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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 (14)화 (15/115)

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15)

드디어 이날이 왔다.

크렐틴 자작가의 차남이자 론디아스의 시종, 몽셸락은 황제의 부름이 적힌 서신을 내려놓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큭, 큭큭….”

참으려 해도 참아지질 않는다.

지금부터 벌어질 일을 생각하면 저절로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길고 긴 복수의 끝이 머지않았기 때문이었다.

“꼴 좋다, 론디아스.”

그의 아래에서 육 년이라는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은 딱 하나.

그의 마지막을 제 손으로 장식할 수 있다는 희망 덕분이었다.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수 있다는 몽셸락에게 ‘그분’께서 기회를 주셨다.

“누이를, 나를 기억하지 못한 네놈의 어리석음이 모든 것을 자초했다.”

누이는 몹시도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소극적이고 조용했지만, 그 고운 얼굴과 심성으로 모두의 찬사를 받는 그런 사람. 몽셸락은 그런 누이가 자랑스러웠다.

그들의 불행은, 누이의 소문이 론디아스의 귀에 들어가면서 시작되었다.

-그대가 그 크렐틴 영애인가.

굳이 그녀를 찾아온 황태자를 어찌 거부할 수 있었을까. 누이는 부담스러워하면서도 론디아스와 시간을 보냈다.

그런 매일이 계속되었다.

론디아스는 자작가에까지 찾아와 누이에게 선물을 주고 구애했다. 그렇게까지 그가 열렬하게 구애한 영애는 처음이었다. 부담스러워하던 누이도 점차 마음이 기울 정도로.

그는 절실해 보였다.

-내 비가 되어 주겠나?

-전하, 자작가 출생인 제가 황태자비가 될 순 없습니다.

-알고 있어. 하지만 후궁이라면 문제 될 게 없겠지.

그 약속만으로도 누이에겐 충분했다.

그녀는, 장래를 약속한 론디아스에게 결국 모든 것을 허락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말렸어야 했다. 하지만 모두가 황태자의 진심을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몽셸락조차도.

그리고 비극은 일어났다.

-전하, 어찌 저를 버리십니까…!

몇 번의 밤을 보낸 후 론디아스의 발길이 끊어졌다.

누이는 몇 번이나 그를 찾아가 매달리며 애원했다. 하지만 돌아온 건 차가운 축객령뿐.

-남녀 간의 달콤한 밤을 위해 속삭인 밀어를 진심이라 믿다니. 영애는 좀 더 남자를 만나 보는 게 좋겠군.

그것이 자신에게 정절을 지킨 여자에게 뱉을 말이던가.

그리고 누이는….

‘그분’이 힘써 주신 덕분에 몽셸락은 론디아스의 시종이 되었다. 하지만 폐태자는 자신을 기억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게 우스워서 언제나 그의 곁에 서면 몸이 떨렸다.

참으로 힘든 나날이었다. 웃음과 분노를 삼켜 내느라.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다. 그는 제 가슴 위에 손을 올리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일이 끝나면 그대가 바라던 대로 론디아스는 목숨을 잃게 될 겁니다.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그리 말했다. 그리고 몽셸락이 해 주어야 하는 일에 대해서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몽셸락은 이해했다.

이 일이 끝나면 반드시 론디아스는 목숨을 잃는다. 그리고, 자신도.

‘그분’이 그린 그림에서 몽셸락의 생존 확률은 절망적이었다.

그래서… 뭐?

-아아, 저의 신이시여. 이런 기회를 주심에 그저 감사드립니다.

몽셸락은 그의 앞에 무릎 꿇고 발등에 입을 맞췄다.

설령 이 목숨 하나 사라진들 무어 대수일까. 오히려 값싼 축에 속했다. 이 목숨 하나로 비록 폐태자라 하나 황가의 핏줄을 죽일 수 있다면.

‘그분’은 몽셸락의 결의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몸을 숙여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성사시킬 것입니다. 그대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모든 것이 계획대로였다. 몽셸락은 옷차림을 정돈하면서 웃었다.

다만 그 눈은 언젠가의 광기로 가득 차 있었다.

* * *

“크렐틴 경, 부족한 짐의 형제를 시중드느라 고생이 많았소.”

