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푸른색, 붉은색 그리고 진녹색
앙리 바스통 소위.
부사관으로 시작해 10년째 근면 성실하게 일한 끝에, 그는 30대가 되어서야 소위 계급을 달 수 있었다. 비록 모국을 떠나 국경 너머 도이치 땅에서 몇 년간 복무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오른 월급도 좋지만, 장교라는 사회적 지위를 얻게 된다면 가족들도 더 나은 미래를 바라볼 수 있을 거라 믿었기에, 바스통 소위는 일가족을 이끌고 낯선 외국으로 떠나왔다.
그렇게 새로운 근무지로 정해진 곳은 호더빌 주둔 여단. 비록 외국에 있다는 게 걱정이었지만, 위풍당당한 요새의 모습을 보면 그 걱정은 곧잘 사그라들었다.
그랬었다. 방금까지는.
“서류 다 가지고 와!!”
“불 하나 더 피워! 장작 아껴서 뭐 하게!!”
“기름 가지고 와!!”
어제까지 하루하루 써 내려갔던 서류들이 뭉텅이째로 난로에 처박혀 사그라든다. 멀리서는 총포성이 다가온다. 제국군의 고함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그때,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소위! 바스통 소위!!”
“네, 네!”
“종군 가족들을 야전 병원으로 데려가! 가서 부상병들 무장 해제시키고, 투항할 준비 해! 무기 같은 건 싹 다 끌어모아서 구석에 처박아 둬!”
“투항이요?!”
“여단장님 명령이야! 30분 내로 항복한다!”
직속 상관의 명령에, 바스통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몸을 움직였다. 종군 가족 중에는 자신의 가족도 있었다. 그는 곧장 관사들이 있는 구획으로 가, 사람들을 움직였다.
혼란이 이어졌다. 고함 소리가 이어지고, 백 명 가까이 되는 종군 가족들이 짐 보따리를 든 채 야전 병원으로 향했다.
“여보!”
“진정해, 애들 앞이잖아. 여단장님께서 항복 명령을 내리셨어. 별일 없을 거야. 숨기고 있는 무기 없지?”
바스통은 애써 자신의 아내를 다독이며, 그녀의 옆에 바싹 붙은 자신의 두 딸아이를 바라봤다. 아직 대여섯 살밖에 안 된 아이들이지만, 두 아이는 눈물 한 번 흘리지 않고 의연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아내가 품에 끌어안고 있던 보자기를 들췄다. 그러자 그 안에서는 평소 채소나 고기를 썰던 칼이 있었다. 바스통은 급하게 그 보자기를 뺏어 저 멀리 내던졌다.
“버려, 날붙이 가지고 있다가 오해라도 사면 큰일 나!”
“하지만…….”
“더 가지고 있는 거 있어?”
다급한 물음에, 아내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그는 안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뒤, 한쪽 무릎을 꿇어 아이들과 눈을 맞췄다.
“장, 마리. 엄마 곁에 꼭 붙어 있어야 한다? 약속할 수 있지?”
그러자 두 아이는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의 확인을 받은 바스통은 세 사람을 야전 병원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사이, 바스통의 부하들은 부상병들에게서 무기를 모아 야전 병원 바깥으로 내던졌다.
부상병들의 저항이 있었지만, 이래야 모두가 살 수 있었다.
그 뒤 10여 분 정도가 흘렀을까. 상관의 말대로 주둔 여단 본부의 깃대에는 백기가 올랐다. 그것을 본 부상병들과 종군 가족 몇 명이 울음을 터뜨렸지만, 바스통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전쟁은. 적어도 그의 전쟁은 오늘로써 끝났다. 성벽을 넘어 날아드는 공성포의 포탄에 맞아 죽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당직을 나섰다가 라이플의 납탄에 목이 꿰뚫릴 걱정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르자, 붉은 제복을 입은 수십 명의 제국군이 야전 병원으로 다가왔다. 그 중, 중위 계급장을 단 이가 앞으로 나와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 책임자 나오시오!”
서투른 프랑크어. 하지만 그 뜻은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바스통은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나 군의관은 부상병들을 돌보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결국, 바스통은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오며 제국어로 말했다.
