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엑스트라는 생각보다 대단했다-185화 (185/200)

185화 내달리는 마차 안에서

“가장 소중하죠.”

아델라인의 질문에, 알렉스는 당연하다는 듯이 즉답했다. 그러나 아델라인은 의중을 알 수 없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알렉스를 바라봤다.

“진짜로?”

아델라인의 되물음에, 알렉스는 마른 침을 삼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자신을 바라보는 아델라인의 시선이 저렇게 싸늘해진 걸까.

알렉스가 머리를 가열하게 굴리고 있는 사이, 아델라인의 입이 열렸다.

“지금 전역하라고 하면, 전역할 수 있어요?”

예상치 못한 아델라인의 말에, 알렉스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아델라인이 원한다면, 그리고 아델라인이 물러날 생각이 없다면, 그는 기꺼이 지금까지 쌓아 온 커리어를 포기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 과정에서, 알렉스는 적지 않은 것을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기쁘나 슬프나, 알렉스는 인생의 모든 순간을 군대에서 보내 왔으니까.

그의 가족, 그의 동료, 그의 스승.

그의 명예, 그의 과거, 그의 현재.

그리고 그가 평생을 살아온 세계.

그 단단하고 두꺼운 알을 깨는 건, ‘할 수 있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 바깥에 아델라인이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평생을 안에 머물렀던 알을 직접 깨부수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아델라인도, 백수가 된 저는 싫어할 거 아니에요…….”

알렉스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변명하듯 말했다. 그러나, 곧바로 아델라인의 목소리가 그의 귀에 꽂혔다.

“제가 가장 중요한 게 아닌가 보네요?”

아델라인의 칼 같은 목소리에, 알렉스는 고개를 푹 숙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알렉스는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말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그게 아니라…….”

“저는 말이죠.”

아델라인의 목소리에, 알렉스는 고개를 들었다.

서늘했던 목소리와 달리, 아델라인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두 손을 꼭 쥐고 있었다.

“저는… 알렉스가 가장 소중해요.”

아델라인의 목소리에, 물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알렉스의 앞에는 이즐링턴의 남작도 로피츠 공작가의 후계도 아닌.

공작의 실신 이후 갑작스럽게 많은 부담을 떠안아야 했던, 그저 기약 없이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려 왔던 한 명의 사람일 뿐인 아델라인이 고개를 푹 숙이며 눈물을 참고 있었다.

“알렉스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요. 공작가 정도는, 알렉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지만, 알렉스는.”

아델라인은 굵은 눈물을 뚝, 뚝 치맛자락 위로 떨어트렸다.

자신이 하려는 질문이 얼마나 잔인한 질문인지 누구보다 더 잘 이해하고 있었기에, 아델라인은 미안함과 죄책감에 솟구치는 눈물을 참으려 노력하면서도, 터져 나오는 눈물을 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답을 들어야 했다.

알렉스가 언제 돌아올까, 돌아오지 못하는 건 아닐까 걱정하며 밤을 지새우고 싶지 않았다.

옳은 일, 누군가를 해야 하는 일을 하다 돌아오지 못한 알렉스를 그리워하는 밤보다는 당연하게도 자신의 곁에 알렉스가 누워 온기를 주고받는 밤이 더 좋았다.

이기적이지만, 이기적일 수밖에 없었다.

잠시 뒤, 아델라인은 물기 어린 목소리로 알렉스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라이플 여단을 나와, 제 곁에 있어 달라 하면… 들어주실 수 있으신가요?”

그 말에, 알렉스의 심장이 순간 덜컥 내려앉았다. 언젠가는 선택해야 할 날이 오리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날이 기어코 자신 앞에 다가와 있었다.

알렉스의 표정이 굳어 버린 걸 보며, 아델라인은 자신의 질문이 얼마나 그에게 가혹한지 또 한 번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아델라인은 그를 향해 계속 설득을 이어 나갔다.

부와 명예 따위보다도 훨씬 소중할 라이플맨으로서의 정체성. 알렉스에게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면서도, 아델라인은 기어코 자신을 라이플맨이라는 단어와 저울질을 하도록 알렉스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알렉스에게 힘들게 다가오는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렉스가… 알렉스가 하는 일은 중요한 거 알아요. 그렇지만, 꼭 알렉스가 해야 하는 일은 아니잖아요.”

