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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엑스트라는 생각보다 대단했다-180화 (180/200)

180화 그 어떤 불합리함이 앞에 있을지라도

팔락, 팔락, 팔락.

알렉스는 자신 앞에 놓인 서류들을 읽어 내렸다. 육군본부에서 보낸 명령서, 해군 남해 함대의 현장 감식 보고서, 세인트 조지 병원의 부검 결과 보고서, HMS 헬리온의 선의가 해 준 진술 등등.

남해군도 작전에서 무죄를 입증할 증거는 충분했다. 충분하다 못해 차고 넘쳤다.

그러나 문제는 5년 전 호더빌에서의 사건.

호더빌은 지금 포위 상태에 처해 있었고, 현장의 흔적은 사라진 지 오래였으며, 그 당시 현장에 있던 증인들도 접선하기 힘든 상황.

알렉스가 정상적인 방법으로 제때 얻을 수 있는 증거는 오직 간접 증거들밖에 없었다.

제2 황자가 저지른 전쟁 범죄를 입증할 증거와 그를 증언해 줄 증인은 알렉스의 손에 들어와 있지 않았다.

역시 무리였던 걸까, 전쟁 중에 그런 부탁을 한다는 것은.

알렉스는 한숨을 쉬며, 신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유당과 남부당의 충돌과 그 여파로 수놓아진 신문이었지만, 그 틈바구니에는 아델라인의 소식도 담겨 있었다.

증권 거래소에 나타나, 하락세로 틀어지려던 주식 시장의 동향을 상승세로 뒤틀어 버린 인물. 그녀를 향한 시선이 호의적이든 적대적이든, 그녀를 언급한 기사에서는 하나같이 아델라인의 영향력만큼은 인정하고 있었다.

“…잘하고 있구나.”

아델라인이 나섰다는 말은, 이 일이 피오나와 관련이 있다는 걸 짐작게 했다. 수도 남부 대화재 사건 때도 증권가에 손을 뻗쳤던 피오나이니,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아델라인도 그렇게 생각을 하고 이 일에 뛰어든 것일 테고.

알렉스는 미소를 지으며 아델라인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오늘은 금요일에 퍼진 유언비어로 인한 여파를 수습하기 위해 회의를 하고 있을 것이다.

비록 공작가의 힘으로는 시간을 버는 데 그치겠지만… 그런데도 아델라인이라면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지혜로웠고, 그만큼 담대했으니까.

생각을 이어 가던 찰나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매닝햄 대위, 면회입니다.”

“면회… 이 아침에?”

“만나시겠습니까?”

간수의 물음에, 알렉스는 시계를 바라봤다. 법원에 출석하기 위해 이곳을 떠나야 하는 시간까지 약 30분밖에 남지 않았다.

오래 만나지는 못할 것이고, 이 형무소 자체가 대화를 나누기에는 좋지 못한 곳이었다. 그런데도 자신을 보러 올 사람이 있을까.

그 순간, 알렉스의 머릿속에 단 한 사람이 떠올랐다.

설마.

아닐 거로 생각하면서도, 알렉스는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나며 기대감에 살짝 젖은 목소리로 답했다.

“…가지.”

알렉스는 의자에 걸어 두었던 제복 외투와 서류 가방을 챙기며 답했다. 그러자 간수는 곧바로 문을 열어 준 뒤 그를 안내했다. 흔히들 하는 포승줄이나 수갑은 필요치 않았다.

뚜걱, 뚜걱, 뚜걱.

묵직한 군홧발 소리가 고요한 복도를 채웠다. 그렇게 조금 걸어가자, 간수는 면회실의 문을 열어 주었다.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고맙네.”

짤막하게 감사를 표한 알렉스는 면회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안드레이.”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왜 여깄어, 공작가 바쁘다면서. 한 명이라도 더 손을 보태야 하는 거 아니야?”

“전할 것도 있고요. 증인으로 안 부르셨기에 직접 찾아왔습니다.”

그의 말에, 알렉스는 깊은 한숨을 내뱉은 뒤,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증인 필요 없어서 안 불렀겠냐. 네가 증인을 서면…….”

