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황제의 질문
“허억, 허억, 제기랄…….”
알렉스는 황제 궁을 둘러싼 생울타리에 몸을 기대며 나무 틈새 너머로 밖을 바라봤다.
그 짧은 순간의 교전을 치르는 동안 여덟 명가량의 대원들을 잃었지만, 황제 궁으로 향하는 길에는 그보다 수십 배 많은 친위대 병사들이 누워 있었다.
“…….”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입으로 탄약포를 뜯어 장전하는 중에도, 알렉스의 머릿속은 계산하느라 바빴다.
탄약이 모자랄 일은 없었다. 그들의 손에는 파견 중대 2진이 쓸 물자까지 손에 들어와 있었다. 그러나 교전을 치르면 어찌 되었건 피해는 발생한다. 죽거나 부상당하거나, 다음 전투에 뛰어들지 못하는 대원들이 나온다.
그렇게 가랑비에 옷 젖듯, 조금씩 병력을 잃으면……
“젠장.”
아델라인과 노먼, 그리고 두 사람의 호위를 위해 따라간 네 명의 라이플맨. 그들이 황제를 설득해, 황제를 의회로 데려가야 한다.
그렇게 해서 황태자의 명분을 없애야 한다. 의회가 멀쩡할 리는 없겠지만, 휘태커 경감의 제3 수도경비대가 있으니 의회가 제 기능을 하고 있다는 데에 판돈을 걸어야 했다.
“후우…….”
알렉스는 숨을 고르며 다시 앞을 바라봤다. 전열을 가다듬은 친위대 병력이, 천천히 앞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시간을 벌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여든 명도 남지 않은 파견 중대가, 2천 명 넘는 수준으로 몸집을 키운 황태자의 친위대를 막아 세울 수 있을까.
1개 대대급 병력이라도, 아니, 대대 편제에 붙어 오는 화기 중대라도 있었다면…….
“…아!”
그 순간 불꽃이 튀듯 떠오른 한 가지 생각. 알렉스는 그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짧은 계산을 마친 뒤 목소리를 높여 명령을 내렸다.
“화기 중대!! 준비되는 대로 다 쏴 버려—!!”
알렉스의 외침에, 바로 옆에서 전투를 준비하던 라이플맨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화기 중대라니, 저 중대장이 기어코 정신을 놓아 버린 걸까.
하지만, 2년 가까이 호흡을 맞춰 온 그들은 이내 알렉스의 의도를 깨닫고는 그의 장단에 맞춰 주기 시작했다.
“도수박격포!! 발포합니다!!”
“월건!! 저격 목표 지정 부탁드립니다!!”
“대포 포가를 쏴!!”
그들 앞으로 다가오는 친위대 병력을 향해, 도수박격포의 포탄이 쏟아졌다. 친위대가 끌고 오던 대포는 월건의 저격과 함께 포가가 부서져 주저앉고 말았다.
알렉스가 꾸며 낸 ‘화기 중대’라는 단어와 맞아떨어지는 화력이 쏟아지자, 진격해 오던 친위대가 주춤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스워포드가 라이플맨 몇몇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며 알렉스의 거짓말에 살을 더했다.
“3중대가 우회 타격 시도하겠습니다!! 3중대!! 따라와!!”
그 말과 함께, 여기저기서 라이플맨들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한번 거짓말을 시작한 이상, 거짓말을 부풀리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2중대!! 엄호 사격!! 3중대가 우회할 때까지 저들을 묶어 둔다!!”
“보급병!! 전진 기지에서 박격포탄 가지고 와!”
“후속 병력, 도착 예정 시간 30분!!”
신기루나 다름없는 공허한 말들이었지만, 그와 함께 병사들이 움직이고 총탄이 쏟아지자 공허한 말들은 진실처럼 다가왔다.
그들이 상대하고 있는 것은 라이플 여단. 모든 전장을 승리로 장식한 불패의 정예 부대. 그 사실만으로도, 친위대원들의 머릿속에서는 불안함이 싹텄다.
눈으로 보이는 건 고작 1개 중대밖에 안 되는 라이플맨들이었지만, 친위대의 간부들 머릿속에는 몇 가지 문장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만약 사실이라면, 만약 진짜라면.
잠시 뒤. 그들은 결정을 내렸다.
“친위대 병력! 황궁 바깥으로 후퇴합니다!!”
친위대 병력이 후퇴하고 있었다. 부상자와 전사자를 내버려 둔 채, 황궁을 떠나고 있었다.
그 장면을 내다본 알렉스는, 다시 등지고 있던 황제 궁으로 시선을 돌렸다.
“부탁합니다, 아델라인.”
당신에게 모든 것을 건 제가, 옳았다는 것을 보여 주세요.
* * *
폭음이 들려왔다. 끊임없이 들려왔다.
