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결혼인 줄 알았더니 계략 결혼이었습니다(2)
“폐하!”
“그대의 말은 충분히 이해했다고 하지 않았나! 밀린 서류가 많으니 이 이야기는 다음에 하도록 하지.”
루비나드가 급하게 집무실의 문을 닫았다.
이 안에서는 국가 기밀이 오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러니 황제의 허가 없이는 그 누구도 함부로 들어올 수 없었다. 설령 그게 제국에서도 이름 높은 공작가의 가주라고 해도.
잠시 방 앞을 어슬렁거리던 이가 이내 돌아서는 기척이 났다. 그제야 그녀는 바짝 긴장하고 있던 몸을 늘어뜨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빌어먹을 늙은이.”
“폐하.”
“알고 있어. 말투에 주의하라는 거지. 그대의 잔소리는 하도 들어서 질렸어.”
종이 냄새, 나무 냄새, 친밀한 이의 향기. 그리고 익숙한 잔소리가 그녀의 마음을 가라앉혔다.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은 늦으셨군요, 폐하.”
루비나드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산뜻한 목소리로 자신을 반기는 미청년을 원망 섞인 눈으로 바라보았다.
“왜 오늘은 데리러 오지 않았는가.”
“어제 마무리 짓지 못한 서류가 있어서 먼저 와 있었습니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평소엔 루비나드의 방문 앞에서 제빌이 대기하고 있다가 함께 집무실로 향하곤 했다.
하지만 하필이면 오늘따라 제빌이 없었다. 그리고 하필이면 오늘따라 꼭두새벽부터 슐라민 공작에게 붙잡혔다.
“제빌 경.”
“네, 폐하.”
“혹시 내 얼굴에 뭔가 쓰여 있기라도 한 건가?”
불쑥 제 앞에 얼굴을 내미는 루비나드의 행동에도 제빌은 동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귀 끝이 붉게 달아오른 건, 정면에서 보고 있는 그녀는 아마 평생 눈치채지 못하리라.
제빌은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심장을 손끝으로 겨우 부여잡은 채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습니다만.”
“근데 왜 다들 나만 보면 결혼, 결혼. 마치 결혼이라는 글자가 낙인이라도 찍혀 있는 것처럼 구는 거지?”
제빌의 앞에 아니면 보여 주지 않는 약한 모습이다.
그 모습은 친밀함의 증거이기도 하고, 그를 남자로 보지 않는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래서 제빌은 그녀와의 거리가 늘 설레고 늘 아쉬웠다.
“이제 적령기를 지나셨으니까요.”
보통 10대에 약혼, 20대에 들어서자마자 결혼식을 치르는 다른 귀족들과 비교했을 때, 루비나드는 때를 놓쳐도 한참 놓쳤다. 그녀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는 제빌에게서 멀어졌다.
“그대까지 그런 소리를 하는 건가.”
불만 가득한 얼굴로 제자리에 앉은 루비나드의 눈썹이 한층 더 일그러졌다. 책상 위에서, 떠오르는 태양 빛을 받아 반짝이는 꽃다발.
이런 걸 여기에 둔 기억은 없었다.
“이건 뭐지? 설마 제빌 경, 자네가 놓아 둔 건 아닐 테고.”
“설마요. 보르본 공작가 차남이 보낸 선물입니다.”
“…….”
최근 이런 선물을 받는 일도 잦아졌다.
작년 말부터 결혼하라는 압박이 심해지기 시작하더니, 국서 후보로 거론되는 이들까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꽃은 물론 보석, 옷, 고서적 등등.
제국에서 가장 돈이 많은 이에게 선물 공세라니, 제정신인가. 루비나드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꽃다발을 옆으로 밀어냈다.
“꽃병에 꽂아 드릴까요?”
“그대가 가질 텐가?”
제빌이 곤란하다는 듯 웃었다. 루비나드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 다시 한 번 크게 한숨을 쉬었다.
예상대로였다. 집무실 앞에 놓인 꽃다발 속 보낸 이의 이름을 보자마자 버리려 했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바꾸었다. 폐하는 저런 선물을 그리 좋아하지 않으니까.
제빌은 엷게 웃으며 물었다.
“그래도 성의를 봐서 며칠이라도 꽂아 두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꽃이라면 후원에 썩어 날 정도로 있네. 심지어 이렇게 꺾어 버리면 며칠 가지도 못하잖나. 이런 짓을 할 돈이 있으면 세금이나 더 낼 것이지.”
