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8)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루비나드의 우려와 달리 평온한 나날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도리어 초조함이 깃들었다.
“이상하단 말이야.”
“또 그 소리십니까. 같은 말 여러 번 하시는 거 싫어하는 거 아니셨습니까?”
“으음.”
서류를 보다가도 툭 튀어나오는 ‘이상하다’에 제빌이 핀잔을 주었다. 루비나드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붉은 입술이 살짝 뾰로통해졌다.
하지만 정말로 이상한 걸 어쩌란 말인가.
“어제의 슐라민 공작, 조금 이상하지 않던가?”
“글쎄요.”
“…그대는 정말로 둔하군.”
누가 누구한테….
제빌은 혀끝까지 튀어나오는 말을 억눌렀다.
“뭐가 그리 이상하셨습니까.”
“공작이 그대를 보는 눈에서 적개심이 사라졌단 말이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공작은 제빌을 볼 때마다 섬뜩하게 눈을 빛냈다. 하지만 어제 만난 그는 뭔가가 달랐다. 마치 신경 쓰지 않기로 한 것처럼.
하지만 그녀가 아는 슐라민은 이렇게 순순히 물러날 사람이 아니었다. 분명 무언가를 꾸미고 있을 텐데, 그게 뭘까.
“폐하는 정말 …하신데 적의에만큼은 민감하시군요.”
“적의에만큼은, 이라니?”
“…실수. 말의 어감에도 민감하시고요.”
저렇게 예민한데 왜 호의에는 저토록 둔감할까. 제빌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검토를 마친 서류를 정리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어서 그래.”
“그 소리도 벌써 몇 번이나 들었습니다.”
“으으.”
걱정해 줘도 하여간.
루비나드는 담담한 소꿉친구의 반응에 토라진 듯 삐딱한 자세를 취했다. 어차피 서류에 사인할 건 거의 끝났고, 다음 일정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그대는 이 뒤에 예정이 있나?”
“오늘 폐하의 공식적인 일정은 모두 마무리되었으니, 저는 서고에 가 볼까 합니다.”
서고인가.
책벌레 제빌다운 선택이었다. 요 며칠, 평소 이상으로 내내 서류에만 치여 살았으니 취미를 즐기고 싶을 법도 했다.
루비나드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간만에 본 바깥은 햇살 아래 반짝이며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루비나드는 불안감으로 계속 가슴이 울렁거리고 있었다.
이럴 땐 역시 그거뿐이겠지.
“제빌 경. 괜찮다면 잠시 그대의 시간을 줄 수 있나?”
설마, 데이트 신청…?
기대감과 실망, 흥분과 낙담이 뒤섞인 기묘한 표정이 제빌의 얼굴에 스몄다. 하지만 이내 낙담이 이겼다.
제빌은 무의미한 희망은 버리고 담담하게 물었다.
“제 시간은 어디에 쓰실 예정이십니까.”
“으음. 날씨가 좋지 않나.”
제 감정을 칼 같이 끊어 내는 데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루비나드에게는 그게 안 됐다.
그녀의 한마디에 또 가슴이 술렁인다.
질리지도 않고.
“그렇군요.”
“최근 책상 앞에만 앉아 있었더니 몸도 찌뿌둥하고.”
혹시 산책이라도 하자는 걸까. 아니면 성도의 순회라도….
물론 루비나드에게 데이트라는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을 터였다. 하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제빌에게는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 모두가 특별한데.
“그래서요…?”
제빌의 시선이 루비나드에게로 향했다. 환한 햇살 아래에서 그의 주인은 그보다도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이런 날엔 몸을 좀 움직여 보는 게 어떤가.”
* * *
그렇지. 이런 거겠지.
제빌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손에 쥔 목검을 휘둘렀다. 기사들이 연습에 사용하는 것이라 그런지 연륜이 묻어났다. 자잘한 상처가 가득한 표면을 가만히 매만지던 제빌의 귀에 익숙한 발소리가 들렸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
평소 입던 제복과는 다르다. 검을 휘두를 때의 루비나드는 언제나 가벼운 차림새였다. 그게 도리어 그녀의 매력을 돋보이게 했다.
하얀 셔츠 위를 강렬하게 채우는 붉은 머리카락. 몸의 선을 그대로 드러내는 검은 바지. 발목을 꽉 잡아 주는 부츠와 갈색의 목검.
그 어떤 선명한 색의 물감으로도 낼 수 없을 강렬함이었다. 거기에 기대감 뒤섞인 환한 미소가 더해지자 머리가 아찔해졌다.
제빌은 술렁이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짧은 심호흡을 내뱉어야만 했다.
“오랜만에 검을 쥐니 기분이 좋아. 바람을 가르는 소리만 들어도 짜증이 날아가는 것 같지 않나?”
제빌에게 있어서 검은 꼭 해야 하는 것, 그 이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린아이처럼 들뜬 루비나드에게 그런 말을 내뱉을 정도로 둔하진 않았다.
제빌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폐하.”
