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외교관
“황제 폐하의 설득에 성공하셨습니다.”
노먼의 그 한마디에, 알렉스는 옅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네, 그나마 좋은 소식을 먼저 들을 수 있었다는 게. 폐하께서는?”
“이동 수단과 경로가 준비되기 전까지 남작과 함께 실내에서 대기하도록 했습니다.”
“좋아요. 그러면…….”
알렉스는 고개를 돌려, 스워포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나쁜 소식 차례인가?”
그 말에, 스워포드는 깊은 한숨을 쉬며 품속에서 만년필을 꺼내 들었다.
“황궁에서 의회로 향하는 길목은 모두 황태자의 병력이 깔려 있습니다.”
스워포드는 지도 위에 거침없이 X 표시를 해 나가며 알렉스에게 보고를 이어 나갔다. 의회로 향하는 모든 길목이 막혀 있었다.
지도를 내려다보며, 노먼이 입을 열었다.
“마치 의회를, 다른 수도 구획과 차단하려는 듯한 움직임이군요. 그 말인즉슨, 아직 친위대가 의회는 손에 넣지 못했다는 뜻이고.”
“비관적인 시각에서는, 의회를 빼면 모두 황태자의 손에 들어가 있다는 뜻이 되겠지.”
알렉스는 그렇게 말하며 한숨을 토해 냈다.
“외부하고의 연락은?”
“강력한 마나 교란이 발생한 상황입니다. 이겨 낼 방법은 있지만, 한 번밖에 할 수 없는 방법이라…….”
노먼의 말에, 알렉스는 침음성을 흘리며 다시 지도로 시선을 옮겼다. 포위된 의회, 수천 명의 황태자군, 고작 수십 명뿐인 파견 중대.
강행 돌파를 시도한다면 의회에 닿지 못할 것도 없었지만, 아델라인과 황제라는 지켜야 할 사람을 의회로 전달하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가장 큰 문제점이라면, 황궁 밖으로 나가 버리는 순간 그들이 한껏 부풀렸던 병력의 실체가 드러나 버릴 것이라는 점.
“베르티에 그놈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베르티에라면, 볼티져의 기동력이라면 뚫어 볼 만할 텐데. 말을 타고 장애물을 뛰어넘는 것 따윈 쉽게 해내는 그들이라면 훨씬 도움이 될 텐데.
바로 그때, 알렉스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날 찾았나?”
뒤를 돌아보자, 프랑크 육군의 제복을 입은 베르티에가 알렉스를 향해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자네는……?”
“아, 대사가 내게 황궁에 가서 상황을 알아보고 오라고 하더군. 다행히… 황제 폐하께서는 옥체를 보중하시고 계신 듯하고.”
멋쩍게 웃으며 알렉스에게 제 사정을 설명한 그는, 멋쩍은 웃음을 거두지 않고 물었다.
“상황이나 조금 알려 주겠나? 대사에게 보고할 건덕지는 있어야겠지.”
그러자 알렉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지도를 손으로 가리켰다.
“의회를 제외한 모든 주요 시설과 청사가 황태자의 손에 들어갔다. 수도 사단은 의회의 진입 허가가 없으면 들어오지 못하고, 의회는 제3 수도경비대가 방어 중이지만 포위되어 있지. 마나 교란이 발생해, 마법 통신도 힘들어.”
알렉스의 말에, 베르티에는 허허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외통수구만?”
“…일단은.”
알렉스의 고민 어린 표정에, 베르티에는 그를 향해 물었다.
“만약, 만약 자네가 제국의 의사 결정권자라면.”
그는 한 가지 가정을 내세운 뒤, 알렉스에게 제안했다.
“프랑크 대사관의 마차를 빌리는 삯으로 얼마까지 낼 수 있겠나?”
그 말에, 알렉스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 반응을 본 베르티에는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봤다.
잠시 뒤, 알렉스는 노먼을 향해 말했다.
