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9월의 어느 날
“그어어…….”
10시 무렵, 복도에서 언데드가 낼 법한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힘없는 발소리와 함께, 그 소리는 점점 집무실로 다가왔다.
잠시 뒤,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자 서류를 보고 있던 알렉스는 시선을 돌리지도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왔냐.”
그러자 좀비처럼 몸이 축 늘어진 팩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어어…….”
“병원 다닐 만하냐.”
“그어어…….”
“그래, 수고했다. 내일도 4시 기상?”
“그어어…….”
“그래, 어서 씻고 자라. 당직한테 깨워 달라 할게.”
‘그어어’로만 답한 팩은 문을 닫고 다시 터덜터덜 걸어갔다. 의무 부사관이 되어 병원 근무를 시작한 팩의 상태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오전에는 라이플맨으로서, 오후에는 병원에서 일하며 일 평균 16시간 근무라는 위업을 한 달 반째 이어 나가고 있는 팩. 예상했던 시기보다 꽤 빨리 의사 자격시험을 칠 기회가 찾아왔기에 본인은 만족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래도 옆에서 지켜보는 알렉스로서는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그를 돌려보내고 난 뒤, 알렉스는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이런 일상적인 업무도, 라이플 여단을 곧 떠나게 된다 생각하니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하아아…….”
옅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알렉스는 시계를 바라봤다. 슬슬 교대 시간이었다.
그리고 때마침, 집무실 문에 가볍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중위.”
알렉스의 말에,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충성. 당직 서러 왔습니다.”
“그래요, 팩은 또 4시 기상이라니까 불침번 애들에게 전달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때, 또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구인지 짐작은 가지 않았지만, 알렉스는 곧바로 노먼 너머의 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들어와.”
그러자, 문이 열리고…….
“좋은 밤이에요, 알렉스.”
살짝 부끄럽다는 미소를 지으며 문 너머로 고개를 내민 아델라인을 보자, 알렉스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델라인? 이 시간에 여긴 무슨 일이에요?”
내일 같이 시간을 보내기로 했던 아델라인이, 오늘 갑자기 관사로 찾아오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의 반응을 이해한다는 듯, 그리고 쑥스럽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그에게 말했다.
“그냥… 오늘 낮잠을 조금 잤더니 잠이 안 오기도 해서요. 혹시 많이 바쁜가요?”
아델라인의 물음에, 노먼이 대신 답했다.
“저는 그러면 가 보겠습니다. 하실 일 있다면 맡겨 두십쇼.”
“아, 응, 알겠어요.”
노먼이 눈치껏 자리를 비켜 주자, 방 안에는 아델라인과 알렉스 둘만이 남았다.
미묘한 기류가 흐르자, 알렉스는 헛기침을 하며 스토브에 물을 올리며 물었다.
“혼자 왔어요?”
“아니요, 나이아랑 같이 마차를 타고 왔어요. 나이아는 되돌려 보냈고요.”
“돌아갈 때는 어떻게 하려고.”
“그건 생각 안 하고 왔는데요? 알렉스가 설마 날 내쫓을까.”
아델라인의 뻔뻔하고 반쯤 대책 없는 모습에, 알렉스는 쓰게 미소 지으며 찻잔을 꺼내 내려놓았다. 그다음 찻주전자에 솔잎을 조금 넣자, 산뜻한 솔향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잠시 뒤, 솔잎차가 찻잔을 채우자 아델라인은 잔을 들어 입에 차를 머금었다.
눈을 감자, 솔잎차에서 많은 것들이 느껴졌다. 따듯한 찻물이 품고 있는 상쾌한 향. 그리고 그 끝에 남는 아련할 정도로 옅은 단맛. 그 미묘한 단맛까지 느끼자, 아델라인은 눈을 떠 알렉스를 바라봤다.
“차 맛있네요.”
“파는 거 가져다가 우리는 건데요, 뭐.”
그렇게 목을 축인 알렉스는 잔을 내려놓은 뒤 아델라인에게 다가왔다. 아델라인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알렉스는, 그녀의 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러면… 뭐 하고 싶은 거 있어요?”
평범하게 질문한다면 평범한 답이 나올 것 같은 질문도, 단둘이 있는 공간에서 귀에 속삭여지자 도저히 온전히 말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울리고, 9월 밤공기의 서늘함이 무색할 정도로 귀가 달아올랐다.
그 분위기에 취해, 아델라인이 알렉스의 질문에 답하려는 찰나.
똑똑.
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노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참, 중대장님. 확인해 주셔야 하는 사안이 있습니다.”
“히익!”
마치 들키면 안 되는 무언가를 하던 것처럼,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후다닥 멀어졌다. 아델라인과 마찬가지로 귀가 빨개진 알렉스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문으로 향했다.