“역시! 그대의 손에 굳은살이 있기에 바로 알아봤지. 검은 대체 언제부터 단련한 건가.”
루비나드가 제빌의 곁으로 다가왔다. 느슨하게 풀린 셔츠와 움직이기 편하도록 하나로 묶어 올린 머리카락 사이로 새하얀 목덜미가 드러나 보였다. 눈 둘 곳이 없어진 제빌이 살짝 시선을 빗겼다.
물론 그걸 알아차릴 루비나드가 아니었다. 그녀는 제빌의 손을 덥석 잡아 올렸다.
“책만 읽던 그대에게 이런 게 생길 리 없는데 신기하다고 생각했지. 그대도 남몰래 단련을 계속했던 거군.”
하얗고 쭉 뻗은 손가락 사이사이의 굳은살이 그 증거였다. 어설프게 검을 배워서야 이리될 리 없었다. 그게 제빌을 계속 곁에 두는 이유이기도 했다.
권력은 사람을 변하게 만든다.
제1 황자도, 제2 황자도 그러지 않았던가. 하지만 제빌은 변하지 않았다.
황녀의 놀이 친구였던 때부터 황제의 부관이 된 지금까지도 한결같다. 제 자리를 허투루 사용한 적도, 노력을 게을리한 적도 없었다. 늘 자신을 더 나은 모습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한발 앞으로 내디디고 있었다.
어쩌면 루비나드가 황태녀로 임명된 그때부터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자신조차 되리라 생각지 않았던, 황제가 된 그녀를 돕기 위해.
“묘하게 체력이 좋다 싶었지. 날 위해 단련한 건가?”
제빌이 흠칫 몸을 떨었다.
이 둔한 사람은 한 번씩 이상한 곳에서 예리하게 굴곤 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황제의 부관으로서 체력을 단련하는 것도 중요하니 말이야.”
“…네?”
항상 엉뚱한 방향으로 튀긴 했지만.
“어릴 때부터 책을 많이 읽었던 그대니, 서류 작업이 녹록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겠지. 내가 황제가 될 거라 믿고 이렇게 단련을 한 건가.”
그 어떤 상황이 와도 흔들리지 않는다. 늘 루비나드에게 맹목에 가까운 믿음을 보낸다.
그녀가 제빌을 국서로 선택한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럼 얼마나 능숙해졌는지 대련을 해 보도록 할까? 예전엔 일 분도 못 버텼었던 것 같은데.”
루비나드가 제빌을 도발하며 웃었다.
그게 언제 적 일인데. 도발에 넘어간 제빌이 검을 꽉 쥐었다.
루비나드는 제빌의 손을 놓고 거리를 띄웠다. 동시에 분위기가 반전했다.
언제나 나른한 빛을 띠는 보라색 눈동자가 날카로워졌다. 그 눈빛만으로도 베일 것처럼 예리하다. 제빌 역시 진지한 얼굴로 자세를 잡았다.
쿠온가에서 사용하는 검술은 아닌데. 오히려 황궁 기사단의 검술에 더 가깝다. 어쩌면 이것도 내 영향이려나. 루비나드의 입가에 짧은 미소가 스쳤다.
“…후우.”
사자는 토끼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한다.
루비나드가 검술 스승에게 질리도록 들었던 조언이었다. 설령 상대가 책벌레 제빌이라도 봐줄 생각은 없었다. 루비나드가 제대로 자세를 취하자 위압감이 순식간에 부풀었다.
어차피 결혼 도구가 될 황녀에게 공부 따윈 필요 없다. 그런 생각으로 나태하게 굴던 루비나드가 유일하게 즐겼던 수업이 바로 검술이었다.
지금은 황실 기사단도 그녀에게는 한 수 접어 둘 정도였다. 그런 주인을 눈앞에 두고도 제빌은 그리 긴장된 기색이 없었다. 그저 담담하게, 흔들림 없이 검을 겨눌 뿐이었다.
“…핫!”
짧은 기합 소리와 함께 루비나드가 먼저 선공을 취했다.
날카로운 기세 그대로 검이 제빌을 향해 쇄도했다. 그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루비나드의 검을 막아 냈다.
공격을 시도했을 때는 실패를 예상하고 움직여야 한다. 루비나드는 그대로 살짝 검신을 흔들어 다시 한 번 검을 내뻗었다. 제빌이 한 걸음 옆으로 빗겨 서며 피하자 그 옆구리를 노리고 검이 휘어졌다.
“윽!”
여기까진 읽지 못한 제빌이 놀라 반사적으로 검을 고쳐 쥐었다.
손에 힘을 풀어 목검의 날을 잡은 채 손잡이로 겨우 검을 막아 냈다. 하지만 손아귀에 전해져 오는 충격이 범상치 않았다.
도움닫기도 없이 짧은 거리에서 휘두른 검인데 지나치게 묵직하다. 손아귀가 쓸리며 순간적으로 마비되었다. 그 반응을 읽은 루비나드가 엷게 웃었다.
“목검이라고 해서 검날을 막 잡아도 되는 건 아니라네, 제빌 군.”
