마부는 자신이 태운 자가 대역 죄인이라는 건 모르는 듯 순순히 론디아스의 억지에 따라 마차를 몰았다.
“내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면 쳐다보지도 못했을 버러지들이.”
마음 같아선 기분을 거스르는 놈들을 한데 모아 개미를 짓누르듯 짓눌러 버리고 싶었다. 가해지는 압력에 고통스러워하다 끝내 톡, 톡 하고 터지는 그 꼬락서니를 보는 건 틀림없이 즐겁겠지.
론디아스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스몄다.
어차피 이젠 잃을 게 없다. 죽는다 한들 지금 받는 처우보다는 나으리라. 그렇다면 왕도에서 가장 먼 땅에서, 루비나드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황좌를 되찾을 힘을 비축하겠다.
그리고 언제가 되든 반드시 저 성도로 돌아가리라.
황좌를 손에 넣기 위해.
“으, 으아악!”
그런 생각을 하는 론디아스의 귀에 비명이 들렸다.
무슨 일이지? 짧은 생각을 채 끝내지도 못했는데 마차 문이 열렸다. 거기에는 딱 보기에도 산적스러운 행색의 남자들이 몰려들어 있었다.
“안녕하신가? 잠시 검문이 있겠습니다.”
남자는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론디아스에게 손짓했다.
이젠 별 버러지 같은 것들이….
기사들을 부르려 입을 열었다가 아차, 싶어 다시 닫았다. 그놈들은 아직도 이전 마을의 술집에서 부어라 마셔라 하는 중일 터. 론디아스는 입을 꾹 다문 채 불한당들을 노려보았다.
“어쩔씨구? 지금 분위기 파악이 안 되나 보네? 뒈지기 싫으면 내리라고, 새끼야.”
남자가 마차 위로 올라오더니 론디아스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번개같이 빠른 몸놀림에 순순히 제 목덜미를 내준 그였으나, 뒤늦게나마 벗어나기 위해 손을 뒤로 뻗었다.
하지만 힘의 차이가 너무 컸다. 남자가 휙 하고 손을 털었을 뿐인데 어느새 론디아스는 흙바닥 위를 구르고 있었다.
“저하…!”
그때였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 것은.
흙바닥 위에서 버둥거리고 있던 론디아스는, 소리가 난 쪽을 보았다. 거기에는 제 겁쟁이 시종이 서 있었다.
“너, 너 이 빌어먹을…!”
“괜찮으십니까, 저하!”
그는 놀란 얼굴로 달려와 검을 빼 들었다. 그 눈에 날카로운 투기가 감돌고 있었다.
이놈이 왜 여기 있는 거지. 날 구하러 온 건가? 그렇다는 건, 설마 그 얄미운 연놈들에게도 아무 말 하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도망쳤다가 몰래 마차를 따라온 건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대역 죄인을 도운 그가 사형당하지 않고 여기 있을 리가 없었다.
“너….”
“뒤로 물러서십시오, 저하.”
시종이 그를 보호하듯 팔을 옆으로 뻗었다.
살았다. 살아남을 수 있다. 뒷일을 도모할 수 있다. 그 빌어먹을 연놈들에게 복수할 수 있다.
론디아스는 환희에 찬 얼굴로 제 시종에게 명했다.
“여기서 시간을 끌 거라!”
죽으라는 말이었다. 시종을 던져 주고, 대신 자신은 빠져나갈 속셈이었다. 그에게 있어 시종의 가치는 그 정도였다.
론디아스는 미련 없이 뒤를 돌아 달렸다.
달려가려 했다.
“으, 윽…?!”
기우뚱 몸이 기울어지더니 흙바닥이 눈앞에 다가왔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론디아스의 몸은 다시 한 번 바닥을 뒹굴어야만 했다.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넋을 놓은 그의 귀에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역시 당신께선 저의 신이십니다.”
그저 론디아스의 죽음을 선물해 준 것만이 아니다. 이 손으로 직접 원수를 갚을 기회까지 주시다니.
그는 한 발, 한 발 천천히 론디아스에게 다가갔다. 더 공포스럽도록. 다가오는 죽음을 느낄 수 있도록.
어차피 아킬레스건을 끊었으니 도망칠 수도 없을 터.
“너, 네놈이 드디어 미쳤구나! 너, 너희들! 내가 가진 금품을 모두 줄 테니 이놈을 죽이거라! 어서!”
론디아스는, 이번에는 자신을 해치려 했던 불한당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 정도로 시종에게서 풍겨 나오는 광기의 향기가 두려웠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더니 어깨를 으쓱하곤 웃었다.
“네놈이 여길 빠져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어?”
그제야 론디아스는 깨달았다. 이 모든 것이 우연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의 머릿속에 청회색 눈동자의 청년이 떠올랐다.
“이런, 빌어먹…!”
그의 수난은 이제 막 시작된 참이었다.
그리고 아마, 그리 쉬이 끝나진 않을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