문을 살짝만 연 그는 그 사이로 얼굴을 집어넣어 노먼과 대면했다.
“무슨 일이에요?”
그 질문에, 노먼은 자연스레 품속에서 펜을 꺼낸 뒤 알렉스에게 서류와 함께 내밀었다.
“아, 별건 아니고 이거랑 이거 확인 좀.”
“아, 이거요. 그대로 진행하면 될 것 같은데.”
이내 달아오른 귀를 간신히 식힌 알렉스가 재빠르게 서류를 읽어 내린 뒤 서명을 하자, 노먼은 서류와 펜을 건네받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중대장님. 그리고…….”
노먼이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속삭였다.
“방음 생각보다 안 좋습니다. 유념하십시오.”
알렉스의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그러자 노먼은 피식 웃은 뒤, 손수 알렉스를 밀어 넣어 주며 문을 닫았다.
자신의 집무실로 밀려난 알렉스는 아델라인을 향해 돌아봤다. 무슨 말을 하려 해도, 노먼이 한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방음 생각보다 안 좋습니다. 유념하십시오.’
결국,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우리, 밖으로 나갈까요. 밤 산책도 할 겸.”
예정에도 없던 밤 산책이었다.
* * *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야시장이 열려 있을 줄은 몰랐네요.”
“혹시나 해서 와 봤는데, 다행히도.”
아델라인은 한 손에 와플을 든 채 입을 열었다. 와플을 베어 물자, 당밀의 쌉쌀하고 달콤한 맛이 바삭한 와플과 어우러져 아델라인의 입 안에서 춤췄다.
약간 허기져 있던 아델라인에게, 야식이라는 일탈의 짜릿함은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쾌락을 주었다.
그렇게 벤치에 앉아 와플 하나를 허겁지겁 해치우고 나자…….
“이것도 마셔요.”
알렉스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핫초코를 건넸다. 그러자 아델라인은 얼굴을 살짝 붉히며, 그걸 받아 들고 홀짝홀짝 마시기 시작했다. 이것만으로도, 이 순간만큼은 행복했다.
그러나 핫초코의 온기가 밤공기에 식자, 하나둘 걱정거리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피오나는 언제쯤 잡을 수 있을까요.”
구체적인 답을 기대하지 않은 하소연에 가까운 질문.
그러나 알렉스는, 곧바로 답을 내놓았다.
“빠르면 10월, 늦으면 11월?”
알렉스의 답에, 아델라인의 눈이 부릅떠졌다. 마치 진짜냐고 묻는 듯한 아델라인의 시선에, 알렉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직 전쟁 뒷마무리를 한다는 명분으로 전시사령부가 해산되지 않아서, 그 권한으로 여러 일을 해결하려 하시는 것 같아요.”
알렉스는 식어 버린 핫초코를 단번에 들이켠 뒤, 말을 이었다.
“물론 피오나의 처분도 포함되어 있죠.”
“진짜요?”
아델라인의 상기된 얼굴에, 알렉스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피오나가 저지른 많은 것들은 그대로 매장해야 하겠지만… 경제 사범으로 체포해서 재판정에 올리는 데는 충분하겠죠. 간첩 행위랑 엮어서.”
알렉스의 말에, 아델라인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결국 모든 죄를 처벌할 수는 없는 거네요.”
“밝혀지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들도 있으니까요.”
알렉스의 말에, 아델라인은 겨우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맞았다.
마법과 약물을 이용해 사람을 조종하는 데 성공했다는 게 밝혀지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모방 범죄가 발생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그 모든 것을 덮어 버리는 것이 훨씬 안전한 방법이었다.
이성적으로 본다면, 현실적으로 타당한 답이었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서는 복잡한 감정이 남아 있었다. 만약, 만일, 혹시나 같은 단어로 시작하는 말들이 계속 아델라인의 입에서 맴돌았다.
그런 아델라인의 마음을 이해했는지, 알렉스는 아델라인의 머리를 끌어와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걱정 마세요.”
알렉스는 아델라인의 손을 잡으며, 그녀에게만 들릴 정도로 나지막이 말했다.
“잘 될 거예요.”
그 짤막한 한마디에 따라오는 미소에, 아델라인의 머릿속을 채워 나가던 걱정이 단번에 사그라드는 듯했다.
그때, 알렉스의 손이 아델라인의 손을 놓았다. 그러자 그녀의 손에 무언가가 잡히는 게 느껴졌다.
그녀의 손에 잡힌 건, 자그마한 보석함.
그 반지 함을 열자, 한 쌍의 다이아몬드 반지가 가로등 빛을 받아 반짝였다. 아델라인의 얼굴에 놀람이 가득 차자, 알렉스는 보석함을 들고 벤치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원래는 더 큰 이벤트를 하려고 생각했는데, 폭죽이니 뭐니 준비하려다간 해를 넘길 것 같아서요.”
