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엑스트라는 생각보다 대단했다-186화 (186/200)

186화 과거

식사가 끝나고, 네 사람은 차를 마시며 잡다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공작은 과묵했지만 필요한 말을 제때 했고, 필즈먼은 적당히 입을 열어 대화를 이끌어 나갔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을 즈음, 필즈먼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머지 세 사람에게 제안했다.

“자, 그러면 소화도 시킬 겸 둘씩 나눠 산책이나 하지요.”

“그렇게 하지. 대위를 빌려 가도 되겠나, 필즈먼 대장?”

그러자 필즈먼은 허허 웃으며 아델라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건 남작에게 물어야지요, 남작은 괜찮겠나?”

필즈먼의 물음에, 아델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터 계속 함께할 텐데, 하루 저녁 정도야 괜찮습니다.”

단둘이 풀어야 할 마지막 매듭이 있기에, 아델라인은 선선히 필즈먼을 바라봤다.

“그러면, 저는 대장님께 잠시 신세를 져도 되겠습니까?”

“내가 영광이라네, 남작.”

아델라인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필즈먼과 함께 식당을 나섰다. 그러자 알렉스는 아델라인의 뒷모습을 바라본 뒤, 공작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공작은 살짝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알렉스를 향해 물었다.

“우리도 나가지. 담배 피우나?”

“아, 담배는 안 피우지만…….”

알렉스는 그렇게 말하며 주머니에서 성냥갑을 꺼내 들었다. 그러자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발코니로 향했다. 발코니의 커튼을 친 그는 여송연을 꺼내 물며 알렉스에게 양해해 달라는 듯 말했다.

“요즘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 멀리는 못 나가네.”

“괜찮습니다. 여기.”

알렉스가 성냥을 그어 불을 건네자, 공작은 여송연을 가져다 불을 붙인 뒤 한 모금 담배 연기를 입에 머금었다.

담배 연기와 함께 시간을 잠깐 흘려보낸 그는, 알렉스를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자네 생모에 대해 들어본 적 있나?”

공작의 말에, 알렉스는 잠시 그를 바라봤다가 저 멀리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지금 들어봐야겠지요.”

알렉스의 말에,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궁내부에서 황제 폐하를 모시고 있던 시절이었네. 40대 후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폐하께서는 자네 생모를 품게 되셨지. 아직도, 나는 그 과정을 이해할 수 없어.”

“곤혹스러우셨나 봅니다.”

“귀족 모두를 죽일 수 없었기에, 그리고 혼란을 최대한 잠재우기 위해 폐하께서는 서른 살 가까이 차이 나는 황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지.”

“남부의 귀족들을 잠재워야 했으니까요. 그들까지 소탕하는 건 득보다 실이 컸고.”

알렉스가 빠르게 이해하며 이야기를 따라오자, 공작은 고개를 끄덕여 알렉스의 말이 맞다고 확인해 주며 말을 이어 갔다.

“그러나 후사를 보는 건 지지부진했고, 두 분의 관계는 소원해져 갔네. 그런 상황에서 자네의 탄생은…….”

차마 공작이 말하지 못하고 얼버무린 말을, 알렉스는 스스로 내뱉었다.

“축복받을 황손이 아닌, 혼란의 씨앗이었겠군요.”

그 말을 차마 부정할 수 없었던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품속에 손을 넣었다. 그의 손에 들려 나온 건 한 농장의 권리 증서였다.

“그래서, 나는 곧바로 시녀를 공작령의 한 농가에… 그래. 감금했네. 어떻게 꾸민다 한들, 그건 사실이니까.”

공작이 건넨 농장의 권리 증서를 받아 든 알렉스는 이내 그가 떠올렸던 방법을 유추할 수 있었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건 29년 전 발행된, 신대륙의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농장의 권리 증서였다.

“신대륙으로 보내려 하셨군요.”

알렉스의 말에,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천 킬로미터라는 거리는, 서로를 지킬 수 있는 안전거리라 믿었네. 한쪽이 다른 쪽을 침범하는 일 없이, 공존이 가능할 테니. 물론 자네 생모 홀로 자네를 키우기에는 쉽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공작은 착잡한 얼굴로 먼 밤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전임자들과 같은 선택을 하는 것보다는 나았을 테니까.”

궁내부는 황실을, 황제를 보필한다. 그들의 업무는 다양하지만, 개중에는 남들에게 드러내지 못하는 공공연한 비밀 임무도 있었다.

