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빌리 미첼 중위의 방문
토요일 오전.
최근 부쩍 늘어난 제3 수도경비대의 업무 때문에 반강제적으로 주말 당직을 택하게 된 휘태커. 그는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어제 마무리 짓지 못한 서류를 집어 들며 스토브에 물을 올렸다.
“하아암… 뒤지겠네.”
늘어난 업무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역시 시위 통제. 물론 양측도 시위를 신고하고 조직이 갖춰지며 질서를 찾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군중을 통제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도 서부의 상점가와 번화가, 그리고 수도 북부의 부촌을 담당하던 제1 수도경비대에게, 시위 통제는 낯설기만 한 일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그들은 노동자의 파업으로 단련된 제2 수도경비대와 빈번한 고강도 사건으로 단련된 제3 수도경비대에게 지원을 요청하기 일쑤였다.
“1중대는 시위 통제 지원 나갔고… 3중대는 순찰…….”
제3 수도경비대의 여덟 개 경비 중대와 한 개 본부중대의 현황을 살피며 서류 작업을 이어 가던 중, 그의 귀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휘태커는 서류를 정리하며 건성으로 답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안부를 묻는 익숙한 목소리. 휘태커는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했다.
“…얌마! 너가 왜 여기 있냐? 클린턴 경위는?”
“아, 예. 그냥 산책 좀 하다가 들렀습니다. 증인 출석 요청도 할 겸. 경위는 1층에서 볼일 보고 있고요. 어, 저기 물 끓는 거 아닙니까?”
알렉스의 말에, 휘태커는 스토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스토브 위에 올려진 주전자 주둥이에서 수증기가 세차게 솟구치는 게 보였다.
“아차차. 아, 온 김에 커피나 한잔 마셔라.”
“홍차 없습니까?”
뻔뻔스럽게 홍차를 요구하는 알렉스의 말에, 휘태커는 퉁명스레 답하며 찬장을 뒤졌다.
“누구 때문에 지금 주말 근무까지 하는데. 얻어 마시는 놈이 요구도 많아요.”
그러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툴툴거리면서도 찬장에서 홍차와 과자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찻주전자에 잎과 물을 넣고 우리는 동안, 찻잔을 꺼낸 그는 소파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잠시 뒤, 휘태커는 찻주전자를 들고 두 찻잔에 홍차를 따른 뒤 잔을 들며 알렉스에게 물었다.
“뭐, 그래서 변호사는 구했어? 저번 공판에서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는 권리를 고지받지 못했다면서 재판 일정 미뤘잖아.”
알렉스가 태연한 표정으로 휘태커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 그거요?”
“응. 변호사. 판검사 출신이면 도움이 될 텐데. 좀 비싸긴 해도 너 돈 많이 모아 뒀을 거 아니야.”
“안 구했는데요?”
푸흡.
휘태커의 입에서 홍차가 분무기처럼 방사형으로 뿜어져 나왔다. 간신히 고개를 틀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알렉스의 얼굴이 한층 더 촉촉해질 뻔했다.
“…안 구했다고?”
“넹.”
한없이 가벼운 알렉스의 대답에, 휘태커의 이성의 끈이 툭, 끊어지고 말았다. 결국, 그는 알렉스의 어깨를 잡은 채 탈탈 흔들며 외쳤다.
“이 미친놈아!!”
“왜 그러십니까, 경감님.”
“아니, 저축한 돈 아껴 뒀다가 무덤에 같이 묻어 달라 할 거야? 대체 무슨 생각으로 며칠이나 시간을 낭비한 거야! 전관예우든 사법 거래든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봐야지!”
휘태커가 얼굴을 붉히며 알렉스에게 외쳤다. 그때, 알렉스가 그에게 태연히 물었다.
“저를 못 믿으십니까?”
그 물음에, 휘태커의 손이 멈췄다.
순간, 그 지옥 같았던 요새의 광경과 그 속에서 사방으로 내달리던 라이플맨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프랑크군 병사들에게 겨눠진 총구를 쳐내고, 허공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며 미친 듯이 소리 지르고. 총검을 돌려 아군을 겨누며, 그 등 뒤에는 무기를 쥐지 않은 민간인을 둔 채 악에 받쳐 발악하고. 기어코 달려드는 병사들에게 개머리판을 내질렀던 라이플맨들.
그들과 함께, 그들을 쪼개 가며 한 줌의 병력으로 제국군을 막아 세웠던 ‘선임 위관’의 모습을 잊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못 믿는 건 아니지만.”
휘태커는 눈을 꾹 감고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 말했다.
“경찰 조직에 있다 보니, 경비대장이랍시고 법원 좀 오가다 보니, 세상이 꼭 그렇지만은 않더라. 법의 9할은 재산이라는 말이 괜히 있겠냐.”