“중위, 아델라인을 불러 주세요.”
그 지시에, 노먼은 고개를 끄덕인 뒤 황제 궁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 노먼과 함께 아델라인이 나왔다.
“무슨 일이에요, 알렉스?”
“의회로 갈 방법이 생겼습니다.”
알렉스는 그렇게 말하며, 베르티에를 바라봤다. 그러자 베르티에는 곧바로 설명을 이어 나갔다.
“황궁 근처에 6인승 마차를 준비해 뒀습니다. 그걸 타고 돌파를 강행, 의회로 이동합니다.”
그 말에, 아델라인은 베르티에를 향해 말했다.
“하지만, 지금 의회로 가는 길은 모두 봉쇄되어 있다고…….”
“아, 참. 한 가지 설명을 빼먹었군요.”
베르티에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가슴을 툭, 주먹으로 쳤다.
“프랑크 왕국의 외교관 신분인 제가. 그 마차에 같이 탑니다. 일행들과 함께.”
베르티에의 말에, 아델라인은 베르티에와 알렉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꿰뚫었다. 무모하지만, 가능성은 있었다.
아델라인은 걱정하는 눈으로 알렉스를 바라봤다. 그러자 알렉스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괜찮을 거예요. 베르티에 보좌관이, 안전하게 아델라인을 의회로 데려다줄 거예요.”
“하지만… 알렉스는…….”
아델라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하자, 알렉스는 피식 웃으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저는 괜찮아요. 그러니까, 걱정 말아요.”
알렉스가 가볍게 아델라인의 몸을 끌어안고 등을 토닥이자, 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따듯한 온기가 아델라인의 몸을 데우는 게 느껴졌다.
그러자 아델라인은 알렉스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소원권. 지금 쓸게요.”
아델라인의 느닷없는 말에, 의문의 표정을 띠던 알렉스는 한참 전 일을 간신히 떠올린 뒤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 보세요.”
쪽.
알렉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델라인의 팔이 그를 끌어안으며 그녀의 입술이 그의 입에 맞닿았다.
잠깐의 입맞춤이 끝나고, 아델라인은 그의 몸을 풀어 준 뒤 그의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다치지 말고 돌아와요. 꼭.”
그녀의 눈에 물기가 어리는 게 보였지만, 알렉스는 애써 모른 척하며 아델라인의 등을 토닥여 줬다.
그러나 아델라인은 곧바로 알렉스의 품에서 나온 뒤, 고개를 홱 돌리고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베르티에를 향해 말했다.
“어서 가요, 베르티에 보좌관.”
알렉스를 돌아보지 않고 한 방향으로 걸어가는 아델라인을 보며, 베르티에는 곧바로 그녀를 향해 외쳤다.
“반대편입니다, 남작. 그리고 황제 폐하도 모시고 가셔야죠. 혼자 어딜 가려고.”
베르티에의 말에, 홀로 걸어 나가던 아델라인의 귀가 붉어졌다.
그 뒷모습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본 알렉스는 베르티에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5분 뒤에 남동쪽으로 위장 공세를 펼치겠네. 틈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부탁하지.”
그 말에, 베르티에는 모자를 고쳐 쓰며 짤막하게 답했다.
“알겠네.”
* * *
“오래 걸리는군요.”
의회 정문을 마주 보는 광장의 한 천막.
그 천막 안에서 차를 마시며, 피오나는 황태자를 향해 한마디 감상을 내뱉었다.
그러자 마치 기사라도 되는 것처럼 화려한 판금 갑옷을 입은 황태자는 피오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제3 수도경비대가 의회를 경비하고 있었던 건 계산 밖이었지만, 어차피 상관없는 일이오. 파견 중대 뒤치다꺼리만 하던 이들이니, 황태자비가 내어 준 병사들로 쉽게 무너뜨릴 수 있어.”
