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7)
“…라고 합니다. 하지만 자금….”
“그런 거라면… 공작…, …디…스도….”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아, 제빌의 목소리다. 아니다, 제빌은 이렇게 차갑게 말하지 않는다.
무슨 이야기인지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목소리 속에 비아냥, 오만 같은 것이 뒤섞여 있었다.
이건…, 정말로 제빌의 목소린가?
“으음.”
위화감을 견디지 못한 루비나드가 앓는 소리를 내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아직 잠이 덜 깬 탓에 몸이 무거웠다. 억지로 몸을 일으키자 사르르 얇은 이불이 그녀의 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눈을 들자 제빌이 보였다.
그는 소파 등받이에 기댄 채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분명, 대화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제빌…?”
눈을 깜빡이며 주변을 둘러보던 루비나드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잠결에 경칭은 생략했지만, 제빌에게는 별 상관이 없었다.
그게 더 듣기 좋았기에.
“네, 폐하.”
“그대가 왜….”
“제 방이니까요. 엄밀히 따지면 귀빈실이지만.”
그제야 루비나드의 머리가 조금씩 맑아졌다.
평소 쓰던 것보다 다소 거친 감촉의 침구. 낯선 천장.
어제 제빌과 이야기하다 그대로 잠이 든 모양이었다.
“이런, 나 때문에 그대가 소파에서 밤을 보낸 건가?”
“…하하.”
어색하게 웃음 짓는 것치곤 꽤 기분 좋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루비나드는 그 숨은 감정에까지는 닿지 못하고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설마 잠자리가 불편해서 밤을 새운 건 아니겠지?”
제빌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몸을 일으켜 루비나드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있었다.
“그렇게 하시면 머리카락이 상합니다.”
마디 굵은 손가락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살 쓸어내렸다. 막 잠에서 깼는데도 가느다란 머리카락은 생각보다 많이 엉기지 않았는지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래서 아쉬웠다.
차라리 잔뜩 엉겨 있었다면 그걸 핑계 삼아 언제까지나 이렇게 있을 수 있을 텐데.
“역시 잠을 설친 모양이군. 눈 밑이 검어.”
물끄러미 제빌의 얼굴을 살피던 루비나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제빌은 헛웃음을 지었다.
잠자리가 불편해서가 아니라 잠든 당신 얼굴에 빠져서 그런 거지만요. 제 앞에서 무방비하게 잠든 그 얼굴에 치밀어 오르는 것을 억누르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당신이 알기나 할까요.
뱉을 수 없는 말을 삼킨 제빌이 고개를 저었다.
“하루쯤은 끄떡없습니다. 그보다 폐하께서는 괜찮으십니까?”
“전장에서도 묵은 적이 있네. 침대면 아주 훌륭하지.”
그렇게 험한 곳에서 밤을 보낸 건 그때뿐이었지만.
중얼거리듯 덧붙인 루비나드가 제빌의 손을 부드럽게 밀어냈다. 미련이 남는 듯 다시 뻗어 오는 손끝을 재차 밀어낸 루비나드가 몸을 일으켰다.
“몇 시지?”
“다섯 시입니다.”
“그런데 왜 이리 어두운가.”
아직 해가 뜰 시간은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깜깜한 건 이상했다. 단단하게 닫힌 자색의 커튼은 빛 한 점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막아서고 있었다.
저것 때문인가. 침대에서 일어나려는 루비나드보다 제빌의 대답이 빨랐다.
“푹 쉬시라고 커튼을 닫아 두었습니다. 별 소용 없었던 것 같지만요.”
“으음, 아니야. 덕분에 잘 쉬었어. 그대도 조금 쉬는 게 좋겠군.”
아직 머리가 조금 멍했다. 루비나드는 가볍게 고개를 내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언제나 나른한 모습이긴 했지만, 이런 모습은 또 신선하다. 제빌은 아무 말 없이 그저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마치 제 눈에 새겨 넣기라도 할 것처럼.
이윽고 정신을 차린 루비나드가 그의 손을 끌어 억지로 침대에 앉혔다.
“조금 쉬게.”
“괜찮습니다.”
제빌은 그 손길을 거부하려 했다. 하지만 이내 제 앞에 불쑥 다가온 얼굴에 움직임을 멈춰야만 했다.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보라색 눈동자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밤새 제빌을 괴롭혔던 충동이 다시 치솟는다. 숨이 턱 막히는 기분에 반사적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일을 칠 것 같아서였다.
제빌의 상태를 알 리 없는 루비나드가 손을 뻗어 그의 눈 아래를 매만졌다.
“그대는 피부가 희어서 금세 티가 나. 내 부관이 피곤에 절어 다니는 건 용납할 수 없네. 누가 보면 내가 그대를 가혹하게 부려 먹는 줄 알 것 아닌가.”