휘태커는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일곱 살짜리 애가 가게 주인에게 밀린 삯 치러 달라고 갔다가 얻어맞아 업혀 와도 무죄 판결해 대는 법원이, 황후 앞에서는 공정하겠냐.”
경찰이었기에, 수도 남부 빈민가를 지키는 경비대의 대장이었기에 수없이 봐 왔던 사회의 그늘. 아무리 수사를 통해 증거를 찾아내도, 법원은 그들의 말을 전혀 들어주지 않았다.
“그래도 억울하지 않으려면. 뭐라도 해 봐야 할 거 아니야, 새끼야…….”
휘태커의 양손이, 알렉스의 어깨를 붙들었다. 그의 손아귀에서, 간절함이 전해져 왔다.
“뭐, 법의 9할이 재산이라고 해도. 1할 정도는 법대로 돌아가야 세상 살맛 나지 않겠습니까?”
알렉스는 그렇게 말하며 휘태커의 손을 잡아 천천히 그의 손을 떼어 냈다.
“사법 거래니 전관예우니 그런 잡기술로 위기를 모면하면, 지금 열심히 노력하는 아델라인에게 낯이 안 서기도 하고.”
알렉스는 그렇게 말하며 소파에 앉아 차를 홀짝였다.
“그동안 파견 중대 앞으로 온 군사통신문이 있습니까?”
그러자 휘태커는 눈을 크게 뜨며 알렉스를 바라봤다. 네가 어떻게 그걸 알고 있냐는 눈빛으로 잠시 알렉스를 바라본 그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내 알렉스에게 넘겨줬다.
“목요일 오후에 온 서신이다. 파견 중대 본부소대장 빌리 미첼 중위라는 이상한 이름이 적혀 있어서 보관만 하고 있었는데.”
“그거면 됐습니다. 재판 미루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네.”
알렉스는 차를 주욱 들이킨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늦어도 내일 중으로 빌리 미첼 중위가 찾아올 겁니다. 그 편지만 그에게 전달해 주시면 됩니다.”
알렉스가 건넨 편지를 받으며, 휘태커의 목구멍 입구까지 질문들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빌리 미첼 중위는 대체 누구이며, 파견 중대가 맞기는 하냐고.
하지만, 그는 그 모든 질문을 삼키며 알렉스에게 말했다.
“…월요일 날 보자.”
“그럽시다. 호더빌의 망령도 떼어 낼 때가 되긴 했지요.”
알렉스는 그 말과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
그의 발걸음에는 일말의 죄책감이나 부끄러움 없이, 당당하고 곧기만 했다.
* * *
토요일. 어제 본가로 돌아와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고 쓰러지듯 잠든 그녀는 점심쯤이 되어서야 눈을 뜰 수 있었다. 아델라인은 눈을 뜨자마자 서재로 향했다. 서재에는 나이아가 먼저 자신의 자리에 앉아 서류를 처리하고 있었다.
어젯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건지, 나이아의 눈은 붉게 충혈돼 있었다. 분명 어제 마지막 한 시간 동안 미친 듯이 불렀던 매수 주문을 정리하고, 한 주 간 써 온 장부를 정리하느라 꼬박 밤을 새웠을 것이다.
그런 나이아에게, 아델라인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남아 있는 자본금은?”
“4할. 증거금 거래 반대 매매가 본격적으로 쏟아지기 직전에 막아 내느라 무리할 수밖에 없었어요.”
단 1시간 만에, 1시간 만에 자본금의 2할이 사라졌다. 물론 주식은 남아 있지만, 현금을 부어 주식 시장을 지탱해야 하는 아델라인과 그 동맹들은 주식 보유량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당장 중요한 건, 주식의 가격을 방어할 현금의 양이었다.
“마일즈 부수상님께 넣은 서신의 답은 왔어?”
“네, 아직 승패는 모른다고 답해 왔습니다. 다만 일주일 전 하켄 공국 경계에서 1군과 프랑크 군 사이 전초전이 발발했다는 소식입니다.”
나이아는 그렇게 말하며 마일즈의 서신을 아델라인에게 건넸다. 나이아의 말대로, 마일즈가 보낸 서신에는 그동안 내각이 전선에서 받은 정보가 상세히 적혀 있었다.
프랑크군은 호더빌 공성전에 투입된 병력을 제외한 전 군을 1군을 향해 들이받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투입된 프랑크 군의 규모는 8만. 반면에 그를 맞아 하켄 공국을 방어해야 하는 제국 육군 1군은 5만.
