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로피츠 공작가의 지지
“…저는 공작께서 인정하신 유일한 후계자이자, 직무 불능 상태일 경우 공작 각하의 모든 권한을 대신 행사할 자격을 허락받은 사람, 이라고 한다면 받아들이기 힘드실 테지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저는 따를 것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납득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자, 아델라인은 집사장의 완고함에서 가문에 대한 신뢰를 느낄 수 있었다. 저 완고함이라면, 가문을 위한 일이라면 최선을 다할 테지.
그 신뢰를 느낀 아델라인은, 집사장을 향해 설명을 이어 나갔다.
“시장의 폭락으로 은행이 망하기 시작하면, 사람들이 예금을 인출해 현금을 확보하려 들겠죠. 그러면 은행은 금리를 급격히 높여 현금 유출을 막으려 들 거고, 높아진 금리는 기업과 가계의 연쇄 붕괴를 일으킬 겁니다.”
“…….”
“사람들을 고용해야 할 기업이 무너졌으니, 사람들은 소비 여력을 상실할 거고, 소비를 줄이면 일자리가 줄어들 겁니다. 이런 악순환이 일어난다면, 공작가라고 멀쩡할까요?”
아델라인의 말에, 집사들 중 몇몇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설득된 모습을 보였다.
“영지에서 나오는 곡식 덕분에 굶어 죽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잉여 곡식은 창고에 박혀 썩어 갈 겁니다. 대응 방안을 강구하는 몇 년 동안. 사 줄 사람이 없으니까.”
경제 대공황. 검은 목요일. 빙의 전 지구에서 일어났던 실제 사건. 경제학 전공이 아닌 아델라인도, 그 사건은 몇 번이고 접할 수 있었다. 그만큼 그 사건이 역사에 끼친 영향은 컸다.
물론 그 상황 속에서도 돈을 버는 이들은 있을 것이다. 공매도를 이어 나가며, 자본가들은 손쉽게 돈을 불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평범한 이들은, 하루하루 절망 속에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단순한 이타심이 아니에요. 그저… 옆집에 불이 붙었을 때, 우리 집에 불이 옮겨붙기 전에 불을 끄자는 거죠.”
아델라인의 말에, 대다수 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집사장만은 변함없는 눈으로 아델라인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걸로 설득이 되지 않았다면, 저는 더 이상 집사장을 설득할 방법이 없겠네요. 이걸로 충분한가요?”
그러자 집사장은 잠시 고민한 뒤, 고개를 숙이며 그녀에게 말했다.
“따르겠습니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목소리에, 아델라인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리고 집사들을 향해 지시를 내렸다.
“일단 지금은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주길 바라요. 공작가는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그럼, 집사장만 남고 다들 본인 자리로 돌아가 주시겠어요? 나이아도.”
아델라인의 말에, 집사장을 제외한 모두가 아델라인의 집무실에서 나갔다. 둘만이 남은 서재. 아델라인은 집사장을 바라보며, 그에게 말했다.
“사실, 저도 이 일을 맡고 싶은 생각은 없었어요. 하지만… 그래야 할 개인적인 이유가 있었어요.”
“매닝햄 대위, 말씀이십니까?”
핵심을 찌른 집사장의 물음에, 아델라인은 놀란 눈으로 집사장을 바라봤다가 쓰게 미소를 지었다.
“처음부터 알고 계셨군요.”
“공작님을 보필하다 보면, 원치 않아도 절로 귀가 밝아지더군요.”
“…….”
“무례하게 나서서 죄송합니다. 다만 젊은 집사들의 불신을 삭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아니에요. 덕분에 더욱 그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으니까.”
아델라인은 잠시 그를 바라본 뒤, 고개를 숙이며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고맙습니다. 집사장님. 이 억지에 함께해 주셔서.”
그러자 집사장은 허허 웃으며 이마를 들춰 보였다. 그 이마에는, 주름으로도 가려지지 않은 길쭉한 흉터가 남아 있었다. 아델라인은 처음 보는 흉터에 놀라, 눈을 부릅떴다.
“기억 못 하시겠지만, 몇 년 전 공녀님께선 이 흉터를 제게 주셨었습니다. 황후마마께서 걸치신 베른하르트 제 장신구를 가지고 싶으시다면서 투정을 부리다가요.”
