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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 (10)화 (11/115)

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11)

“일단, 음, 앉을까?”

지금이 그때일까?

왠지 아닐 것 같았다. 하지만 주책없이 뛰는 가슴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얼굴이 달아오른다. 몸이 뜨거워진다. 심장 소리가 루비나드의 목소리조차 묻어 버릴 기세로 커진다.

그녀가 생글 미소 지으며 제 손을 잡자 고동이 더 커졌다.

이대로 터져 버리는 게 아닐까. 파르르 떨리는 손을 가누며 제빌은 벤치에 앉았다.

“그대와 내가 만난 지도 꽤 오래되었지.”

“…네.”

그 쌓아 온 세월이 제빌에게 어떤 의미인지 당신은 알고 있을까.

제빌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래서 그대가 지나치게 편해진 모양이야. 이번 결혼도, 사실대로 말하면 나는 그저 우리 사이에 호칭이 하나 더해지는 것뿐이라 생각하고 있었어.”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이야기했으니까.

들떠 오르던 기분이 차츰 가라앉는다. 제빌은 이어지는 말을 기다리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부부라는 건, 다른 관계성과는 결이 다르겠지.”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달라진다고 상상해 본 적조차 없다.

제빌에게는 미안하지만, 루비나드에게는 그저 그 정도의 일이었다.

하지만 제빌에게는 달랐다. 진지하게 ‘남편’으로서의 역할을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긴, 성실한 그라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게다가 이 결혼으로 제빌의 위치가 크게 바뀐다. 그가 결혼을 받아들인 걸 보면 분명 바라는 게 있을 터. 아마 그걸 얻기 전까지는 루비나드와의 결혼을 유지하고 싶겠지.

그래서 그런 ‘조건’을 건 것이리라.

“앞으로 조심하도록 하지. 그대가 내 남편임을 잊지 않고 행동하겠어. 그러니….”

루비나드의 보라색 눈동자에 감정이 가득 담긴다.

제빌의 먹먹해진 귀가 그녀의 목소리를 제대로 주워 담질 못한다. 하지만 그 눈을 보고서 알았다.

“왜 폐하께서 사과하십니까. 잘못한 것은 저인데.”

톡, 톡.

작은 손이 살며시 그의 등을 토닥였다.

분명 가는 등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과 비교하니 터무니없이 너른 등이었다. 그래도 왜일까. 여전히 그녀의 눈에는 좁게만 보였다.

“나도 제대로 알고 있어. 그대가 내 남편이라는 걸. 그러니 불안해 말게.”

입술을 꾹 깨물어 봤지만, 파르르 떨리는 입가를 감출 수는 없었다.

당신은 아무것도 모른다. 내가 정말로 두려운 게 무엇인지. 뭘 불안해하는 것인지. 그런데도 어떻게 당신은 내가 가장 듣고 싶은 말을 해 줄 수 있는 걸까.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벤치에 앉아 있었다. 따스한 햇볕을 한가득 품은 채.

그리고 제빌의 가슴에는 또 하나, 루비나드가 쌓였다.

* * *

“왜 소식이 없느냐.”

론디아스가 초조한 듯 이를 갈았다. 시종은 덜덜 떨면서도 대답했다.

“그자가 황제의 곁에서 잠시도 떨어지질 않는다 합니다. 방에도 쉬이 침입할 수 없도록 대비해 놓아 골머리를 썩이는 모양입니다.”

“비싼 돈을 냈으면 돈값을 해야지! 이 빌어먹을 놈들.”

혀를 찬 론디아스가 술잔을 들어 벌컥 들이켰다.

독한 술이지만, 그에게는 물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걸론 턱없이 부족하다. 이제는 술로도 유희로도 텅 빈 그를 채울 수가 없었다.

점점 갈급함만 더해져 간다.

-저하, 황제의 독재가 도를 넘었습니다. 한 나라의 얼굴인 국서를 독단으로 고른 것도 모자라 후궁 경쟁을 부추기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날, 저택을 방문한 베그란 남작은 짐짓 심각한 얼굴로 그리 말했다.

정통성 있는 후계자가 아니라 그렇다. 나라 대신 사적인 감정만 생각하는 한낱 계집을 더는 따를 수 없다.

역시 제국에는 적통 후계자, 론디아스가 필요하다. 그런 이야기였다.

나쁘지 않은 이야기다. 자신을 다시 황제의 자리에 올려 주겠다는 뜻 아닌가. 이대로 루비나드가 제 무덤을 계속 파 준다면, 황좌를 되찾는 것도 꿈은 아닐 듯했다. 하지만.

-충성의 증거로 돈을 내라고 하는 것은 어떠십니까.

-뭐?

베그란 남작이 돌아간 후. 시종이 생각에 빠져 있는 론디아스를 부추겼다.

-그자는 그 쿠온가의 핏줄 아닙니까. 만약 그자가 파 놓은 함정이라면 저하께서 진흙을 뒤집어쓰시게 됩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충성의 증거로 돈을 요구하고, 그 돈으로 길드에 의뢰를 넣으시는 건 어떻습니까.