안드레이는 공작가의 집사였다. 만약 그가 자신을 위해 증언을 한다면, 지금껏 제국 의회에서 중립을 지켜 왔던 로피츠 공작의 입지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증언하는 것이 ‘로피츠 공작가의 집사 안드레이 레이크’라 아니라 ‘라이플 여단 안드레이 레이크 하사’라고 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로피츠 공작가와 리안 필즈먼의 관계를 끊임없이 상상하고 떠들어 댈 것이다.

그런 상황은 결코 아델라인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터. 혹시나 안드레이가 생각하지 못하고 있을까, 알렉스는 그가 돌아가도록 설득하려 했다.

“압니다.”

그러나 안드레이는 그의 말을 단호하게 끊어 버렸다.

“제 행동이 공작가에 안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전 공작가의 사람이기 이전에.”

그는 알렉스를 바라보며 말을 맺었다.

“호더빌에서 같이 싸운 전우 아닙니까. 할 수 있는 건 해야지요.”

“이 미친놈아…….”

“누구 부하였는데요, 제가.”

안드레이의 말에, 알렉스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자 안드레이는 알렉스에게 편지를 건넸다.

“여기, 공녀님께서 맡긴 편지입니다. 가면서 읽으시죠.”

그 말에, 알렉스는 시계를 바라봤다. 슬슬 움직여야 할 시간이었다.

“그래, 가자.”

알렉스가 그렇게 말한 뒤 면회실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간수를 부르자, 그는 두 사람을 안내해 밖으로 데려갔다. 그러자 일전에 탔던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이 마차에 올라타자, 마부는 빠르게 마차를 몰아 교도소를 벗어났다. 그러자 알렉스는 편지 봉투를 뜯어 안의 편지를 꺼냈다.

[지금 가장 보고 싶은 알렉스에게.]

깔끔한 편지지 위에는 정말 오랜만에 보는, 아델라인의 글씨체가 수놓아져 있었다.

* * *

[지금 가장 보고 싶은 알렉스에게.

근황은 전해 들었어요. 다치지는 않았나요? 힘들고 아픈 거 참지 말라고 옆에서 잔소리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지금 이 상황이 슬프네요. 2주 만에 온다더니, 벌써 한 달이 지나가고 있잖아요.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어쩌다 보니 증권 시장에 개입하게 되어서, 지금은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중이에요. 많이 서투르지만, 마일즈 스틸웰 사장을 비롯한 다른 조력자분들이 함께해 주셔서 간신히 자리를 지키고 있어요.

그러니까 저는 걱정하지 마시고, 알렉스는 알렉스의 일에 집중하세요. 호더빌에서 무슨 일을 했든, 저는 항상 알렉스의 편이에요. 알렉스가 잘못된 일을 했을 리는 없으니까요. 그래도 혹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안드레이를 편지와 함께 보냈어요. 만약 억울하게 다시 감옥에 갇히게 된다면, 도움을 받아서 함께 탈옥하세요. 저번에 말했잖아요? 탈옥은 도와주겠다고.

그래도… 당당하게 무죄 판결을 받아서 돌아와 주세요. 황후하고 피오나에게 한 방 먹이고 오는 거예요. 저도, 제 방법으로 한 방 먹일게요.

- 당신을 2주하고도 또 2주 가까이 기다리고 있는 아델라인이.]

편지지 위를 수놓아 가던 아델라인의 펜이 멈췄다. 만년필의 뚜껑을 닫은 아델라인은 잉크를 말린 뒤, 편지를 손수 접어 봉투에 넣었다.

그다음 밀랍을 녹여 봉인까지 마친 아델라인은 안드레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부탁할게.”

아델라인은 그렇게 말하며 편지를 안드레이에게 건넸다. 그러자 안드레이는 고개를 숙이며 그녀에게 감사를 표했다.

아델라인의 허락이 없었다면, 재판정에 증인으로 서는 것은 생각도 못 했을 것이었다.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냐, 가 봐. 늦겠어.”

아델라인의 말에, 안드레이는 고개를 들고 품속에 편지를 넣으며 서재를 나섰다. 아델라인은 시계를 바라봤다.

오전 7시 반, 장이 열리기까지 한 시간 반밖에 남지 않은 상황. 곁에 있던 나이아는 아델라인에게 넌지시 말했다.

“잠깐 만나 뵙고 오는 거라면 충분히 가능했을 텐데요.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나이아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오늘은 중요한 날이니까, 미리미리 가 있어야겠지.”

아델라인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그녀는 잠시 일어선 채, 머뭇거리다가 자신 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다시 만날 수 있으니까. 알렉스는.”