“우리는 항복하겠습니다. 내가 책임자입니다. 나는 앙리 바스통 소위입니다.”
손을 잘게 떨면서도 모자를 벗으며 인사를 한 바스통은, 자신의 허리춤에 패용한 검을 풀어 중위에게 건넸다. 그러자 중위는 검을 받아 들어 반쯤 뽑아 보고는, 바스통에게 돌려줬다.
그다음, 그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뒤에 있는 소위를 향해 무어라 말을 했다. 마치 무언가를 묻는 듯한 기색이었기에, 바스통의 머릿속에서는 의문이 일었다. 그러나 채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찾기도 전에, 소위의 말을 들은 중위는 고개를 끄덕인 뒤 병사들을 향해 손짓했다.
그 지시에 절반의 제국군 병사들은 소위의 지시를 받으며 야전 병원의 종군 가족들을 병원 밖으로 이끌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부상병들로 가득 들어찬 야전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바스통은 급하게 중위를 향해 물었다.
“지금, 무슨 상황입니까. 왜 종군 가족을.”
“아, 별일 아닙니다. 제국군 부상자를 수용하려면, 병원을 비워야 하니까요. 참, 병원 내의 부상자들이 무기를 가지고 있습니까?”
“없습니다, 부상병들도 종군 가족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약간 아쉽지만 다행이군요, 일이 번거로워질 일은 없겠네.”
중위의 대답에, 바스통의 직감이 무언가 잘못되었다 외쳤다. 문제가 생겼다.
바로 그때, 야전 병원 안에서 총성이 들려왔다.
모든 무기를 거둬, 밖으로 내던진 야전 병원 안에서.
연이은 총성을 들은 바스통이 몸을 돌려 야전 병원으로 향하려 하자, 그의 뒤통수에 차가운 금속이 느껴졌다.
“내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병원을 비워야겠다고. 그래도 너무 원망하지는 마십시오.”
중위는 그렇게 말하며, 부싯돌 망치를 당겼다. 피해야 한다는 걸 모를 리 없었지만, 이미 몸은 굳어 버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황자 저하의 명령이니까.”
그 말과 함께, 총성이 바스통의 귀에 들렸다. 눈이 질끈 감기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러나, 잠시 뒤에도 바스통은 살아 있었다. 그의 뒤통수에 있던 서늘한 감각이 사라졌다.
대신, 그의 귀에 중위의 비명이 들렸다.
“끄아아악―!!”
뒤를 돌아보자 자신에게 총을 겨눴던 중위는 다리에 총상을 입은 채 쓰러져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를 향해, 총구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라이플을 든 라이플맨 장교가 부하들과 함께 다가왔다.
“2소대! 야전 병원에 있는 17연대 새끼들 다 끌어내!”
검은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그는 제국어로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러자 라이플맨들은 곧바로 안으로 들어가, 제국군 병사들을 끌고 나오기 시작했다.
갑자기 바뀐 상황에, 바스통은 멍하니 그들의 모습을 바라봤다. 방금까지 부상병들을 일방적으로 죽이던 병사들은, 개머리판에 얻어맞고 총검에 떠밀리며 소 떼처럼 밀려 나왔다.
마치 적군이라도 대하는 것처럼, 라이플맨들은 병사들의 머스킷을 빼앗고 바닥에 엎드리게 했다.
그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바스통. 그러나 장교는 바스통에게 그 장면을 감상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바스통의 어깨를 잡아 흔들어 정신을 깨운 그는, 프랑크 어로 관등 성명을 물었다.
“소위! 정신 차려! 관등 성명!!”
관등 성명이라는 말에, 바스통은 반사적으로 반응해 답했다.
“소위 앙리 바스통!”
“제국군 더 있었어? 어디로 갔어!”
그러자, 바스통의 머릿속에서 자신의 가족이 떠올랐다. 그는 곧바로 몸을 돌려, 그들이 향한 방향으로 달렸다.
아내와 두 자식 생각에 정신없이 달리자, 그가 본 건…….
“여보!!”
