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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 (13)화 (14/115)

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14)

루비나드가 눈을 뜬 것은 다음 날 정오가 되어서였다.

“괜찮으십니까, 폐하.”

뿌연 시야 속에 보이는 제빌의 눈가가 발갰다.

울기라도 한 걸까. 정신이 채 깨지도 않은 루비나드가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대가 괜찮으니 다 괜찮아.”

그 한마디에, 제빌의 마음속에서 죄책감이 스멀거렸다.

그가 한 모든 일은 언제나 루비나드를 위한 것이었다. 이번도, 그 전도.

아무리 론디아스가 향락에 빠진 멍청이라도 제국 황제의 적자이자 장남. 그를 루비나드에게서 떼 놓기 위해서는 어지간한 죄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걸 알았기에 패를 써서 일을 꾸몄다.

루비나드를 위해서.

하지만.

“다시는… 다시는 폐하께서 상처 입으실 일 없을 겁니다.”

제빌은 스스로에게, 아니, 그녀에게 다시 한 번 맹세했다. 이번에는 정신을 잃은 그녀에게가 아니라 보라색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설령 어떤 난관이 와도 방법을 찾아내겠다. 무슨 짓을 해서든 그녀를 지켜 내겠다. 두 번 다시는 그녀가 다치지 않게 하겠다.

무슨 일이 있어도.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제빌. 나는 지금 매우 기분이 좋아.”

그 마음을 알 리 없는 그의 주인은 태평한 소리를 내뱉었다.

기분 좋을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상처 입고, 정신을 잃기까지 해 놓고. 제 뺨 위를 오가는 손길조차 미워 제빌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내가 그랬지? 무슨 일이 있어도 그대를 지키겠다고.”

아직 몽롱한 건지 눈에 초점이 제대로 맞질 않았다. 느른한 목소리로 쿡쿡 웃는 루비나드가 너무나 얄미웠다.

너무 얄밉고, 사랑스럽고, 스스로를 바늘로 찔러 죽이고 싶어졌다.

제빌은 그 모든 감정을 억지로 가라앉히며 웃었다.

“농담하실 기력이 있으시다니 괜찮겠군요. 묽은 수프라도 드시겠습니까.”

“으음.”

루비나드는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눈을 감았다. 아무래도 아직 몸이 나른한 모양이었다.

제빌의 뺨에 닿았던 손이 툭 떨어졌다. 제빌은 그 손이 천하에서 가장 귀한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받쳐 들어 이불 속에 넣어 주었다. 그리고 한참이나 의자에 기대앉아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묽은 수프를 부탁해야 한다는 걸 깨달은 건 이십 분이나 지난 후였다.

* * *

루비나드가 다시 눈을 뜬 건 식은 수프를 열네 번이나 다시 끓이게 한 뒤였다. 제빌이 그녀의 무릎 위에 쟁반을 놓아 주자, 루비나드가 픽 웃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된 것 같군.”

아직 떨리는 손으로 숟가락을 쥐고 수프를 떠먹으려던 그때였다.

“폐하!”

고레야스의 목소리가 들린 것은.

“…고레야스 경의 목소리 아닌가?”

“네.”

루비나드가 들어 올렸던 숟가락을 놓았다.

왜 하필 이 타이밍에. 제빌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쟁반을 옆으로 치웠다. 그러는 동안에도 고레야스의 목소리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폐하! 부디 신을 벌하여 주옵소서!”

“자신을 벌하라고 하는군.”

“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루비나드가 고개를 갸웃했다. 제빌은 당연하다는 듯 눈을 내리깔고 답했다.

“친위대장이니까요.”

“음?”

“그는 폐하의 친위대장이니까요. 폐하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는데 처분 없이 넘어갈 순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건 내 명령 때문인데?”

“신하란 그런 존재입니다. 몇 번이나 누누이 말씀드렸듯이.”

황제는 무소불위의 존재이다.

하지만 그 행동의 책임을 지는 건 신하다. 벌을 받는 것도. 제빌은 자주 그렇게 루비나드에게 말하곤 했다.

그래야 그녀가….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도 고레야스는 문밖에서 자신을 벌해 달라며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 대고 있었다.

“곤란하군. 나는 그를 벌할 마음이 없는데.”

