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네슬러 스틸웰
[현재 사문회 진행 중, 진행자 지위 확보. 대위는 외견상 무사. 변동 사항 발생 시 연락]
사환에게 들려 전달된 수신인도, 발신인도 적혀 있지 않은 짤막한 편지. 아델라인은 그 편지를 손에 쥐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다.”
알렉스가 무사하다는 내용을 담은 피츠허버트의 편지를 손가방에 넣으며, 아델라인은 안도감 섞인 한마디를 중얼거렸다.
그래. 알렉스는 괜찮을 거다. 이제 자신만 정신 차리면 된다.
스스로 손바닥으로 양쪽 뺨을 소리 나게 때린 아델라인은 마차 바깥의 풍경을 바라봤다. 공장들은 끊임없이 검은 연기를 내뿜고 있었고,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소음은 마차 안을 가득 채웠다.
그 풍경을 눈에 담으며, 아델라인은 손에 든 상자를 소중히 품었다. 포사이스 교수가 전해 준 선물. 아델라인은 편지의 내용을 떠올리며 자신의 목표를 다시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대부분 기업이 점차 성장세가 둔화하거나 하락세로 돌아서고 있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스틸웰 공업의 주가는 홀로 상승세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전쟁 호황이라는 한 단어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상황.
분명 스틸웰 공업은 대비를 해 두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힘을 빌릴 수 있지 않을까.
아델라인이 탄 마차가 드디어 멈췄다. 잠시 뒤 마부가 문을 열자, 아델라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마차에서 내렸다.
눈앞에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큼지막한 5층 건물이 우뚝 서 있었다. 정문 옆의 현판에는 ‘스틸웰 공업’이라는 사명만이 간결한 글씨체로 적혀 있었다.
아델라인이 정문으로 다가가자, 정문 앞에 서 있던 직원이 아델라인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즐링턴 남작님. 마일즈 스틸웰 상무님께서 기다리십니다.”
“아니에요, 이쪽이 먼저 만남을 청했는데요. 어디로 가면 되나요?”
“안내하겠습니다. 들고 계시는 짐은 제가 들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직원이 손을 내밀자, 아델라인은 고개를 저어 가볍게 거절했다.
“아니에요, 별로 무겁지도 않은걸요.”
“그러하시다면. 이쪽으로.”
직원의 안내에 따라, 아델라인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컴퓨터만 없다뿐이지, 이리저리 움직이며 회의와 업무를 하는 직장인의 모습은 그녀가 알던 것과 똑같았다.
직장인들을 눈에 담으며 복도를 지나자, 이내 직원은 가볍게 노크를 하며 안에 있을 사람을 불렀다.
“상무님, 남작님을 모셔 왔습니다.”
“들어와.”
대답으로 들려온 낯선 목소리. 그것은 몇 번 만나 익숙해진 마일즈의 목소리가 아닌, 낮고 무게감 있는 생소한 목소리였다.
그러자 직원의 표정이 일순간 얼어붙었다. 마치 두려운 무언가를 마주한 것 같은 모습에, 아델라인도 덩달아 긴장했다.
잠시 뒤, 손이 새하얗게 질리도록 문고리를 잡은 직원이 문을 열자, 아델라인은 직원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가장 먼저 그녀를 반긴 건, 집무실 안을 가득 채운 매캐한 담배 연기였다.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가득 깔린 담배 연기. 눈이 따가워지고 숨이 턱턱 막혀 왔지만, 아델라인은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아델라인의 눈에는 이상한 장면이 펼쳐졌다.
이 방의 주인일 마일즈 스틸웰이 공손하게 두 손을 모은 채 의자 옆에 서 있었다. 그리고 원래 그의 자리였을 의자에는, 50대 후반의 남성이 앉아 입에 여송연을 문 채 아델라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여송연을 재떨이에 문질러 끈 뒤, 자리에서 일어나 아델라인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스틸웰 공업의 사장, 네슬러 스틸웰입니다.”
언젠간 그를 만나리라 생각했지만, 오늘일 거라고 예상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능숙하게 당황을 감추고 네슬러의 손을 잡았다.