그 표정이 금방이라도 무너질듯 위태로워 보여서. 여기서 더 알렉스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무너질 것만 같아서. 나이아는 입을 다물었다.

“자, 그러면 우리도 이제 움직이자.”

“알겠습니다.”

아델라인은 나이아에게 서류 가방을 건넨 뒤, 자신은 손가방을 들었다. 마지막으로 그 안에 들어 있는 데린져 권총을 눈에 담은 아델라인은, 입구를 닫으며 말했다.

“가자.”

아델라인이 그 말과 함께 앞으로 걸어 나가자, 나이아는 서재의 문을 열어 준 뒤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때, 현관 앞에서 아델라인은 베르티에와 마주쳤다. 정장 차림의 베르티에는 먼저 쓰고 있던 중절모를 벗어 들며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남작님.”

“좋은 아침이에요. 베르티에 중령.”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 베르티에는 아델라인의 눈을 응시했다.

“사랑하면 닮는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긴 한가 보군요.”

뜬금없는 베르티에의 말에, 아델라인은 의문의 시선을 그에게 보냈다. 그러나 베르티에는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알렉스 매닝햄 대위. 그 친구의 눈빛을 많이 닮았습니다. 표정도 그렇고요.”

그 말에, 아델라인은 살짝 놀란 표정으로 자신의 얼굴을 만져 봤다.

“1년 만에, 정말 많이 바뀌셨군요.”

베르티에의 말에, 아델라인은 새삼 지나온 시간을 되짚어 보았다.

계속해서 문제를 일으키던 악녀이자, 시녀들에게 돈주머니로 이용당하던 호구 아델라인. 그녀는 이제 한 나라의 운명에 영향을 줄 수 있을 만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다면. 만약 그렇다면.

“베르티에 중령.”

“네.”

“정해진 운명이 있다고, 믿는 쪽이신가요?”

아델라인의 생뚱맞은 말에, 베르티에는 잠시 아델라인을 바라봤다. 그러나 이내 그는 미소를 지으며, 그 질문에 답했다.

“운명은 정해진 게 아닙니다. 정하는 것이지요.”

그 짤막한 말에, 아델라인은 베르티에를 응시했다. 베르티에의 녹안은, 아델라인을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남작이 선택한 운명에, 승리가 함께하길 바랍니다.”

그 말과 함께, 베르티에는 아델라인의 손을 잡아 가볍게 손등 키스를 했다. 아델라인이 순간 당황한 기색을 띠자, 베르티에는 아델라인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현관 앞에 서 있던 2인승 마차에 올랐다.

“방금 건 대위에게 비밀로 해 주십시오, 그럼.”

베르티에가 탄 마차가 먼저 저택을 떠나자, 그다음으로는 아델라인의 마차가 현관 앞에 섰다.

이내 두 사람이 현관 앞에 기다리고 있는 마차에 몸을 싣자, 마부는 부드럽게 말들을 채근해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규칙적인 말발굽 소리만이 아델라인의 귀에 들려왔다. 이미 모든 계획은 짜여 있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이 계획에 힘을 모은 모두를 대신해 계획을 현실로 만들어 내는 것뿐이었다.

별일 아니라고, 어려운 일도 아니라고 계속해서 자기 암시를 계속했지만, 여전히 마음속 한군데에 남은 불안감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머릿속에서는 계속해서 질문이 이어졌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안 되면 어떡하지?’

‘무언가 놓치고 있었다면 어떡하지?’

질문들이 연이어 아델라인의 머리를 두드렸다. 그러나 이내 마차가 멈춰 서자, 아델라인의 머리를 괴롭히던 생각들도 뚝, 그쳤다.

아델라인이 마차에서 내리자, 첫째 날과 마찬가지로 마일즈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마일즈를 보며, 아델라인은 속으로 소망을 품었다.

오늘로써, 이 지긋지긋한 싸움이 끝나기를.

이 길고 길었던 싸움이 끝나기를.

그렇게 알렉스와 자신에게 얽매여 있던 원작의 주박이 끊기기를.

“준비되셨습니까?”

“물론이죠.”

마일즈의 물음에, 아델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끝내 버리죠, 이 지겨운 싸움.”

아델라인의 힘 실린 목소리에, 마일즈는 모자를 고쳐 쓰며 답했다.

“기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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