원치 않는 황실의 자손을, 세상에서 지우는 일. 대부분 그런 임무는, 단 한 자루의 칼로 해결되기 마련이었다.

가장 조용하고 확실한 방법이니까.

“…….”

“하지만, 자네 생모는 다르게 생각했더군. 그녀는 전임자의 행적을 알고 있었어. 나는 아직 내 계획을 마무리 짓지 못했고.”

미리 말하기만 했더라면. 그런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텐데… 라는 착잡한 표정이 얼굴에 가득 담겨 있었다.

“그래서. 자네가 태어난 날 밤. 자네 생모는 몸조리를 마치기도 전에 자네와 함께 무작정 밖으로 뛰쳐나왔지. 미친 짓이었지만, 그녀에게는 단 한 가지 생각이 있었어.”

그는 한숨을 푹 내쉰 뒤 말을 이었다.

“공작가의 손이 닿지 못하는 유일한 성역이, 하필이면 바로 30분 거리에 있었으니까.”

“…쫓아가셨습니까?”

“숲에 들어가기도 전에 제지당했지만. 그래서 다음 날 아침에 다시 찾아가 보니, 던컨 중령이 나를 맞더군. 얼굴에 천이 덮인 시신과 함께.”

이즐링턴. 서던 퓨질리어 연대의 둥지. 제국 유일의 공작가 마저도 함부로 범할 수 없는 성역.

온갖 함정과 들짐승들이 가득한 이즐링턴 숲은 몸조리도 마치지 못한 여인과 세상에 막 나온 아이에게는 너무나 위험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숲으로 들어갔다.

그녀에게 남은 길은 그곳뿐이었으니까.

“…….”

“우리 둘은, 서로 약속을 했네. 그는 자네를 황족으로 사는 일이 없도록 만들 것이라 했고, 나는 자네 생모의 행적을 철저하게 지우기로 했지. 그렇게 해야… 더는 무의미한 죽음이 이어지지 않을 테니.”

그렇게 공작은, 이렇게 되어 버렸다… 라고 말하듯, 양팔을 벌려 보이며 알렉스를 바라봤다.

후련하다는 감정까지 느껴지는 눈빛. 기나긴 자기 고백을 마친 그의 얼굴에서는, 무표정의 가면 아래 감춰진 개운함마저 느껴졌다.

그 얼굴을 보자, 기묘할 정도로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다. 잔잔한 감정의 파장은 일지언정, 알렉스를 흔들 정도는 아니었다.

각자의 사정, 각자의 생각, 각자의 오해. 전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얼굴 붉히며 화를 내기에는, 십수 년간 군복을 입고 전장을 누비며 비슷한 것을 너무 많이 겪어 왔다.

알렉스가 가만히 그를 응시하자, 공작은 고개를 돌려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그에게 말했다.

“그 농장 권리 증서는 가지게. 30년간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제하면 계속 넓혀 가기만 했으니, 지금은 꽤 거대한 농장이 되어 있을 거야.”

“감사합니다.”

알렉스는 고개를 숙이며 권리 증서를 받아 들었다. 없어도 무관하지만, 알렉스를 이 세상에 나오게 해 준 생모의 유산이라 생각하자 거부할 수도 없었다.

그가 농장 증서를 받아 품속에 넣는 걸 보자, 공작은 엷게 미소를 지으며 그를 향해 한 가지를 청했다.

“그나저나, 한 가지를 물어도 되겠나.”

“말씀하십시오.”

“자네 후견인과는, 어떤 인연이 이어진 건지 알 수 있겠나?”

* * *

살을 에는 추위. 분명 들판에 생명이 움트기 시작해야 하는 3월이었으나, 비르텐 회랑을 휘감으며 살을 에는듯한 바람은 도저히 달력의 숫자와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천막 안에 들어가 바람이라도 피하면 조금 나으련만, 그는 굳이 천막 밖으로 나와 이리저리 헤매며 품속에서 편지를 꺼내 들여다봤다.

[간만이네. 그동안 잘 지냈나? 이렇게 편지를 보내는 건 다름이 아니라, 내가 한 가지 부탁할 것이 있어서 그렇네.

… 이런 사유로, 내가 그 아이의 대부가 되고자 하네. 꽤나 영특한 것이 자네에게도 소개해 주고 싶어, 참관인으로 찾아와 줬으면 하네. 자네 대대도 후방으로 돌려졌잖나. 숨 돌릴 겸, 찾아와 준다면 고맙겠네.