“이즐링턴의 남작, 아델라인 폰 로피츠입니다. 이름 높은 기업가를 만나게 되다니, 정말 기쁘네요.”
“저도 남작님을 만나게 되어 기쁩니다. 자식하고 이야기를 나눌 겸 잠깐 들렀던 것인데, 이런 행운을 얻을 줄이야.”
네슬러는 주름진 얼굴로 미소를 띠며 손짓으로 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다. 아델라인은 그를 따라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 짧은 순간 동안, 아델라인은 네슬러의 거짓말을 간파할 수 있었다.
이 만남은 우연이 아니다. 네슬러 또한 아델라인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잠깐’ 사이에 이렇게 담배 연기가 사무실 가득 차 있을 리가 없을 테니까. 그리고 마일즈를 통해 아델라인이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을 테니…….
이 담배 연기는 일부러, 네슬러가 만들었다는 의미가 된다. 창문을 열어 달라는 사소한 부탁도, 초면인 두 사람 사이에서는 저울을 한쪽으로 기울어지게 만들기 충분했으니까.
아델라인은 태연한 표정을 간신히 지어내며 들고 있던 상자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스틸웰 부자의 시선이 잠깐 상자에 닿았다가 아델라인을 향했다.
“아, 참. 차를 내오게 시킨다는 걸 잊었군요. 홍차로 괜찮으십니까?”
“차를 가리지는 않습니다. 대신 설탕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부탁이랄 것까지야. 역시 홍차에는 설탕이지요.”
네슬러는 아델라인의 부탁에 맞장구를 치며 마일즈를 바라봤다. 그러자 마일즈는 직접 사무실에 붙어 있는 탕비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탕비실 문을 닫자, 네슬러는 아델라인에게 미소를 머금은 채로 질문했다.
“참, 담배 피우십니까?”
“아니요, 하지만 피우셔도 상관없습니다. 마일즈 부수상님이나 그린우드 부의장님께서도 즐겨 피우시니까요. 담배 연기는 익숙합니다.”
아델라인이 마일즈 부수상과 그린우드 부의장을 언급하며 답하자, 네슬러는 의미심장한 눈빛을 띠며 아델라인을 바라봤다.
“그렇군요. 하긴, 두 분과는 남부 재건위원회부터 연이 있으시니.”
그때, 마일즈가 직접 쟁반을 들고 두 사람이 앉은 테이블로 다가와 찻잔과 각설탕 그릇을 놓았다. 그녀의 잔에 붉은 홍차가 따라지자, 아델라인은 집게로 각설탕을 하나 집어 찻잔에 떨어트렸다.
그다음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 한 모금 마시며, 홍차의 향으로 코를 괴롭히던 담배 연기를 물리쳤다. 그러나 차를 마시면서도 자신을 바라보는 네슬러의 시선이 느껴졌기에, 아델라인은 다시 찻잔을 내려놓으며 그를 바라봤다.
“참, 세상살이라는 건 알다가도 모르겠군요.”
네슬러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시선을 돌렸다.
“서던 퓨질리어 연대의 해산 이후 버려진 땅으로만 여겨지던 이즐링턴이 남부의 중심지로 부활하고. 남부 귀족들의 영지군이 연이어 해산당하는가 싶더니, 의회의 절반을 차지한 자유당이 3분의 1도 차지하지 못한 남부당에게 휘둘리고.”
마치 재미있는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처럼 가벼운 어조로 이야기하던 그는, 아델라인의 눈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50을 넘긴 양반들이 머리를 맞댄 끝에, 공작 각하께서 쓰러지신 틈을 타 서른도 안 된 남작께 시간을 벌어 달라 청하는 것을 보다니.”
상황의 본질을 파악하고 있는 듯한 네슬러의 말에, 아델라인은 순간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수도의 집사들과 나이아, 그리고 마일즈 의원 측 사람들.
그러나 아델라인은 태연함을 가장하며 맞장구를 쳤다.
“느끼신 게 비슷하다니, 어쩐지 반가움마저 드는군요. 자, 그러면…….”