확실히 오랫동안 루비나드의 곁을 맴돈 만큼, 보르본 공작가의 차남은 다른 구애자들보단 나았다. 최소한 루비나드가 좋아하는 것 정도는 파악한 모양이니까. 그 파악이 조금 잘못되었지만.
루비나드는 살아 있는 것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걸 좋아했다. 바쁜 일과 속에서도 틈틈이 후원에 나가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새로 심은 꽃이 꽃망울을 맺고, 꽃잎을 틔우는 것을 보는 걸 좋아하는 것이다.
이런, 곧 죽어버릴 꽃을 보고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걸 알기에 배알이 뒤틀리는 걸 참고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그 보람이 있었는지 루비나드는 그에게 썩 좋지 않은 인상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보르본 공작의 차남이라면 예전에 그대에게 무례를 저지른 자가 아니던가?”
벌써 십육 년이나 전의 일이었다.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니.
제빌은 부드럽게 풀린 얼굴로 웃음 지었다.
“기억하고 계셨군요.”
“그대는 잊은 건가? 꽤 기분 나빴을 텐데.”
그러지 않고서야 그 남자가 보낸 꽃다발을 책상 위에 둘 리가 없었다.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 루비나드에게 제빌이 고개를 저어 보였다.
“어렸을 때의 일이니까요. 그리고 그 역시 폐하의 국서 후보로 이름을 올린 이 아닙니까. 사적인 감정은 제하고 국익을 생각해야지요.”
역시 이 남자는 다르다. 루비나드는 최근 가슴 속을 어지럽히던 짜증이 조금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구애할 거라면 구애만 하면 될 텐데. 그들이 남긴 편지에는 하나같이 경쟁자들에 대한 견제가 들어가 있었다. 그렇게 돌려 까면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루비나드를 바보로 보는 걸까.
루비나드는 그런 남녀의 치정 싸움은 질색이었다. 과거에 그 때문에 자신은 물론 제빌까지 죽을 뻔하지 않았던가.
그런 의미에서 제빌은 그녀가 꿈꾸는 이상의 남성에 가장 가까웠다.
자신에게 애정이든 총애든 구하지 않고 그저 담담히 옆에 있어 줄 사람.
“…응?”
돌연, 무언가를 깨달은 듯 루비나드의 입에서 묘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서류를 넘기던 제빌이 고개를 갸웃하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여기는 공과 사를 잘 구분하는 자신의 모습에 호감도가 올라야 하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응? 이라니.
제빌의 눈빛이 흔들렸다.
“왜 그러십니까, 폐하?”
“…그러고 보니, 제빌 경.”
무슨 이야기를 꺼내려 저렇게 눈을 반짝이는 걸까. 설렘 섞인 불안감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나, 제빌은 이내 기대감을 지웠다.
그녀에게 그런 것을 기대하면 할수록 상처 입는 건 자신이었으니까.
그녀가 주는 것이라면 상처조차 감미롭긴 하다. 하지만, 그걸 드러내면 경멸하는 눈으로 자신을 볼 테지. 지금까지 쌓아 올린 무심한 소꿉친구의 이미지도 와르르 무너질 테고.
애써 감정을 지운 제빌이 웃으며 답했다.
“네, 폐하.”
“그대도 슬슬 결혼할 때가 되지 않았나?”
하지만 초조함을 숨길 순 없어 종이 위를 톡톡 치고 있던 펜이 뚝 멈췄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그날 이후, 벌써 이십삼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서로의 이성 관계에 관해 이야기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야기할 만한 일도 없었고.
그런데 왜 하필 지금 이 시점에서 저런 이야기를 꺼내는 걸까.
“관심 없습니다.”
이유는 알고 있었다.
루비나드의 몇 없는 놀이 친구는 철이 들 무렵 모두 그녀를 떠났다. 남은 것은 제빌뿐이었다. 즉, 그녀가 이런 걸 물어볼 또래가 제빌뿐이라는 뜻이었다.
내가 특별해서가 아니다.
자신에게 그렇게 고한 제빌이 표정을 감추고 무표정의 가면을 뒤집어썼다. 루비나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씩 미소 지었다.
“그대도 참 변하질 않아. 다들 제 짝을 찾아다니기 바쁠 때도 내 곁에만 붙어 있지 않았나.”
“언제 적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까.”
톡 쏘듯이 이야기하는 제빌을 보며 루비나드가 피식 웃었다.
여리고 지켜 줘야만 할 것 같던 소년은 어느새인가 무심한 잔소리쟁이로 변해 버렸다. 그래도 저럴 땐 어린 시절의 귀여운 면모가 남아 있는 게 보였다. 아마 자신에게 제빌이 특별한 존재이듯, 제빌에게도 자신이 그런 존재이리라.