- 자네의 신실한 전우, 리처드 C 던컨.]

편지를 한번 주욱 훑어 내리며 다시 한번 정보를 추출해 머릿속에 집어넣은 필즈먼은 주변을 둘러봤다. 군기 호위 부사관의 양자. 검은 머리에 푸른 눈. 무시해도 뭐라 할 사람은 없겠지만, 그렇다고 무시하면 마음이 편할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봐도, 단서는 쉬이 보이지 않았다.

시체가 가득한 이곳에서 열다섯짜리 애를 찾는 게 쉬우리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도저히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지 막막했…….

“…….”

서던 퓨질리어 연대의 군기. 수십 년의 찬란한 역사가 수놓아져 있는 깃발은, 깃대를 잃은 채 누군가의 어깨에 둘려 있었다.

검은 머리에, 푸른 눈동자. 그 아이는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면서도, 어깨에 두른 군기를 쥔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그때, 자신을 향한 시선을 느낀 건지 그 아이가 푸른색 눈동자로 필즈먼을 바라봤다.

“아…….”

그 아이는 급하게 군기를 접은 뒤, 한 손에 든 채 필즈먼을 향해 경례했다.

“충성!”

그 경례를 받은 필즈먼은 가볍게 손을 들어 내저었다.

“쉬어. 불 가로 가 있지 않고 왜 여기에 앉아 있나?”

“불 가로 가면… 군기가 손상될 수 있을 것 같아 그랬습니다.”

그 아이의 말에, 필즈먼은 잠시 생각을 한 뒤 문답을 이어 나갔다.

“서던 퓨질리어 연대의 연대기인가?”

“…네. 장교와 부사관 모두가 전사하거나 부상을 당해, 인계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연대가 재편성되면 반환하려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소년병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믿기 힘든 조리 있는 문장. 필즈먼은 상당한 확신을 가지고 그를 바라봤다.

“이름이, 알렉스 매닝햄인가?”

“…그걸 어떻게.”

확신을 확인받은 필즈먼은 속마음을 가다듬었다.

연대기에 불똥이 튈까, 불도 쬐지 못한 채 연대의 재편성을 기다리고 있던 이 아이에게, 자신이 해야 하는 말은 잔인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그는 생각을 정리하고는 담담한 표정으로 알렉스에게 말했다.

“서던 퓨질리어 연대는 인원수 부족으로 해산하게 되었다. 상부의 방침이다.”

그 말에, 알렉스의 동공에 초점이 사라졌다. 그러나 필즈먼은 일부러라도 그를 향해 곧바로 질문했다. 보금자리를 잃은 아이를 오래 세워 둘 생각은 없었다.

“갈 곳은 있나. 친척이라든지.”

“…….”

이어지는 침묵. 필즈먼은 그 침묵의 의미를 깨달은 뒤, 그를 향해 말했다.

“내 이름은 리안 필즈먼 중령이다. 라이플 대대의 대대장이고…….”

알렉스의 텅 빈 푸른 눈을 바라보며, 필즈먼은 거짓말을 했다.

“던컨 중령으로부터 너를 부탁받았다. 자신에게 문제가 생길 경우를 대비해서.”

그 말에, 알렉스의 눈에 어느 정도 초점이 돌아왔다. 그러자 필즈먼은 그를 향해 한 가지 제안을 건넸다.

“그래서, 내가 너의 후견인이 되어 줄까 한다.”

“…….”

“물론, 그 조건으로 너는 라이플맨이 되어야 한다. 위험하고, 무시당하기…….”

“하겠습니다.”

필즈먼의 말을 끊은 알렉스의 답. 그러자 필즈먼은 그를 바라봤다.

“남은 길이… 제게 남은 길이 없으니까요.”

알렉스의 말에, 필즈먼은 쓰게 웃었다. 보통 아이는 아니었다. 던컨이 이 아이를 소개시켜 주겠다는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스튜어트 소위!”

“예, 부르셨습니까!”

그 말에, 스튜어트가 허겁지겁 다가왔다.

“얘 밥 좀 먹이고 불 좀 쐬게 해. 옷 남는 거 있으면 주고.”

갑작스레 장교에서 보모로 보직이 바뀐 스튜어트였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알렉스를 데리고 막사로 향했다.

어쩌다 보니, 필즈먼에게 새로운 가족이 생긴 날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