과연.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시종의 말대로 그들에게 돈을 요구했다. 처음에는 난색을 표하더니 며칠 지나지 않아 백금화가 가득한 주머니를 보냈다. 거부하면 황제가 보낸 첩자라 생각하겠다 협박해 받아 낸 돈이었다.

-이 돈으로 국서 시해를 꾀했다는 걸 알면, 황제의 첩자였다고 하더라도 돌아서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시종의 눈은 어딘가….

아니, 아니지. 이 멍청한 놈이 육 년 만에 처음으로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지금 또 쓸모없어지려 하고 있었다.

“길드에 재촉 연락을 넣어라.”

시종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잠긴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종의 몸을 따라 간헐적으로 흐르는 잔떨림은 여전했으나….

그 눈동자만은 어쩐지 흔들림 없이 평안했다.

“저하.”

시종의 떨림이 멎었다.

무슨 생각인 걸까. 그는 절대 스스로 다가서는 일 없었던, 론디아스의 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틈이 없는 게 문제라면 틈을 만들면 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뭐?”

언제나처럼 화풀이로 욕이나 퍼부으려 열렸던 입이 꾹 닫혔다. 시종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좀 더 목소리를 낮추고 론디아스에게 바짝 다가섰다.

“황제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 게 문제라면, 떨어뜨리면 될 게 아닙니까.”

“호오…, 어떻게 말이냐?”

이놈이 미쳤나.

그런 눈이었지만, 흥미는 동한 모양이었다. 이번에도 뭔가 쓸모 있는 안을 내놓을지도 모른다. 론디아스가 덩달아 목소리를 낮췄다.

“쿠온 공작가의 이름을 이용하십시오.”

“공작가?”

“듣기론 쿠온 공작의 건강이 갑자기 나빠졌다고 합니다. 그자가 입궁한 뒤 최근 며칠 간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조차 버거워한다고.”

난 또 뭐라고. 론디아스의 표정이 시큰둥해졌다.

“그런 거야 너보다 그 빌어먹을 놈이 더 잘 알 것 아니냐.”

시종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스몄다. 그 눈동자에는 평소 가득하던 두려움 대신 광기가 차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론디아스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자는 아비에 대한 정이 없습니다. 절대 아비를 방문하지 않을 테지요. 하지만 황제는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제빌은 루비나드에게 특별한 존재였다. 일적으로도, 사적으로도.

루비나드가 제빌이 구설에 오르는 걸 놔둘 리 없었다.

“네 말은 소문을 내라는 말이렷다?”

시종이 눈을 휘며 대답했다.

“황제는 결혼식을 치르는 하루를 위해 매일 서류에 파묻혀 살고 있다고 합니다. 황제와 그자가 공작가 방문을 위해 동시에 자리를 비울 일은 없다는 뜻이지요. 그러니 그때….”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론디아스의 이름이 전면에 나오지만 않는다면. 일이 잘못되었을 때는 이놈 하나만 처리하거나, 소문을 낸 주동자만 잘라 내면 그만 아닌가.

한번 시도는 해 볼까.

“네가 해 보거라.”

‘네?”

“여기에 갇혀만 있는 내가 나서 봤자 누가 믿겠느냐. 네가 말을 꺼냈으니 마무리도 짓거라.”

이 겁쟁이 놈이 순순히 하겠다고 할까?

론디아스는 돌에 짓눌린 개구리를 관찰하는 듯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시종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론디아스는 흥미롭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 비릿하게 웃었다.

“그래. 나까지 선이 닿지 않게 잘 처신하거라.”

“물론입니다. 대신 일이 성공했을 땐….”

과연, 바라는 게 있었던 건가.

하긴. 이런 겁쟁이가 저런 미친 짓을 할 이유는 그것뿐이겠지. 론디아스는 제 곁을 떠나겠다는 말 외에 어지간한 건 들어줄 생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내 섭섭지 않게 챙겨 주마.”

시종은 엷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한층 가벼워진 마음으로 술잔을 기울이던 론디아스는 보지 못했다.

여전히 시종의 눈동자에서 빛나고 있는 광기를.

* * *

“폐하.”

친위대장, 고레야스는 평소 황제가 머무는 4층의 경비를 맡고 있다. 한 층이지만 꽤 규모가 있기에 평소라면 루비나드의 집무실에 들어올 여유가 없었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의 방문은 심상찮은 일이 일어났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무슨 일인가, 고레야스 경.”

“주말 사이 조금 신경 쓰이는 이야기를 들어….”

제빌의 표정이 변했다. 아무래도 그가 할 말이 무엇인지 짐작 가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곤란하다는 듯한 얼굴로 몸을 일으켜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다.

“고레야스 경.”

“전하, 폐하께서도 아셔야 할 일입니다.”