황제에게 다다르기 위한 황태자와 친위대의 파상 공세와 가지고 있는 화력을 전부 쏟아부으며 그들을 틀어막는 파견 중대의 방어진이 격돌했다.
그 치열한 전투의 소리에, 황제 궁의 사용인들은 모두 혼란에 빠져 우왕좌왕하기 바빴다. 황제의 집무실을 향해 걸어가는 아델라인에게 시선을 향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당장에라도 주저앉고 싶었다.
알렉스와 함께 후발대로 출발한 라이플맨들을 따라가는 것조차, 운동 한번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었던 아델라인에게는 버거운 일이었다. 허벅지는 터질 것만 같았고, 목구멍에서는 비린 쇠 맛이 느껴졌으며, 가슴은 찢어질 듯이 욱신거렸다.
황제 궁에 오는 동안, 아델라인의 귓가에는 몇 번이고 총탄이 스쳐 지나갔다. 비단을 칼로 가르는 듯한 소름 끼치는 소리는, 평생을 가도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대비할 시간도 방법도 없이 연이어 들려온 총성은 아직도 아델라인의 귀에 이명을 남겼다.
그런데도 아델라인이 멈추지 않고 걸음을 옮기는 이유는 단 한 가지.
‘황제 폐하를 설득해서, 의회로 가 주세요.’
알렉스의 한마디에, 아델라인은 이를 악물고 움직이지 않을 것만 같은 다리를 억지로 움직이고 있었다. 황제를 움직여 황태자의 명분을 없애야 했다. 황태자가 황제가 되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괜찮으십니까, 남작님.”
옆에서 노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신보다 두 배 이상 나이가 많은 그였지만, 그는 아델라인의 곁을 지키는 다른 대원들과 마찬가지로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있었다.
그런 그를 향해, 아델라인은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며 앞을 내다봤다.
황제의 집무실. 그 앞에는…….
“이즐링턴 남작.”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풀턴이 고개를 숙여 아델라인을 향해 인사했다.
“황제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풀턴의 목소리에 묻어 나오는 동요. 비록 십수 년간 단련된 몸짓과 표정이 놀람의 감정을 드러나지 않게 막아 주고 있었지만, 목소리만큼은 그의 감정을 짐짓 드러내듯 살짝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아델라인은 뛰느라 흐트러진 옷매무새와 머리를 서둘러 가다듬은 뒤 자신을 따라와 준 노먼을 비롯한 라이플맨들에게 요청했다.
“잠시 바깥에서 기다려 주시겠어요?”
아델라인의 말에, 노먼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겠습니다.”
노먼의 말에, 아델라인은 다시 몸을 돌려 풀턴을 바라봤다.
“열어 주세요.”
“알겠습니다, 남작.”
풀턴이 문을 열자, 안에서는 부드러운 홍차의 향기가 느껴졌다. 바깥에 가득한 피의 비릿한 냄새와 화약의 매캐한 탄내가 꿈인 것처럼,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오직 은은한 차의 향기만이 아델라인의 코에 느껴졌다.
“좋은 오후일세, 남작.”
창문으로 바깥을 바라보던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아델라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동안 강녕하셨습니까, 폐하.”
“덕분에. 자, 차 한잔하지. 거기 앉게, 막 끓여서 아직 따듯하다네.”
바깥에서 선명히 들려오는 총성이 안 들리는 것처럼, 그는 미소를 지으며 아델라인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러자 아델라인은 순간 벽을 마주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폐하, 황태자가 군을 일으켜 제국을 전복하려 하고 있습니다!”
머릿속으로 쥐어 짜낸 한마디. 그러나 황제는 어릿광대의 재주를 보듯 웃음을 흘리며 아델라인에게 반박했다.
“황태자는 이 나라의 둘째가는 자이네. 피에 무엇이 섞였다 한들, 짐이 막아 세우지 않는 한 제국의 모든 것을 손에 쥘 권리가 있어. 심지어는…….”
황제는 방금까지 자신이 앉아 있던 의자를 툭, 치며 아델라인을 바라봤다.
“황좌라도 말이지.”
그 말에, 아델라인은 나아갈 길을 잃고 말았다. 마치 황태자를 두둔하는 듯한 황제의 말에, 아델라인은 황제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막막해졌다.
그러나 황제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향해 말했다.
“하지만 짐은 자네를 위해 차를 준비했고, 차를 마시는 동안에는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일 생각이네. 그게 예의니까.”
황제는 그렇게 말하며 아델라인을 향해 물었다.
“그러니, 차 한잔하지 않겠나?”
그 거부할 수 없는 한마디에, 아델라인은 테이블 옆 소파에 앉았다. 이내 황제가 아델라인의 맞은편에 앉았다.
아델라인은 맞은편의 그를 바라봤다. 찻주전자를 들고, 자신의 잔을 새로 채우는 그의 모습은 마지막으로 그와 함께 차를 마셨던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상황은 너무 급박하고 당황스러웠고, 그에 반해 황제의 태도는 너무나도 평안해 보였다.