근거 없는 자신감에 가득 찬 황태자의 호언장담을 들으며, 피오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안심이네요. 황후 마마께서는 괜찮으신가요? 이런 상황이 익숙지 않을 텐데.”
피오나는 황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황후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괜찮아요. 귀가 조금 아프긴 하지만, 곧 끝날 테니까.”
“그럼. 그러니 조금만 더 기다리시오. 곧 승리를 그대에게 전해드릴 테니. 그나저나 황궁에 남겨 둔 병사들은 왜 아직도 파견 중대를 격파하지 못한 건지.”
고작 수십 명밖에 되지 않는 라이플맨들을 상대하기 위해 500명이나 되는 병사를 황궁에 남겨 뒀건만.
황태자는 혀를 차며 시계를 바라봤다.
어느새 시침은 5시를 지나 있었다. 해가 조금씩 기울고 있었다. 원래라면 이즈음 모든 상황을 마치고 일찍 저녁을 먹는 게 계획이었는데, 제3 수도경비대의 거머리들이 의회당에 틀어박힌 채 시간을 끌고 있었다.
“쯧. 더욱더 속도를 내라고 명령해라. 상대는 고작 경비대 아닌가!”
황태자는 천막 앞에서 대기하던 친위대 간부를 향해 지시를 내렸다. 그 명령을 전달받은 간부는 황태자의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뛰쳐나갔다.
바로 그때, 바깥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뭐야, 저 마차는!”
“막아! 막으라고!”
“쏘지 마! 프랑크 대사관 마차다!”
“쏘면 안 돼!!”
친위대의 대열에 난입해 들어온 한 마차. 프랑크 왕국의 국기를 마차에 매달고 나타난 그 마차는 공격을 이어 나가던 친위대의 대열을 한껏 흐트러뜨렸다.
마차 하나. 고작 마차 하나였지만, 그 누구도 그 마차를 쏠 수 없었다. 마차 안에 프랑크 왕국의 외교관이 타고 있다면, 그 마차를 향해 총을 쏘는 것 자체가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친위대의 간부들은 휘하의 병사들에게 총을 거두라 닦달했다.
그사이, 마차는 의회의 정문을 틀어막으며 멈춰 섰다. 그러자 필사적으로 의회를 방어하던 경비 대원들과 그 방어를 뚫으려던 친위 대원 사이에 장벽이 생기고 말았다.
그 누구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장벽이 생기고 만 것이다.
“이… 이게 무슨.”
황태자와 피오나는 그 모습을 오페라글라스로 지켜보며 입을 벌리고 말았다. 잠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황태자는, 이내 마차를 향해 걸어갔다.
그사이, 마차는 문을 열어 의회당 안으로 사람을 내렸다. 마차에 가려 누가 내렸는지는 볼 수 없었지만, 의회당 안도 마찬가지로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 소란에 조급해진 황태자는 빠르게 마차로 다가갔다. 그러자 창문이 열리며, 베르티에가 고개를 내밀었다.
“아이고, 오랜만입니다, 황태자 전하.”
너무나도 평안해 보이는 베르티에의 표정에, 잠시 할 말을 잊은 황태자는 그를 향해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일이오! 어서 길을 트시오!”
“아니, 저도 그러고 싶은데.”
베르티에는 허허 웃음을 흘리며 마차를 툭 쳤다.
“마차가 말썽이지 뭡니까. 하필 의회 앞을 지나가다가. 그래서 잠시 멈춰 세웠습니다, 그려.”
마차의 상태는 멀쩡하기 그지없었지만, 베르티에는 얄밉기까지 한 미소를 유지하며 황태자를 바라봤다.
“아, 혹시나 말인데, 마차를 건드리실 생각은 하시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베르티에는 그렇게 말하며 황태자를 내려다봤다.
“마차에 손이라도 댔다간… 프랑크 왕국의 외교관을 향한 무력행사라 이해하겠습니다. 알겠지요?”