몽셸락은 황제의 앞에 넙죽 엎드렸다.

론디아스가 질릴 정도로 이야기하긴 했었다. 빌어먹을 계집이라던가, 건방지다던가, 그 눈부터 이미 사람을 깔본다던가. 하지만 눈앞에서 본 황제는 관록과 위엄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평소의 떨림과 달리 그녀의 기세에 압도되어 벌벌 떨었다.

이게 내가 사는 나라의 주인인가. 그 멍청한 놈이 이 자리에 앉지 못해 천만다행이었다. 이분이라면 틀림없이 ‘그분’의 계획대로 일을 진행해 주시겠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오늘 그대를 부른 건 다름이 아니라….”

뭘 어디까지 말하면 좋을까. 이 남자는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암살자 길드에 방문한 것은 이 남자였다. 하지만 의뢰 내용을 말한 건 아니고 냉궁에 방문 의뢰를 했을 뿐이었다.

다른 귀족가와의 연락책 역시 이 남자였다. 하지만 서신의 내용을 감히 보지는 못했을 터. 그저 연락책 역할을 했다면 아는 것은 터무니없이 적으리라.

제빌에 대한 소문을 퍼뜨린 것 역시 이 남자였다. 하지만 제 꼬리를 자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멋도 모르고 그저 론디아스가 시켜서 한 것이라면?

좀체 질문을 정하지 못하고 침묵하는 루비나드 대신 제빌이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는 그대가 한 일을 모두 알고 계십니다.”

차갑고 담담한 목소리였다.

몽셸락은 깊게 고개를 숙였다. 모든 것을 각오한 그에게 필요한 것은 입을 열 계기뿐이었다. 그리고, 제빌이 지금 계기를 부여했다.

“감히 제국의 태양을 어찌 속이겠습니까. 제가 알고 있는 걸 모두 이야기하겠습니다.”

허.

그 포악한 오라버니의 곁에서 묵묵히 버텨 냈다기에 예사 사람이 아닌 줄은 알았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담담하게 반응할 줄이야. 자신이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 모른다기엔 너무 침착했다.

루비나드가 눈을 가늘게 떴다.

“모두?”

“이번에 절 부르신 일은 전하의 친가로 향하던 마차가 습격당한 사건 때문인 줄로 사료됩니다. 그리고 전 그걸 사주한 인물도, 일의 자초지종도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대가 모든 것을 털어놓으면 짐은 그 이유를 추궁할 수밖에 없다.”

모르고 한 일이라 하면, 운이 따르면 목숨은 건질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러나 남자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고 있습니다.”

납작 엎드린 몽셸락의 입김에 대리석 바닥이 뿌옇게 물들었다.

점점 몸이 뜨거워졌다. 이게 고양감 때문인지, 안도감인지, 아니면 두려움 때문인지조차 분간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번에 두 분을 습격한 인물을 고용한 것은, 이 보잘것없는 목과 한 줌 밀가루만큼의 가치도 없는 명예를 걸고 고하건대, 냉궁의 폐태자이자 제 주인이신 론디아스 님이 틀림없습니다.”

루비나드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꼼꼼하게 정리된 보고서를 보고 결론 내린 이름과 같았다. 모든 것은 오라버니가 이 남자를 이용해 저지른 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당사자에게 이야기를 듣자 와닿는 충격이 컸다.

“…대체 왜… 오라버니는 그런 짓을 저지른 것이냐.”

믿고 싶었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 뭔가… 뭔가 자신은 짐작도 하지 못할 이유 때문일 거라고.

하지만 몽셸락은 그녀의 마지막 기대를 산산이 부수었다.

“제 주인께서는 두 분의 결혼 소식에 격분하셨습니다. 감히 폐하의 앞에서 그분이 하신 말씀을 그대로 옮기면, ‘내 자리를 빼앗은 빌어먹을 계집’인 폐하와 ‘건방지고 오만한’ 전하께서 결혼하는 꼴을 순순히 두고 볼 수 없다 하셨습니다.”

겨우, 겨우 그런 이유로…? 루비나드가 핑 도는 머리를 손끝으로 눌렀다.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오라버니는.

허세와 주색에 취해 나라의 안녕보다 자신을 과시하는 데 치중한 사람이었다. 황가의 장남에게 주어지는 것들을 진짜 제 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어리석었다.