이 사람은 대체. 자신이 그렇게 만들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둔했다. 결혼을 약속한 남녀가 같은 방에서 밤을 보낸 후 남자의 눈가가 검다면….
대체 누가 그런 식으로 생각할까.
“아무도 그리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차마 사실대로 말할 순 없어 그리 둘러 말했다. 루비나드의 어깨를 살짝 밀어 보았지만, 그 힘없는 손에 밀려나 줄 정도로 만만하지 않았다. 그녀는 도리어 제빌의 어깨를 꽉 쥔 채 뒤로 밀었다. 갑작스러워서인지 그녀의 힘을 이기지 못해서인지.
제빌은 그대로 침대 위로 폭 쓰러졌다.
“어쨌든 더 쉬게. 오늘은 정오에나 출근하도록. 급한 일은 끝났으니 그 정도는 괜찮아. 푹 쉬고 식사까지 마치고 와.”
그의 위에 올라탄 채로 씩 웃어 보인 루비나드가, 그대로 몸을 일으켜 나가 버렸다. 귀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침대 위에 늘어진 제빌을 남겨 두고.
“아, 정말 당신이라는 사람은….”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을 온통 뒤흔든다. 자각조차 없이.
그런 그녀가 너무 싫고, 그런 그녀가 너무나….
“잘 수 있을 리 없잖습니까.”
제빌은 팔을 들어 감은 눈 위를 가렸다.
눈이 따끔따끔했다. 피곤했다. 마음고생을 해서인지 서류 작업으로 며칠을 샜을 때보다도 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잠이 올 것 같지가 않았다.
침구에 물든 루비나드의 달콤한 향기.
어깨에 남은 손의 감촉.
그리고 감은 눈 뒤로 피어오르는 그녀의 미소가… 너무나 선연했기 때문에.
* * *
“빌어먹을!”
되돌아온 시종의 손에는 답신 하나 없었다. 아니, 대답은커녕.
-…으음, 지금은 일이 있어 답변을 적기 어렵네. 저하께는 나중에 찾아뵙겠다고 전해 주게.
대충 서신 위를 한 번 훑어본 뒤 그리 말했다고 한다.
대놓고 개무시한 것이다. 그 빌어먹을 공작 놈이.
“감히! 감히 이 로간 제국의 정통성 있는 유일한 황자인 나를…! 이 나라의 주인이 돼야 했었던 나를 무시해?! 일개 공작 따위가!”
벌겋게 달아올라 흰자와 홍채가 구분되지 않는 눈이 시종에게로 향했다. 벌벌 떨고 있는 그에게로 분노의 화살이 향했다.
“네놈은! 황자의 심부름꾼이나 되어서 그대로 쫄래쫄래 되돌아왔단 말이냐? 이 무능하고 쓸모없는 놈!”
론디아스는 시종을 향해 손에 잡힌 것을 집어 던졌다. 그게 페이퍼 나이프라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윽!”
서늘하게 번뜩이는 은빛에 놀란 시종이 다급히 몸을 피했다.
용케도 피했지만, 그 움직임은 일개 시종이 보일 수 있는 수준의 몸놀림이 아니었다. 하지만 거기에 의문을 품기엔 론디아스는 지나치게 광분해 있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죄다 날 무시하다니! 겨우 한 번, 겨우 한 번의 실수가 아니더냐! 그 한 번으로 이렇게…! 으아아아!”
론디아스는 책상 위의 물건을 집어 던지며 한참을 더 날뛰었다. 그가 진정한 것은 한 시간도 더 지난 후였다.
“후…, 제길!”
이를 바득바득 갈던 론디아스가 소파 위에 아무렇게나 늘어졌다. 그의 둔탁한 머리가 이제야 겨우 분노에서 벗어나 구르기 시작했다.
길드에 일을 의뢰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거금이. 하지만 론디아스에게는 지금 그 정도의 재력이 없었다.
귀족들은 발길을 끊은 지 오래였다. 냉궁에서의 생활비는 철저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더 요청하면 아마도 그 사용 용도를 캐묻겠지.
그래서 생각한 것이 슐라민 공작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었다.
누구보다 가장 국서에 가까웠던 가문. 하지만 그걸 ‘그’ 쿠온가에 빼앗기고 만 슐라민 공작이라면 못 이긴 척 제안을 받아들일 줄 알았다.
“그 영악한 놈이 선을 그었어.”
서신의 내용은, 다소 둘러 적긴 했으나 아는 이가 보면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겁 없이 그런 서신을 보낼 수 있었던 건, 전달 역이 눈앞의 겁쟁이였기 때문이었다.
이 남자가 감히 자신을 속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설령 빼앗겨 누군가가 보았다고 해도, 그 사실조차 제대로 숨기지 못할 겁쟁이니까.
슐라민 공작은 재 보지도 않고 손을 뺐다. 하지만 아마 론디아스의 계획을 방해할 생각은 없을 터.