알렉스는 멋쩍게 웃은 뒤,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아델라인을 올려다봤다.
그저 반지를 내밀면서 몇 마디 말만 하면 되는 일인데, 알렉스의 입은 좀처럼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래도 되는 걸까. 자신이 아델라인에게 청혼을 해도 되는 걸까. 아델라인은 자신의 청혼을 받아 줄까. 반지를 챙겨 나올 때까지만 해도 대충 넘겼던 고민과 걱정들이 물밀 듯이 쏟아졌다.
그러나 알렉스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아델라인의 눈을 마주했다.
보석처럼 반짝이는 하늘색 눈동자. 저 눈동자를 평생 마주할 수 있다면.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비록 월급도 줄어들 거고, 무릎은 쑤시고, 허리도 아파 오는, 가진 거라곤 낡은 몸밖에 없는 평민이지만…….”
간신히 입을 연 알렉스는 아델라인의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우며, 그녀의 하늘색 눈을 바라봤다.
“저와 평생을 함께해 주시겠습니까?”
“…….”
잠깐의 침묵 후. 아델라인의 눈에 서서히 눈물이 고이며, 그녀의 눈이 더욱 다채롭게 반짝였다. 이내 고였던 눈물은 한줄기 물길이 되어 얼굴을 적시기 시작했다.
막연히 꿈에만 그리던 말을 알렉스의 목소리로 듣게 되자, 지금 이 순간이 도저히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울컥, 치미는 감정에 아델라인은 혼자서 흐느끼며 몇 번이고 소매로 눈가를 닦아 냈다. 답을 해야 하는데, 웃으면서 답을 해야 하는데. 도저히 눈물을 그칠 수 없었다.
말을 하려 해도 문장을 채 마무리 짓기도 전에 또다시 감정이 북받쳐 올라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좋다고 말해야 하는데, 단어 하나를 만들다가도 울음이 먼저 터져 나왔다.
그렇게 한참이 지난 뒤, 간신히 울음을 멈춘 아델라인은 알렉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좋아요.”
그녀는 손가방에서 손수건을 찾아 물기 가득한 얼굴을 닦아 내고 정신을 차린 뒤, 알렉스를 향해 말했다.
“그 어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함께 하는 거예요.”
다 쉬어 버린 목소리에, 눈물을 쏟아 내느라 퉁퉁 부어 버린 눈. 다른 이가 보았을 땐 그 어느 때보다도 못생긴 아델라인이었지만, 알렉스의 눈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 역시 북받치는 감정을 애써 누르고 먹먹한 목소리로 한마디를 뱉었다.
“고마워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여러 감정이 뒤엉킨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알렉스는 아델라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아델라인의 입술에서는, 핫초코보다 더 진한 달콤함이 느껴졌다.
* * *
“친위대의 규모가 전선 투입 전까지 회복했다라…….”
필즈먼은 육군 정보국의 보고서를 보며 중얼거렸다.
단 몇 주간의 전선 투입만으로도, 황태자의 친위대는 치명적인 손실을 입었다. 그저 다른 보병 연대와 똑같은 전선에 투입되어 똑같은 임무를 수행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훈련되지 않은 병사와 교육받지 못한 간부의 조합은 전장이라는 시험대에서 낙제점을 받기 충분했다.
제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친위대의 전력 회복은 요원하기 그지없었다. 남부 귀족들의 몰락과 영지군의 해산은 친위대를 유지할 인력과 자산의 공급처를 같이 붕괴시켰다.
그 뒤로 알렉스의 재판을 통해 호더빌 공성전 직후의 진실이 드러나자, 친위대 해산 여론까지 스멀스멀 퍼지는 중이었다.
당연히 이런 상황에서 황태자의 친위대를 자원할 사람도, 지원할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친위대는 승전 직후부터 병력을 다시 모집하고, 장비를 공급받아 수도 근교에서 훈련을 하고 있었다. 그저 황궁 안에만 틀어박혀 있던 이전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결국, 잘못된 선택을 하는군.”
필즈먼은 한숨을 쉬며 정보국의 보고서를 책상 옆으로 밀어 뒀다. 그다음, 필즈먼은 탁자에 연결된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딸랑.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자그마한 종소리와 함께,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필즈먼의 명령에, 부관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와 그에게 경례했다.
“부르셨습니까?”
부관의 물음에, 필즈먼은 고개를 끄덕이며 서랍에서 봉투 하나를 꺼냈다. 미리 밀랍으로 봉인까지 된 서신의 내용조차 확인하지 않은 채, 그는 부관을 향해 봉투를 건넸다.
“이 서신을 하켄 공국의 원정군 사령부로 전달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