아델라인의 말에, 알렉스는 고개를 푹 숙였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는 파견 중대의 중대장이지만, 크게 보면 육군이라는 거대한 기계의 부품이기도 했다.

물론 비싸고 구하기 힘들며, 빠지면 치명적인 문제를 일으킬 수 있었다.

하지만, 대체 불가능은 아니었다. 관점에 따라서는 ‘고작’ 대위 하나일 뿐이니까.

“…….”

알렉스는 차례대로 양팔 저울 위로 추를 올리기 시작했다.

라이플맨으로서, 여단 내에서 쌓아 온 자신의 입지.

수많은 전장을 함께한 전우들과 쌓은 승리의 기록.

한 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전장에서 생사를 함께한 대원들.

끝끝내 붙잡지 못한, 자신의 곁을 지나 먼저 떠난 선임들.

자신의 명령을 따르다, 웃으며 마지막 인사를 건넨 부하들.

그들을 떠나보내고서는 행복한 삶을 추구한다는 죄책감.

아직 끝내지 못한 것 같은, 그래서 모든 것을 끝내야 한다는 책임감.

그 모든 것을 올려놓자, 양팔 저울은 한쪽으로 기울었다.

그러나 그 반대편 접시 위에 아델라인이라는 추를 하나 올리자.

한 번 만에 저울은 반대편으로 기울었다. 미세하게, 아델라인의 쪽으로.

알렉스는 아델라인의 옆자리로 옮겨 갔다. 그다음, 어느새 굵은 눈물로 얼룩진 아델라인의 얼굴을 제 쪽으로 돌려 눈을 마주했다.

그녀의 눈매가, 다시 대답을 재촉하듯 날카롭게 변하려 했다. 답을 들을 때까지는 그 무엇도 허락하지 못하겠다는 듯, 그녀의 두 팔은 알렉스를 밀쳐 냈다.

그러나 알렉스는,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알렉스의 몸을 밀어내던 팔은, 이내 힘을 잃고 그를 껴안았다. 그렇게 거친 숨소리와 함께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알렉스는 아델라인의 풀린 동공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렇게 해야 아델라인과 함께할 수 있다면.”

알렉스의 입에서 나온 대답에, 아델라인은 울컥, 차오르는 감정을 견디지 못하고 알렉스의 목을 양팔로 끌어안았다.

더 이상의 답은, 그녀에게 필요치 않았다.

* * *

“그렇게 되어, 보직 변경을 신청하려 합니다.”

알렉스의 결정을 들은 필즈먼은 눈을 감고 생각을 이어 나갔다. 수도의 임시 관사에 막 도착해 여독이 남아 있었지만, 알렉스를 위해서 시간을 내지 못할 만큼 피곤한 건 아니었다.

잠시 뒤, 그는 눈을 떠 정장 차림의 알렉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정녕 라이플 여단을 떠나려는 건가?”

필즈먼의 물음에,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소중한 게 생겨 버려서. 언젠가 떠나야겠다, 생각하고는 있었습니다.”

알렉스의 말에, 필즈먼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다만 파견 중대 교대 관련한 건도 있으니 연말까지는 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연말까지, 말입니까?”

“파견 중대도 2진 꾸려서 교대해야지. 그동안은 이런저런 일 때문에 차일피일 미뤄졌지만.”

필즈먼은 그렇게 말하며 알렉스를 바라봤다.

“원래 인사 행정은 연말에 한꺼번에 하는 게 편하지 않겠나? 대신 수도에서 근무할 수 있는 보직에 넣어 주도록 하겠네.”

“어디, 말씀이십니까?”

“뭐 육군 군사 대학원을 마치게 되면 아카데미의 군사학 교수로 추천장을 넣어 줄 수도 있고. 물론 추천장을 넣는 건 내가 아니라 후임 육군본부장이겠지만.”

필즈먼은 서류를 팔락이며 말을 이어 나갔다.

“아니면 육군성에서 근무하는 것도 좋겠지. 거기서 경험을 쌓은 뒤, 참모 본부에서 일하게 된다면 육군에게도 도움이 될 거야. 수도 사단에서 근무하는 것도 좋겠지.”