속내를 내보일 수 있는 유일한 존재.
“그대도 한창때의 남자가 아닌가. 그래도 마음 한 자락 준 영애는 있겠지.”
왜 자꾸 이렇게 속을 떠보는 걸까.
제빌은 루비나드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의 그녀는 낯설었다. 자신이 계산하고 예측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 있었다.
“없습니다.”
“왜?”
제 마음은 이미 한 사람이 온전히 가졌으니까요.
그렇게 대답할 순 없었다. 대신 제빌은 질렸다는 얼굴로 제 앞의 서류를 들어 보였다.
“지금 제 앞에 놓인 서류의 양을 보고도 왜냐고 물으십니까? 제가 연애나 결혼을 하기 원하신다면 일단 업무부터 줄여 주십시오.”
으음, 조금 많긴 하지. 들릴 듯 말 듯 작게 중얼거린 루비나드가 머리를 긁적였다.
시녀들이 정성스럽게 빗겨 주었을 붉은 머리카락이 한들한들 흩날린다. 햇빛을 받아 마치 타오르는 불꽃처럼 보이기도 했고, 금빛 뒤섞인 꽃잎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모습을 멍하니 좇던 제빌이 한숨을 내쉬며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흥미도 없습니다. 폐하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있으니까요.”
이 말에 담긴 마음이 무엇인지 그녀는 모를 것이다. 그런데도 넘치는 마음이 때때로 이렇게 흘러나오곤 했다.
역시나 루비나드는 별 감흥 없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흐음. 나도 결혼엔 그다지 흥미가 없어서 말이야.”
하지만 ‘그러니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라고 할 순 없었다.
루비나드는, 황제니까.
신의 자손을 자칭하는 이상 이 핏줄을 후세에 남기는 것 역시 황제의 의무였다. 그러니 언제까지고 결혼을 미룰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황녀로서, 결혼의 도구로서 자라 온 루비나드에게는 지금 보내는 일상이 너무나 행복했다. 그녀의 작은 생각 하나로 나라가 안정되고, 더 효율적으로 바뀌어 간다. 성장시켜 나간다.
나라라는 것은 그녀가 지금껏 성장을 지켜본 것들 중 가장 보람 있고 행복한 것이었다.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을 정도로.
“이제 겨우 내정이 안정되기 시작했네. 외교도 그렇고. 이런 상황에서 내가 덜컥 임신이라도 하면 어찌 되겠나.”
“…그럼 일단 후계 문제는 미루고 결혼부터 하시는 건 어떠십니까. 슐라민 공작가나 뭉크리안 공작가 정도가 적절하겠군요. 정치적으로도 군사적으로도 폐하의 좋은 지지자가 되어 줄 것입니다.”
쿠온가와는 달리. 제빌은 목 끝까지 치고 올라온 그 말을 겨우 삼켰다.
제빌의 집안은 제국의 일곱 공작가 중 가장 세가 약했다. 이렇다 할 무훈 하나 세우지 못한 탓이었다. 그러다 보니 제빌이 어렸을 땐 공작이라는 작위조차 위태로운 상황까지 갔었다.
제빌의 공으로 위기는 넘겼지만, 여전히 쿠온 공작가는 약했다. 심지어 후계나 차남도 아닌 삼남인 제빌은 국서 후보에조차 제 이름을 올릴 수 없었다.
누구보다도 그녀와 가까운데도 불구하고.
루비나드는 씁쓸함을 애써 삼키는 제빌을 지켜보다 문득, 손가락을 들어 제 입술을 쓸었다.
“흐음….”
제국은 지나친 영토 확장으로 내정이 혼란스러워져 있었다. 그게 겨우 안정되기 시작했는데, 그 시기를 더 늦추고 싶진 않았다. 그러니 지금은 온전히 일에만 집중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가장 어울리는 결혼 상대가 눈앞에 있었다.
제빌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루비나드가 의자 손잡이에 팔꿈치를 걸친 채 턱을 괴었다. 그녀의 뒤를 후광처럼 가득 채운 햇살조차 빛이 바랜다. 그 정도로 그녀는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제빌의 유일하고 절대적인 주인이 갑자기 뜻밖의 말을 꺼냈다.
“그래서 말인데, 제빌 경.”
보라색 눈동자가 장난기를 가득 머금고 부드럽게 휘었다.
“우리, 결혼할까?”
청회색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