“괜찮다 하지 않았습니까. 폐하께서는 그런 일에 신경 쓰실 여유가 없습니다.”

대체 이건 무슨 상황일까. 썩 기분 좋은 상황이 아닌 건 확실했다.

제빌의 등과, 얇은 몸으로는 채 다 가려지지 않은 고레야스를 바라보던 루비나드의 입술이 삐뚜름하게 휘었다. 상세 내용이야 아직 모르겠으나 제빌에게 뭔가 문제가 생긴 거겠지.

다만 제빌은 그걸 루비나드에게 숨기고 싶어 한다. 생각을 정리한 루비나드가 손사래를 치며 턱을 괴었다.

“그만, 그만.”

“하지만 폐하….”

“어차피 제, 아니, 쿠온 경에게 들으면 될 일. 이만 나가 보게.”

루비나드가 싸늘한 눈초리로 제빌을 노려보았다.

문제가 있으면 말을 해야 할 것 아닌가. 그렇게 책망하는 눈빛이었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제빌이 루비나드를 아내로 대하는 법을 배워야 할 모양이었다.

“…알겠습니다.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어차피 제빌은 루비나드의 추궁을 벗어날 수 없다. 그걸 잘 알고 있는 고레야스가 순순히 물러났다.

남은 것은 적막뿐이었다.

“제빌 경.”

“…네.”

“그대가 내게 숨기고 있는 게 뭘까?”

제빌은 대답 대신 주먹만 꽉 쥐었다. 대답할 마음이 없다는 뜻이었다.

루비나드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이리 오게.”

삐딱하게 다리를 꼰 루비나드가 책상을 톡톡 쳤다. 제빌은 잠시 망설이다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부름에 응했다.

바로 앞까지 다가온 제빌을 올려다보며 루비나드가 물었다.

“나는 그대의 아내 될 사람 아닌가?”

“…맞습니다.”

“그런데 왜 그대의 문제를 타인의 입에서 들어야 하는 거지?”

“그건….”

언제나 그랬다.

루비나드에게 일어나는 일은 제빌이 가장 먼저 알았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하다못해 가족 간에 생긴 일조차도. 그런데 루비나드는 제빌이 말해 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게다가 그는, 그녀에게 폐가 된다는 이유로 제 문제를 숨기는 일이 많았다.

이참에 이 못된 습관을 고쳐 놔야겠어. 루비나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그대를 남편으로 존중하듯 그대 역시 나를 아내로 존중해야 하지 않겠나. 그러니 그대 입으로 말하게. 무슨 일인가.”

아내로서 알아야만 하겠다.

그 말을 어찌 감히 거부할 수 있을까. 자신이 가장 바라던 자리에 스스로 들어와 준 그녀를.

제빌은 체념한 얼굴로 순순히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위독하시다고 합니다.”

“위독하시다니? 갑자기?”

“건강이 나빠진 것은 지난 달부터입니다. 최근에는 운신조차 힘드시다고.”

“흐음, 그 쿠온 공작이….”

비열한 인상의 남자였다. 제빌의 두 형과 꼭 닮은.

간계를 꾸미기 좋아하는 그는, 전술을 짜내는 것에도 특출 났다. 하지만 귀족의 대부분이 병법에 의지하기보다는 정면으로 겨루는 쪽을 더 높게 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머리와 입으로 전황을 조종하려 드는 쿠온가는 설 곳이 없었다. 실제로 짜내는 전술도 다 비겁한 것뿐이라 채용된 적이 거의 없었고.

“그래서? 휴가를 주면 되겠나?”

“아니요. 갈 생각 없습니다. 제게 있어서 아버지는….”

삼남이 어떤 취급을 당하는지 알면서도 오히려 부추긴 남자였다. 제빌의 미움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걸 잘 아는 고레야스가 굳이 여기까지 온 이유는 무엇일까.

“그래서?”

“그뿐입니다.”

“고레야스를 다시 부르게 하지 말게.”

어쩔 수 없나. 제빌은 꽉 쥐었던 주먹을 펴며 작게 속삭였다.

“제 인성에 대한 구설이 생긴 모양입니다.”

빌어먹을 놈들.

제빌이 그 집에서 어떤 존재였는지 알면서도 위선적인 잣대를 들이대는가. 분노하던 루비나드의 머리가, 갑자기 피가 쑥 빠져나가는 것처럼 식었다.

무언가 이상하다. 그녀의 감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제빌 경.”

“네.”

“쿠온가에 다녀오도록.”

예상대로였다.

이 소식을 들으면, 제빌을 아끼는 루비나드는 분명 이렇게 명령할 거라 계산하고 있었다.

이미 받은 명령이니 따를 수밖에. 제빌은 눈을 내리깔았다.

“알겠습니다.”

“단.”

루비나드가 제빌의 옷자락을 끌었다. 불쑥 다가온 그의 귓가에 붉은 입술이 다가간다.

제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누구도 듣지 못한 둘만의 이야기가, 닫힌 방 속에서 조용히 맴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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