뻔뻔하기 그지없는 베르티에의 말에, 황태자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조금만 더 공격을 퍼부으면 뚫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고작 마차 한 대에 의회 정문이 가로막히고 말았다.
그러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만약 이 마차를 건드리게 된다면, 황태자는 프랑크 왕국을 적으로 돌리게 된다. 의회를 해산시키고 황권을 손에 쥐는 데 성공하더라도, 프랑크 왕국은 베르티에로 인해 만들어진 명분을 놓치지 않고 제국을 침공할 것이다.
제국 정부를 전복하는 와중에 피해를 입은 외교관이라는 명분은, 놓치기에는 너무 아까운 명분이니까.
프랑크 왕국을 적으로 돌리고 의회당을 재빨리 함락시키느냐, 아니면 언제 치워질지 모를 마차가 떠나기를 기다리느냐.
황태자가 양자택일의 기로에 빠져 있는 동안, 베르티에는 뒤를 바라봤다.
아델라인과 황제, 나이아 그리고 노먼 중위가 경비 대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의회당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의회당 앞뜰은 처참했다. 급습을 받았던 건지, 급조 바리케이드 하나도 갖추지 못한 채 황태자의 친위대와 맞서 싸우고 있었다. 친위대가 입은 피해 만큼이나, 경비 대원들의 피해도 심각했다.
과연 저들이 이길 수 있을까.
베르티에는 그런 의문을 품으면서도, 의회당으로 들어가는 아델라인의 뒷모습을 향해 중얼거렸다.
“그대가 선택한 운명에, 승리가 함께하길 바라겠습니다.”
진심을 담은 응원이, 목소리에 어려 있었다.
* * *
처참했다.
제대로 된 방어물 없이 의회당을 지켜야 했던 제3 수도경비대는 두 시간여 만에 절반의 전력을 잃었다. 의회당 복도에는 죽은 사람과 함께 곧 죽을 사람이 셀 수도 없이 누워 있었다.
쓰러진 경비 대원들의 총은, 한 번도 총을 쥐어 보지 못했을 의회당의 직원들 손에 대신 들려졌다. 처음 총을 들어 본 그들의 손은 벌벌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은, 복도를 걸어 본회의장으로 향하는 아델라인에게 향했다.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온 그들이, 이 절망적인 상황을 바꿔 줄 수 있기를 바라는 시선이 아델라인과 황제를 향했다.
그 시선이 버거워 고개를 푹 숙이려는 찰나, 황제의 주름진 손이 그녀의 어깨 위에 얹어졌다.
“고개를 들게나.”
그 말에, 아델라인은 황제를 바라봤다.
“힘겨운 상황에 빠진 이들은 자네 같은 이에게 의지하기 마련이라네. 그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없을지라도.”
“…….”
“그러니 고개를 들고,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게. 저들을 위해서라도.”
황제의 깊은 목소리에, 아델라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더더욱 많은 시선이 아델라인에게로 향했다.
의식을 잃어 가는 동료의 손을 잡으며 마지막 온기를 나누어 주는 경비 대원도, 서툰 손길로 부상자의 상처에 붕대를 감아 주는 의회당 직원도, 바리케이드를 만들기 위해 책상과 의자를 꺼내 밖으로 나르는 보좌관들도,
사람들에게 전사자의 머스킷을 쥐여 주고 사용법을 가르쳐 주는 클린턴 경위도, 한 손에 검을 든 채 경비 대원들에게 끊임없이 지시를 내리는 휘태커 경감도.
그리고…….
“공녀님.”
피투성이가 된 채, 거친 숨을 내뱉으며 자신에게 피 묻은 편지를 건네는 안드레이도.
“공작 각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뭐라도 해낼 수 있다는 것처럼.
고작 한 명의 사람일 뿐인 자신이, 이 상황을 손쉽게 뒤집어 버릴 수 있다는 것처럼.
“그리고 이건, 공작 각하께서 남기신 유서이십니다.”
너무나도 무거운 시선들이, 아델라인에게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