하지만 이렇게 바보 같은 사람은 아니었다. 제 목숨을 걸고 이런 짓을 저지른 것치고는 정말 하찮은 이유였다.

“…일의 경위를 그대의 입으로 소상히 고하거라.”

황제의 말에 몽셸락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다만, 슐라민 공작은 등장하지 않았다. 그 서신은 ‘그분’께서 따로 사용하실 것이라며 함구하길 바라셨기 때문이었다.

또한, 몽셸락이 론디아스를 부추긴 일에 대해서도 함구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이미 그가 모든 것을 알면서도 론디아스의 명령에 따랐던 것 자체가 사형감이었기에. 이 역시 ‘그분’의 명령이었다.

그 외에는 모든 것을 사실대로 고했다. 황제는 담담히 듣고만 있었다.

“그대는 오라버니께서 무슨 일을 저지르는지, 왜인지 알고도 신고하기는커녕 오라버니를 도왔다.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가?”

“그렇습니다.”

루비나드가 마지막 확인을 했다. 몽셸락은 주저 없이 긍정했다.

그 태도가 도리어 루비나드의 마음을 흔들었다.

“변명은?”

“없습니다. 어차피 목숨을 걸 것이라면 명령을 따르기보다 신고를 하는 게 옳았겠지요. 하지만 겁쟁이인 저는 주인이 무서워 그러지 못했습니다. 주인에게서 암살자 길드에 의뢰를 넣으라는 이야길 들었을 때부터 이미 제 목숨을 부지하려는 마음은 버렸습니다. 이 모든 것을 고하는 것은 최소한의 속죄라 생각해 주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몽셸락은 입을 다물었다.

살려 달라는 애원조차 없는 건가. 루비나드는 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제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부관은 일말의 흔들림도 없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이런 젠장!”

시치미를 떼려 했다.

론디아스에게는 제빌을 죽일 이유가 없었다. 최소한 겉으로 보기에는.

어렸을 적 그에게 받았던 굴욕은, 누군가가 알지도 못하고 기억하지도 못할 터였다. 그런 사소한 걸 누가 기억하고 있을까.

게다가 론디아스 자신이 이미 사람들에게서 잊혀진 존재였다.

그런데 모든 게 망가졌다. 론디아스는 이를 뿌득뿌득 갈다가 언제나 제 시종이 서 있던 자리를 노려보았다.

“그 겁쟁이 새끼가! 감히 날 배신해? 다 불면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 줄 알았나? 젠장!”

아침부터 론디아스가 날뛴 방 안은 엉망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가 깨끗하게 정리된 방을 볼 일은 없을 터였다.

“그 빌어먹을 계집이 왜 하필 거기에 있어서!”

모든 게 엉망이다. 그 계집을 건드리면 안 되는 걸 잘 알기에 일부러 떼어 놓았다. 그런데 대체 왜!

멍청한 암살자 길드 놈은 왜 그런 짓을 저지른 걸까. 실패했으면 순순히 자결했으면 됐을 것을. 왜 하필이면 그 계집에게 상처를 입혔냔 말이다.

그 탓에 론디아스는 황제 시해 미수범이 되어 버렸다.

이제 와서 국서인 제빌을 노린 범행이었다고 말한들 누가 믿어 줄까. 그가 암살자를 고용할 동기가 있는 상대는, 제빌이 아니라 제 자리를 빼앗은 루비나드인 것을.

“젠장, 젠장!”

도망칠까?

하지만 그의 이성과 본능이 모두 경고하고 있었다. 어차피 어떤 발버둥을 쳐도 소용없다고.

다행히 미수로 그쳐 사형까지 선고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국외 추방이나 지방 유배는 틀림없겠지. 냉궁에서의 삶도 지긋지긋한데 여기서 더 나락으로 떨어져야 한다니.

황제의 자리가, 원래도 멀었던 그곳이 더 멀게만 느껴졌다.

“허억, 헉….”

제 시종이 끌려간 후, 계속 정신없이 날뛰었으니 지칠 만도 했다. 거친 숨을 몰아쉬던 론디아스가 이를 악물고 소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때였다.

“저하….”

공포에 질린 목소리가 문을 두드린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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