성공했을 때 가장 이득을 보는 것 역시 그 남자니까.
“빌어먹을 놈이 손을 더럽히긴 싫고 이득은 보겠다? 세상 편하게 사는군.”
책상 위에 있는 건 죄다 집어 던지던 론디아스가 딱 하나, 되돌아온 서신만은 건드리지 않았다. 봉인을 확인하느라 펼쳐진 서신 위를 보라색 눈동자가 빠르게 내달렸다.
『 친애하는 슐라민 공작.
그동안 잘 지냈는가.
우리가 서로의 자리에 충실하느라 만나지 못한 지도 오래되었군.
이번에 로하르트가 저택을 방문해 이야기하다 그대 이야기가 나왔네.
문득 자주 만나 잔을 기울이던 옛날이 그리워지더군.
언제 한번, 그대가 여유로울 때 저택에 들러 주게.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났던 달그림자 지던 날처럼.
텔란. 』
텔란 대공과 슐라민 공작의 우애는 유명했다. 그래서 일부러 그의 이름을 빌려 서신을 쓴 것이었다. 누가 봐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도록.
그 배려조차 짓밟고 서신을 되돌려 보냈겠다.
“이건 잘 보관해 둬라.”
“네? 하지만….”
“감히 내 호의를 무시한 걸 후회하게 만들어 줘야지.”
이 서신이 공작의 저택에서 발견되게 할 방법은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그걸 위해서도 일단은 돈이 필요했다.
“제길. 제국의 주인이 될 터였던 내가 돈 때문에 아무것도 못 하다니.”
돈줄이 필요하다. 슐라민이 안 된다면 다른 놈이라도.
생각에 빠져 있던 론디아스의 귀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하,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냉궁에 손님이 찾아온 것은 사 년 만이었다. 마지막 방문객은….
-사용인들을 괴롭히는 것도 적당히 하십시오, 오라버니. 이대로면 오라버니의 시중을 들 이가 아무도 남지 않게 될 것입니다.
건방진 소리를 내뱉던 오만한 계집이었다.
젠장. 루비나드가 떠오르자 반사적으로 이를 득득 가는 론디아스 대신 시종이 입을 열었다.
“누구라고 하십니까?”
“베그란 남작이십니다.”
베그란? 그런 이름은 들어 본 적 없다.
아니, 사실 론디아스가 기억해 둔 건 최소한 후작가의 후계자 이상뿐이었다. 남작 나부랭이의 이름 따윈 기억할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돌려보내.”
“…….”
볼 것도 없다는 듯 내린 축객령.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시종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스쳤다. 하지만, 그 미소는 론디아스가 채 보기도 전에 사그라들었다.
그는 평소의 겁먹은 얼굴로 돌아가 입을 열었다.
“저하. 이야기라도 들어 보시는 게 어떠실지….”
“뭐?”
론디아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금방이라도 제 심장을 꿰뚫을 듯 사나워진 안광에 벌벌 떨면서도 시종은 입을 멈추지 않았다.
“듣기로 베그란 남작은 에넥스 후작가와 친밀하다 들었습니다. 어쩌면….”
에넥스 후작이라면 론디아스와는 꽤 가까웠던 인물이었다. 그가 냉궁에 유폐된 후에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그런데 그런 정보를 저 남자가 어떻게 알지?
그런 의문을 가질 정도의 이성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게다가 친근한 이름이 론디아스의 이성을 한층 더 마비시켰다.
“…좋다. 응접실로 데려와.”
시종은 고개를 깊게 숙였다. 아까 스쳐 지나갔던, 묘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 * *
“에넥스가라.”
밤.
오늘도 찾아온 루비나드를, 오늘은 일찍 돌려보냈다. 낮잠도 깊게 자는 루비나드라 방심했다가 아침에 ‘그’와 있는 모습을 들킬 뻔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오늘 오는 연락은 절대 들켜선 안 되는 부류의 것이었다.
예정대로 정시에 보내온 보고서를 확인하던 제빌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나쁘지 않았다. 생각한 것보다는 물고기가 작았지만, 줄줄이 딸려 올라올 먹잇감의 수를 생각하면 그동안 고생한 품은 나올 것 같았다.
하긴, 그 슐라민이 순순히 잡혀줄 리 없긴 하지. 그것도 그 론디아스를 믿을 턱이 없었다.
“그 서신이 손에 들어오면 뭐라도 도움이 되겠지.”
어떻게 써먹어 줄까. 제 손에 들어온 새로운 패를 떠올리며 제빌이 엷게 웃었다.
그 무엇이 되든 루비나드에게 방해가 되는 이들을 그냥 남겨 둘 생각은 없었다. 그 제거 작업을 방해하는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고. 누구의 눈에도 들어가선 안 될 종이 뭉치를 난로에 밀어 넣으며 제빌은 생각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