바로 그때, 황제가 아델라인 앞에 놓인 찻잔에 차를 따라 주며 그녀에게 말했다.
“마시게. 일단 차를 마시면, 마음이 편해질 게야.”
그 거부할 수 없는 한마디에, 아델라인은 천천히 찻잔을 들고 차를 입에 머금었다. 그리고 아델라인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의문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순간, 황제의 입이 열렸다.
“왜 이리 침착하고 평온할까.”
마치 자신의 생각을 꿰뚫어 본듯한 말에, 아델라인은 놀란 눈으로 황제를 바라봤다. 그러자 황제는 미소를 지으며, 자신이 내놓은 질문에 스스로 답했다.
“처음 겪으면 더없이 당황할 일도, 두 번째부터는 익숙해지기 마련이지. 그게 짐의 답이라네. 이런 일이 다시 벌어지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만.”
그 말을 내뱉는 눈은 감히 그 속내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 그때, 그 눈을 마주하던 아델라인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떠올랐다.
다시 한번 차를 머금으며 생각을 정리한 아델라인은, 황제를 바라보며 질문을 했다.
“한량 황자로서의 삶은 어떠셨습니까?”
아델라인의 예상치 못한 질문에, 황제는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가 미소를 지으며 차를 마셨다.
“고역이었지.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억지로 들이켜며 진탕 취하고, 그 와중에도 엄한 소리 하지 않을까 온 힘을 다해 헛소리를 내뱉고.”
황제의 웃음에는, 약간의 씁쓸한 기색이 담겨 있었다.
“황실 연금을 모두 도박과 술에 탕진하고, 그 돈이 다 떨어지면 이복형제들 앞에서 추태를 보이며 실링 한 닢, 파운드 한 닢을 구걸했네.”
“…전 황제의 칼날을 피하려면, 온 힘을 다해 허리를 굽히는 수밖에 없으니까.”
“잘 아는군.”
짤막하게 답하며 아델라인의 대답에 긍정한 황제는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잠시 차로 입술을 축인 황제는, 아델라인을 바라보며 질문을 했다.
“자네가 짐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러자 아델라인은, 차분한 목소리로 황제에게 말했다.
“의회로 함께 가, 의원들 앞에서 황태자를 폐하여 주십시오.”
그 말에, 황제는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아델라인을 향해 물었다.
“무슨 이유로? 황태자가 짐의 피를 잇지 않았기에? 대신 짐의 피를 이은 매닝햄 대위를 황좌에 앉히고자 하는 것인가?”
너도 이전의 군웅들과 같이, 황권을 계승시키기 위한 전쟁을 하려는 것이냐.
그렇게 묻는 황제의 미소에 감춰진 날카로운 시선을 응시하며, 아델라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차피 스스로 무너질 황태자. 짐이 나서지 않아도 실패로 돌아갈 반란 아닌가. 짐이 나설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데?”
황제는 다시 한번 차를 머금은 뒤, 아델라인을 향해 말했다.
“최대한 적은 피해로, 이 일을 끝맺기 위해서입니다.”
“사람 한둘 더 죽는다고 망할 제국은 아닌데 말이야.”
황제는 그렇게 말하며 찻잔을 한 번 더 입가로 가져간 뒤, 아델라인을 향해 말했다.
“그런데도 짐이 나서야 하는 이유를, 짐에게 말해 보게나.”
황제가 아델라인을 바라보자, 그녀는 차로 목을 적신 뒤 입을 열었다.
“일전에 베른하르트제 목걸이로 황후궁을 찾았을 때, 폐하께서는 황후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한 가지 원하는 바를 들어주시겠다 말씀하셨지요.”
아델라인은 황제를 바라보며 과거의 일을 상기시켜 줬다. 1년도 더 지난 일이었지만, 황제는 기억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빛에는, 어쩌면 기대감도 가득 차 있었다.
“계속해 보게.”
“부족한 폐하의 기사가, 폐하의 힘을 필요로 하옵니다. 그때 약조하신 것처럼, 제게 폐하의 힘을 빌려주시옵소서.”
아델라인의 말에, 황제는 미소를 지었다.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해 줘서 고맙네. 남작.”
미묘한 표현의 변화. 마치 작년 황후궁에서 있었던 대화에서처럼, 황제는 아델라인을 향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나 그 미소에는, 그때와 다른 감정이 섞여 있었다.
신선함, 그리고 흥미로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지팡이를 짚으며 아델라인을 향해 말했다.
“자, 그럼 의회까지 호위는… 그대에게 맡기도록 하지. 나의 기사, 나의 가신이여.”
노구의 황제는, 자신의 곁을 지키고 있는 기사이자 귀족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아델라인은, 고개를 깊게 숙이며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뜻하시는 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