아델라인은 잠시 말을 흐린 뒤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동요하는 마음을 찻물로 간신히 가라앉히며, 그녀는 네슬러를 향해 본론을 꺼냈다.
“본론으로 들어가지요. 저는 스틸웰 공업의 여유 자본을 원합니다. 주식 시장의 대폭락을 막고, 그 뒤에 연쇄적으로 들이칠 대공황을 막기 위해서.”
아델라인의 말에, 네슬러는 차를 마시며 그녀를 바라봤다. 잠시 뒤, 그는 아델라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포사이스 교수의 퍼커션 캡 특허는 3년 뒤 소멸됩니다.”
그는 잔을 손에 든 채 가볍게 잔을 돌리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 뒤에는, 개런티를 지불할 필요 없이 퍼커션 캡 총기를 생산하고 판매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공작가에서 얼마나 교수에게 지원했던 간에 말이지요.”
마치 제안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며 자랑하는 듯한 모습. 하지만 아델라인은 그 모습에서, 한 가지를 읽어 낼 수 있었다.
“그러니, 그 상자 대신 다른 제안을 주시지요. 그 상자는, 제게 더 이상 쓸모가 없습니다.”
네슬러는 아델라인이 가지고 온 상자를 원한다. 정확히 말하면, 그 상자 안에 있을 결과물을 원한다.
“제안이라… 원하시는 게 있으신가 보군요.”
“이즐링턴의 남작이라면 힘들지만, 로피츠 공작가의 가주라면 가능하신 제안이니까요.”
“공작령 내의 사업권을 원하시는 것인가요?”
아델라인의 물음에, 네슬러는 고개를 끄덕이며 품속에 손을 넣었다.
“이즐링턴은 요충지에 있지만, 공작령과 연계한다면 더 큰 시너지를 일으킬 수 있겠지요. 제안을 수락하신다면, 스틸웰 공업은 가능한 선에서 공작가와 행동을 함께하겠습니다. 그 성의 표시로서… 이만큼을 당장 투자하지요.”
아델라인 앞에 내밀어진 수표. 로피츠 공작가의 규모에 비하면 큰돈도 아니었지만, 지금 당장 현금이 필요한 아델라인에게는 달콤한 유혹으로 다가올 만한, 절묘한 금액이었다.
아델라인은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눈을 감았다. 차를 목구멍 너머로 삼키며, 생각을 이어 나갔다.
잠시 뒤, 아델라인은 찻잔을 입에서 뗀 뒤 네슬러를 향해 말했다.
“상자를 열어 보시겠습니까?”
아델라인의 느닷없는 제안에, 네슬러는 당황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나 아델라인이 다시 한번 상자를 네슬러를 향해 밀어 보이자, 그는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 있는 것은 벨벳 안감. 그리고…….
낡은 금반지.
아델라인이 직접, 벨벳 안감에 싸서 상자째로 소중히 들고 올 금반지라면, 떠오르는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로피츠 공작가의 가주만이 가질 수 있는, 로피츠 공작가의 인장 반지.
네슬러의 눈빛에, 처음으로 당황한 기색이 드러났다. 진짜인지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네슬러의 손은 상자 안의 반지로 향했다.
그때, 아델라인의 손이 상자를 덮었다. 그러자 네슬러의 당황한 시선은 아델라인에게로 향했다.
“‘그 상자는, 제게 더 이상 쓸모가 없습니다.’라…….”
아델라인은 손가방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다음, 그 안에서 차갑고 묵직한 물체를 꺼내 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상자 위에 올려진 것은 투박한 모양새의, 만듦새도 매끄럽지 못한 권총 비슷한 무언가.
누군가에게 ‘리볼버’를 실물 없이 설명만으로 그리게 시킨다면 나올 법한 모양새의 물건이 나타나자, 네슬러의 안면에 일순간 당황한 표정이 떠올랐다.
바로 그때, 아델라인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물었다.
“포사이스 교수가 만든, 이 물건은 사장님께 얼마나 쓸모가 있을까요?”
“…….”
“아, 그 전에. 혹시 창문 먼저 열어 주실 수 있을까요? 담배 연기는 익숙하지만, 좋아하지는 않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