수적 열세였으나, 프랑크군에는 상당한 수의 징집병과 동맹국 군이 섞여 있었다. 반면에 1군은 라이플 여단을 비롯한 정예 부대들이 단축된 보급선의 혜택을 받고 있었다. 전선 중앙을 빠른 속도로 돌파하며 보급품과 체력을 소진한 프랑크 군에 비하면, 질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는 셈이었다.
마일즈가 보낸 편지는 2군과 3군이 프랑크 군에게 패퇴해 전선이 무너졌다는 극단적인 소문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낭설로 만들기 충분했지만, 그걸 사람들에게 알리는 건 다른 문제였다.
이번 주의 마지막 신문인 토요일의 신문들은 패전 소식을 기정사실로 삼은 채, 패전의 책임을 누구에게 돌릴지 고르고 있었다. 내각은 부정했지만, 점차 내각의 영향력은 축소되고 있었다.
그때, 나이아가 아델라인에게 질문했다.
“다음 주 월요일에 대위님의 재판이 열린다는데. 찾아가 보실 생각이 있으신가요?”
아델라인의 몸이 움찔, 떨렸다. 가고 싶었다. 먼발치에서나마 알렉스를 볼 수 있다면, 마음속에 맺힌 응어리도 조금이나마 풀릴 것 같았다.
“아니, 재판에 찾아갈 생각은 없어. 다음 주에도 계속 자리를 지켜야겠지.”
하지만 알렉스를 보면, 자신이 제어가 안 될 것 같았다. 어쩌면 그를 보자마자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울어 버릴지도 모를 것 같아서, 아델라인은 쓰게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내가 흔들리면 다른 사람들이 자리를 지키기 힘들 거야. 알렉스를 보면… 모르겠어. 지금은 그냥, 이대로 버틸게.”
그러자 나이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자본금의 6할이 소진된 상황. 내각 정상화에 대한 소식은 아직 단서도 들려오지 않은 상황에, 앞으로 얼마나 더 버텨야 할지도 모른다.
말 그대로 수십의 증권가와 기업가들이 ‘로피츠 공작가’라는 이름을 보고 그녀의 손을 잡았기에, 아델라인은 그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했다. 자신이 알렉스 때문에 흔들린다면, 그들은 자신에 대한 신뢰를 잃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계속 보고할까요?”
“응, 다른 파트너들 상황은 어때?”
“마일즈 상무께서 이쪽은 걱정 말라 서신을 보내셨어요. 스틸웰 공업은 고점에서 자사주를 일부 매매해 예비 자본을 마련했다고. 하지만… 스틸웰 공업과 연결된 증권사와 은행들이 이탈 조짐을 보이는 것 같아요.”
“공작가 측 인맥은?”
“굳건하기는 하지만, 언제 이탈할지는…….”
끝이 흐려진 나이아의 말에서,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는 지금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승전보가 들려오지 않는 한, 증권 시장에 낀 먹구름은 걷히지 않을 것이다. 매도 주문이 줄을 이을 것이고, 그 물량을 제대로 받아 내지 못하는 순간 폭락은 기정사실이 될 것이다.
“…차라리 그냥 알렉스 탈옥시키고 사랑의 도피라도 할까.”
아델라인의 입에서 한숨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에는, 진심이 짙게 섞여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모든 걸 내려놓고 도망치고 싶었다. 알렉스만 옆에 있어 준다면, 시골 한구석에서 농사를 짓고 살아도 행복할 것 같았다.
그러나 아델라인은 자신과 알렉스만을 생각할 만큼 이기적이지는 못했기에. 숨을 고르며 허리를 폈다. 도망칠 생각은 없었다.
“자, 그러면. 일단 밥부터 먹을까. 오늘 점심은 뭘 준비했대?”
“요리사가 오늘은 기운을 북돋워 주는 음식을 준비했대요.”
“그래, 그러면 가자.”
아델라인이 식사를 위해 서재를 나왔다. 바로 그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녀는 집사장과 눈이 마주쳤다.
“공녀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응접실에서 기다리시는 중입니다.”
“손님이요?”
아델라인의 물음에, 집사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라이플 여단 파견 중대 본부소대장, 빌리 미첼 중위라고 스스로를 소개하신 장교분입니다.”
그 말에, 아델라인은 눈을 크게 떴다.
파견 중대의 장교라니. 분명 파견 중대는 도거뱅크 해군 기지에서 억류나 다름없는 대기 중일 텐데. 그리고 본부소대장이라는 직위는, 들어본 적도 없는데.
그러나 아델라인은 그런 의문을 품으면서도, 집사장을 제치고 앞으로 걸어갔다. 느릿하던 걸음은 어느새 뛰다시피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그녀는 응접실을 향해 복도를 내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