알렉스에게 몇 군데 근무지를 제시한 필즈먼은, 그를 바라보며 다시 한번 물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묻겠네.”

그는 자신이 지금까지 지켜봐 온 라이플맨 장교를 바라보며 물었다.

“라이플 여단에서, 나가고 싶은가?”

그 말에, 알렉스는 고개를 숙였다.

대대장이었던 시절부터, 연대장, 여단장을 거쳐 육군본부장과 전시 사령관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자신을 뒷받침해 준 거목에게, 알렉스는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그동안 모실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하긴, 15년 업어 키웠으면 장가보낼 때 되긴 했지.”

필즈먼은 그렇게 말하며 시계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덧, 시침은 6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자 그는 정장의 옷깃을 매만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차는?”

“불러 두었습니다. 대기 중입니다.”

“그래, 그러면 가지.”

필즈먼은 그렇게 말하며 관사 밖으로 나섰다. 그의 말대로, 관사 앞에는 마차가 한 대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이 마차에 오르자, 마부는 말들을 채근해 앞으로 나아갔다.

“한 이야기가 있다.”

필즈먼은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말을 이어 나갔다.

“오랜 시간 동안 라이플을 쏜 남자가 있었어. 그리고 그는, 전쟁에 나갔지.”

그 말에, 알렉스는 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 뒤에, 그는 병기고에 라이플을 반환했다. 그 남자는 라이플과 더는 인연이 없을 거라 믿었지.”

그는 마치 지나간 세월을 회상하듯, 천천히 말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그가 그의 손으로 무엇을 하든지. 여자를 사랑하고, 집을 짓고, 아들의 기저귀를 갈아 주든지.”

필즈먼은, 알렉스와 눈을 마주치며 말을 맺었다.

“그의 손은 라이플을 기억할 것이다.”

내가, 그리고 다른 이들이 그랬으니까.

필즈먼이 미처 말하지 못한 마지막 한마디는, 슬픈 눈빛으로 알렉스에게 전해졌다.

다른 사람이 들으면 저주라고 느끼겠지만, 손에 굳은살이 배기도록 라이플을 쥐었던 알렉스에게는 필즈먼의 말이 다르게 느껴졌다.

라이플맨들이 위험을 알고도 라이플을 손에서 놓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

아무리 라이플의 기억을 묻어 버리고 흘려보내려 해도, 손에 남은 그 감각만큼은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행복하셨습니까?”

알렉스는 그렇게 말하며, 필즈먼의 약지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바라봤다. 얄팍하고 낡은 금반지로 향하는 알렉스의 시선을 보자, 필즈먼은 고개를 끄덕였다.

“후회할 정도로.”

짤막한 필즈먼의 답. 그 답과 함께, 마차는 한 식당 앞에 멈춰 섰다.

마부가 내려 내릴 준비를 하는 동안, 알렉스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에게 말했다.

“저도, 후회할 정도로 행복해 보고자 합니다.”

알렉스의 말에, 필즈먼은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도와주도록 하마, 기꺼이.”

마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앞의 건물로 들어갔다. 알렉스는 자신들에게 인사를 하는 종업원에게 다가갔다.

“안드레이 레이크로 예약되어 있는데.”

“일행분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내하겠습니다.”

종업원을 따라 2층으로 가자, 오직 두 사람만이 중앙의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알렉스와 필즈먼이 다가가자, 아델라인과 공작도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나눴다.

“간만입니다, 의장님. 그리고 남작.”

“승전 축하하네, 필즈먼 대장. 그리고 대위.”

가벼운 인사를 마치고 다시 앉자, 필즈먼이 먼저 고개를 숙이며 자신을 소개했다. 이미 공적인 자리에서는 수도 없이 만난 둘이었다. 하지만 또 다른 목적을 위한 만남에서는, 또 다른 자기소개가 필요했다.

“알렉스 매닝햄의 후견인 되는 리안 필즈먼입니다.”

“아델라인의 아비 되는 프레데릭 소뮤아 로피츠네.”

새로운 위치의 자기소개를 마치자, 이윽고 전채 요리가 놓이기 시작했다.

평범하지만은 않은, 상견례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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