툭, 하고 맞닿은 날을 쳐 낸 루비나드가 한 걸음 물러섰다.
놀림 받은 제빌이 재빨리 한 걸음을 내디디며 자세가 흐트러진 틈을 노렸다. 하지만, 그 공격을 읽지 못할 루비나드가 아니었다. 검을 크게 휘둘러 쳐 내자 그 반동으로 제빌의 손에 있던 검이 허공을 날았다.
“대련이 익숙지 않은 모양이군. 자세는 좋은데.”
“…독학이었으니까요.”
“하하. 그래도 대단한데? 마지막 공격은 생각한 것보다 타이밍이 한발 빨랐어.”
제빌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떨어진 검을 주웠다. 루비나드의 눈에 하얀 손아귀가 쓸려 부어오른 게 보였다.
너무 세게 쳤나. 루비나드가 검을 내리고 그에게 다가갔다.
그때였다.
“읏…!”
방심하고 있던 그녀의 목에 갈색의 선이 그어진 것은.
반사적으로 막아 내긴 했지만, 검의 기세가 강해 머리카락 몇 올이 한들한들 흩날렸다.
“방심하시면 안 되죠, 폐하.”
하얀 얼굴 위에 요염한 미소가 배었다. 눈꼬리를 휘며 웃는 제빌은 진심으로 즐거워 보였다. 그 미소에 루비나드는 분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방심했다고는 하나 생각보다 빠른 몸놀림이었다. 아까보다도 더.
그녀는 제빌의 검을 뿌리치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방심했는데도 막지 않았나.”
흥, 하고 입술 끝을 삐죽인 그녀가 제빌의 손을 잡았다.
평소에도 제빌은 체온이 높았다. 하지만 부어오른 손은 정말로 난로라도 쬔 것처럼 뜨거웠다. 제 손이 차갑다는 걸 잘 아는 루비나드가 손등과 손바닥을 돌려가며 부어오른 곳에 가져다 대었다.
“조금 과했나.”
“폐하께서 가차 없으신 게 하루 이틀입니까.”
덕분에 이렇게 당신의 손도 잡아 보았고.
사실은 당장이라도 이 작은 손을 마주 잡고 싶었다. 제 손안에 가두고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들어…. 제빌은 차마 하지 못한 말과 행동을 서글픈 미소로 전했다.
하지만 루비나드는 그걸 책망으로 받아들이고 억울하다는 듯 반박했다.
“아무리 나라도 초보자 상대로는 그리 심하게 하진 않아. 그대가 그 정도로 좋은 공격을 했다는 뜻이야. 그러니 기분 상하지 말게.”
위로하려는 셈일까. 자신의 기분 상할까 봐 조금이나마 신경 써주고 있는 거겠지.
그 모습이 귀여워서 제빌이 툭 웃음을 흘렸다.
“정말로 괜찮습니다.”
잡힌 손에 울퉁불퉁하고 거친 피부가 느껴졌다. 자신이 따르기엔 턱없이 부족할 정도의 굳은살이 가득했다.
언젠가 이 사람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 곁에 있기 부족하지 않은 남자가 될 수 있을까. 아니, 되어야만 한다. 청회색의 눈동자가 낮게 가라앉았다.
나는 이 사랑스러운 사람의 반려가 된다.
그는 스스로에게 되새겼다. 자신의 존재 의미를. 삶의 유일한 목적을.
제빌은 루비나드의 손 위에 제 손을 올렸다. 마치 무언가를 전하려는 듯이. 루비나드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알았다는 듯 씩 웃었다.
“그대는 의외로 어리광쟁이로군.”
제 손 위에 겹쳐진 손에 다른 손을 올렸다.
딱딱하지만 보드랍다는, 이율배반적인 감촉이 제빌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 묘한 감촉 속에 둘러싸여 어쩔 줄 몰라 굳어 있는 제빌에게 루비나드가 웃으며 물었다.
“이쪽 손도 해 달라는 거지?”
그건 아니었는데….
뭐, 그런 걸로 할까. 제빌은 덩달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녀에게 얼음을 내오도록 말해 두지. 제대로 식히게.”
하지만 그 감촉은 오래가지 않았다. 루비나드는 제 손을 빼고 아쉬운지 목검을 고쳐잡았다.
“난 훈련이 잘 되고 있는지 확인해 보고 가겠네. 그대는 먼저 들어가도록.”
기사단이 있는 연병장 쪽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는 폼을 보아 기사들과 대련이라도 할 모양이었다. 홀로 덩그러니 남은 제빌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목검을 고쳐 쥔 제빌이 툭, 집어 던졌다. 가벼운 움직임에서 연상되기 힘들 정도의 파공음이 울렸다.
쌔액, 하는 소리를 내며 날아간 검은 마치 자석에 이끌리기라도 한 것처럼 목검 꽂이에 안착했다. 탁, 투둑 하고 목검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채 나기도 전에 제빌은 뒤를 돌아 대련장을 떠났다.
주인의 곁으로 가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