“고레야스 경의 성격으로 보아 아무런 벌도 없으면 사직서를 내거나….”

“내거나?”

“자결할지도 모릅니다.”

제빌의 말투는 담담했다. 그래서 루비나드도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냉정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확실히 고레야스는 자신에 대한 충심이 지나칠 정도로 강했다. 그녀가 자업자득으로 다쳤다고는 하나 계속 자신을 탓할 성정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일단, 들어오라고 하게.”

“네.”

제빌이 일어나 직접 문을 열었다. 문 앞에 납작 엎드려 있던 고레야스가 문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전하!”

“폐하께서 들어오라 하십니다.”

고레야스는 잠시 망설이더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문턱을 넘기가 무섭게 루비나드의 얼굴조차 보지 않고 다시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폐하!”

“큰 소리는 그만두게. 짐의 귀는 멀쩡하네.”

루비나드가 살짝 귀를 막자 고레야스의 몸이 떨렸다. 두 사람을 바라보던 제빌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레야스에게 약초를 가지러 가게 한 것도, 폐하의 처분을 기다리라 귀띔한 것도 모두 이때를 위한 것이었다. 만약 그러지 않았더라면 충직한 그는 진즉에 자결을 꾀했을지도 모른다.

말은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다. 고레야스는 능력도, 인성도 훌륭한 말이었다. 그런 자를 이런 일로 잃기엔 너무 아까웠다.

“그대를 벌하라는 거지?”

“그렇습니다, 폐하!”

“그렇군…. 그럼 그대에게 이 주간 근신을 명하도록 하지.”

“…예?”

고레야스가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루비나드를 보았다.

언제나 당당하고 오만하던 보랏빛 눈동자는, 지금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창백한 안색과 땀에 젖어 뺨에 달라붙은 머리카락. 병색이 완연한 얼굴인데도 그녀는 여전히 세상 모든 것을 아래에 두고 있는 듯한 눈으로 고레야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짐의 명령에 불복하는 건가?”

“아니, 그건 너무나….”

직위, 작위를 빼앗기는 건 이미 각오하고 있었다. 다만 가문의 멸문만은 참아 달라 간청할 생각이었다.

그 정도로 고레야스는 자신의 죄가 중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겨우 근신이라니. 이래서야 본보기조차 되지 못한다. 그는 다시 고개를 바닥에 처박았다.

“폐하! 신이 감히 청컨대….”

“고레야스 경.”

이어질 말은 뻔했다. 물론, 루비나드는 쓸데없는 말을 듣기 위해 시간을 낭비할 생각은 없었다.

“그대는 누구의 신하인가?”

“폐하의 신하입니다! 그러니 폐하를 지키지 못했던….”

“그대의 주인이.”

툭, 말이 끊겼다. 그를 짓누르는 위압감에 고레야스는 입을 다물었다.

“짐이 그대에게 근신을 명한다고 했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게.”

“…폐하.”

“피곤하군.”

느른한 말투와 달리 눈빛이 사나워졌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제빌이 고레야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상체를 숙여 충직한 신하의 귓가에 속삭였다.

“경의 처우는 정해졌습니다. 그만 일어나십시오. 폐하는 아직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명, 받들겠습니다, 폐하.”

비척거리며 일어나는 고레야스의 얼굴은 흙빛이었다.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던 루비나드가 제빌에게 눈짓을 했다. 그 눈빛만으로도 주인의 의중을 읽은 부관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 친위대장의 뒤를 따라 방을 나섰다.

탁, 하고 방문을 닫은 제빌이 입을 열었다.

“고레야스 경.”

“…전하.”

그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제빌을 보고 있었다.

그렇겠지. 그의 충심으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리라.

“납득이 되질 않으십니까.”

확실히 지나치게 처벌이 약했다. 분명 뒤에서 이야기가 나올 테지.

하지만 어차피 곧 더 큰 사건이 터진다. 폐하의 억지에 져서 저지른 친위대장의 실수 따윈 덮고도 남을 정도의. 그것 역시 제빌의 계산대로였다.

다만 사람의 마음은 계산대로 되어 주질 않는다. 제빌의 말에 고레야스가 이를 악물었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 역시 같으니까요.”

휘둥그레졌던 고레야스의 눈이, 이내 평소와 같은 크기로 돌아왔다.