벽에 몰려 있는 종군 가족들,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며 사격 대형을 펼친 붉은 제복의 제국군.
그리고, 자신을 지나쳐 앞으로 달려 나가는 진녹색 제복의 라이플맨 둘.
두 라이플맨 중 한 명인 장교는, 피스톨을 뽑아 들어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자 검을 뽑아 든 채 발포 명령을 내리려던 붉은 제복 소위의 다리에 총탄이 맞으며, 피가 튀겼다.
그다음, 라이플맨 장교는 소위의 어깨를 잡아 일으켜 방패 삼은 뒤 부사관과 함께 민간인들을 등지고 협박을 시작했다.
“총구 내려! 총구 들면 모가지를 따 버릴 거다!!”
장교가 소위의 목에 날을 들이밀자, 병사들은 장교를 향해 총구를 겨눴다. 그러나 장교는 소위의 목에 칼날을 더욱 바싹 들이미는 것으로 답했다.
“물러나! 뒤로!!”
두 번째 명령이 이어지자, 병사들은 총구를 겨눈 채 뒤로 조금씩 물러났다. 그 옆을 지키던 부사관은 자리를 지키며 제국군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또 다른 제국군이 도착할 때까지, 두 명의 라이플맨은 인질극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진녹색과 붉은색이 섞인 또 다른 제국군 무리가 도착했을 때.
이미 소위의 동공은 풀려 있었다.
* * *
“이것이, 제가 그 당시 보았던 전부입니다.”
증언이 끝났다.
판사도, 참관인들도, 심지어 그 증인을 불렀던 검사마저도. 할 말을 잊은 채 바스통을 바라봤다. 그러나 알렉스는, 그저 증인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증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알렉스가 고개를 숙이자, 바스통도 고개를 꾸벅이는 것으로 답했다. 그러자 알렉스는 고개를 돌려, 판사를 바라봤다.
“이것으로, 질문을 마치겠습니다.”
알렉스의 말에, 판사는 간신히 정신을 차린 뒤 검사를 바라봤다.
비장의 한 수라 생각했던 검사 측 증인이, 검사를 향한 비수가 된 상황. 그러자 검사는 정신을 놓은 채 의자에 앉아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래서야 재판이 제대로 흘러가지도 않을 터.
이미 결론은 난 것 같지만, 절차는 절차이고 아직 절차는 한참 남아 있었다. 그 절차를 검사 없이 이끌어 갈 수도 없는 상황.
판사는 법봉을 잡고 모두를 향해 외쳤다.
“10분간 휴정하겠습니다.”
땅, 땅, 땅.
모두의 정신을 깨우듯, 법봉의 묵직한 소리가 재판장 안을 가득 채웠다. 그러자 알렉스는 피고인석으로 돌아가,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때, 앙리 바스통을 향해 다가가는 한 사람이 보였다. 정장을 입은 은발의 신사는, 바스통을 재판장 밖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그 신사는, 알렉스를 향해 엷은 미소를 띤 채 가볍게 모자챙을 들어 올리는 시늉을 했다.
빚은 갚았다는, 개운한 감정이 녹안을 통해 전해졌다.
그 모습을 남기고 재판정을 떠나는 베르티에의 뒷모습을 보며, 알렉스는 중얼거렸다.
“끝났구만…….”
지긋지긋한 과거의 망령이 뻗은 손에서,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느낌이었다.
* * *
늦은 저녁.
저택으로 돌아온 아델라인은 나이아를 방으로 돌려보낸 뒤 자신의 서재로 향했다. 잠들기 전, 미뤄 뒀던 오늘의 신문을 읽을 생각이었다.
자신의 책상으로 배달된 신문에는, 분명 알렉스의 재판에 관한 이야기도 실려 있을 것이다.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알렉스를 믿긴 했지만, 그래도 신문으로 손을 뻗기에는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아델라인은 서재의 문 앞에 섰다. 오늘따라 뻑뻑한 문고리를 돌린 뒤 문을 밀자, 비어 있을 서재 안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들어오거라.”
공작의 목소리가, 아델라인의 귀를 사로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