확실히. 생각해 보면 루비나드가 다쳤을 때 제빌이 곁에 있었을 터. 그러니 원래대로라면 제빌 역시 처벌받아야만 했다.

“폐하를 지키지 못한 건 저도 같습니다, 고레야스 경. 오히려 제 죄는 경의 죄보다 턱없이 더 크고 무겁지요.”

“아니, 그건….”

뒷사정을 알 리 없는 고레야스는 그의 말을 부정하려 했다. 하지만 차가운 눈동자에 말문이 막혔다.

지금의 제빌은 어쩐지… 무기물 같았다. 그저 거기에 놓여 있을 뿐인 가구처럼.

“경과 제가 지금도 폐하의 곁에 있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폐하께서 그리하겠다 결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제빌이 고레야스를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갈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천천히, 또박또박 말을 자아냈다.

“이 목숨을 적절한 때 폐하께 바치면 됩니다.”

적절한 때.

지금이 아니라, 언젠가 루비나드를 지켜 내기 위해서.

제빌은 고레야스의 팔을 꽉 쥐었다. 그 손에서 느껴지는 열기와 힘에 고레야스조차 순간 움찔했다. 제빌의 결의를 나타내는 것처럼 그 손은 굳건하고 강했다.

“그러니 주인께서 주신 목숨을 지금 버리려 하지 마십시오, 경.”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제빌은 다시 루비나드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남겨진 고레야스는….

“적절한 때.”

망가진 기계처럼 멍하니 국서 전하의 말을 되새기고 있었다.

* * *

“슐라민 공작의 짓은 아닌 것 같아.”

수프를 다 마신 루비나드가 그렇게 운을 띄웠다. 제빌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은 위험한 다리를 건널 성격이 못됩니다. 아직 식은 올리지 않았으나 폐하께서 결혼을 공표하셨으니 저는 국서와 다름없습니다. 그런 절 암살하려 들 정도로 멍청한 남자는 아니죠.”

물론 남이 일을 벌인다고 해도 말리진 않을 터였다. 운 좋게 제빌이 죽으면 불로소득을 챙길 생각이었겠지.

“뭉크리안 공작은 감이 좋지. 이런 짓을 벌일 담력도 없고.”

그렇다면, 누굴까.

제빌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보고서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건?”

“놈을 심문해서 알아낸 정보를 토대로 조사를 진행했습니다.”

“어느새.”

“폐하께서 쿨쿨 주무시고 계실 때에.”

계속 곁에 같이 있었나 싶었는데.

여전히 빈틈이 없는 남자다. 하긴, 그래서 믿었고 그래서 국서로 택했다.

루비나드는 보고서로 눈을 옮겼다. 생각보다도 두꺼운 종이 속에는 다양한 정보가 들어차 있었다.

습격자가 암살자 길드 사람이라는 것. 의뢰인이나 길드에 대한 정보는 말하지 않았지만, 등에 새겨진 문신으로 길드 지부를 특정할 수 있었다는 것. 최근 출입한 인물을 조사해 보았다는 것.

그리고.

보고서를 읽어 내릴수록 루비나드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제빌은 그저 조용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미 그녀의 손에 잔혹한 현실을 쥐여 주었다. 그걸 보고 어떻게 할지 정하는 건 그녀의 몫이었다. 그리고 제빌은… 그녀가 제 계산대로 움직여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잠시 후, 루비나드가 고개를 들었다.

“제빌 경.”

“네, 폐하.”

“…이게 사실인가?”

제빌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 안에서 대답은 나와 있을 터이므로.

붉은 입술을, 아득 소리가 날 정도로 깨문 그녀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받아들인 정보가 머릿속에서 하나둘 퍼즐처럼 맞춰진다. 놀라울 정도로 간단한 퍼즐이었다.

그래서 도리어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대체, 왜?

“오라버니를 시중드는 자가 있었지.”

“네. 크렐틴 자작가의 차남입니다.”

“…그를 불러 주게. 내 직접 이야기를 들어 봐야겠어.”

이유는 모르겠다.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하지만….

루비나드는 설령 이 일을 벌인 자가 제 핏줄이라 해도 용서할 생각은 없었다. 보라색 눈동자가 살기로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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