그러자 아델라인은 입을 벌리며 얼굴을 붉혔다. 그 모습에, 집사장은 다시 앞머리를 내리며 그녀에게 말했다.
“그동안 부려 오신 억지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애교나 다름없지요. 개인적인 이유라 하셨지만, 매닝햄 대위도 사문회에 끌려가 고초를 겪으시기에는 너무 좋으신 분이라는 것 또한 압니다.”
“그러면…….”
“놓치기에는 아까운 배필 아니십니까. 가문을 위해서라면, 최선을 다해 지켜야겠지요.”
집사장의 말에 아델라인은 더욱 붉어진 얼굴을 양손으로 가렸다.
아델라인에게 지우지 못할 상처를 입은 집사장이 자신을 위해 조언을 해 주고 대신 집사들을 설득할 수 있는 기회를 줬다는 게 너무 고맙고 부끄러워 눈물마저 나오려 했다.
“세 시간 내로 가문의 모든 자산과 인맥을 정리해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럼.”
그런 아델라인의 모습을 눈에 담은 집사장은 미소와 함께 말을 한 뒤 뒤돌아 서재를 나섰다.
집사장까지 나가고 홀로 남게 되자, 벅찬 마음에 아델라인의 눈에서는 눈물이 차올랐다.
알렉스가 없어도, 알렉스와 함께 쌓아 온 1년은 그녀에게 힘이 되어 주고 있었다.
아델라인은 더는 악녀가 아니었다. 가문의 모든 이들에게 인정을 받는, 공작가의 후계자였다.
한동안 눈물을 흘리던 그녀는 간신히 소매로 눈물을 닦아 낸 뒤, 눈을 부릅뜨며 자리에 앉았다. 울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공작이 쓰러진 이후, 빈틈을 노려 보겠다는 건지 아델라인 앞으로는 수많은 편지가 쏟아져 들어왔다. 공작의 안위를 걱정하고, ‘혼자가 된’ 아델라인을 걱정하는 척 자신의 실리를 챙기기 위한 편지들이.
그 무의미한 편지들을 걸러 내던 중, 한 편지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퍼커션 캡 시제품 총기 테스트 결과]
* * *
“사문회 시작 전까지 이곳에서 대기하십시오. 그때까지는 여기서 나가실 수 없습니다. 필요하신 게 있다면 문 앞에서 대기 중인 당번병에게 요청하십시오.”
“그려, 그려. 어서 가. 옷 좀 갈아입자.”
반쯤 자포자기한 알렉스가 가방을 내려놓으며 중얼거리자, 알렉스와 수도까지 동행한 해군 장교는 나간 뒤 문을 걸어 잠갔다.
그러자 알렉스는 며칠 동안 입었던 재킷을 벗으며 방 안을 둘러봤다. 해군 영관 장교의 관사로 쓰이던 방인 듯 내부는 널찍하고 그럴듯했다. 침대도 있었고, 소파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다. 책, 신문, 잡지 등등. 방 안에는 활자로 인쇄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신문 한 부라도 있을 법하다만, 그것조차 없었다. 마치 누군가가 고의로 정보를 차단하기라도 한 것처럼.
바깥소식이라도 알 수 있으면 좋으련만, 사문회로 자신을 불러낸 상대가 결코 알렉스가 원하는 것을 해 줄 리는 없었다. 결국 알렉스는 샤워한 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중대원들은 괜찮을까. 무사할까.
구해 낸 아이들은 괜찮을까. 무사할까.
헬리온의 승조원들은 괜찮을까. 무사할까.
아델라인은.
아델라인은 괜찮을까.
분명 2주일 뒤에는 돌아간다고 말했는데, 어쩌다 보니 또 거짓말을 해 버린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그 생각을 하자, 그의 머릿속에서는 아델라인이 모습이 선명히 그려졌다.
아델라인이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선물한 입맞춤의 감각이 그리웠다. 이마에 느껴진 보드랍고 따듯한 감각. 그 감각이, 한없이 그리워졌다.
“…아델라인.”
그 맑은 하늘색의 눈, 고운 금빛 머리카락, 새하얀 살결, 맑은 목소리. 그중 하나라도 곁에 있다면 이 기다림마저 기꺼이 버틸 수 있을 텐데.
그 생각을 하던 알렉스는 고개를 저어 털어 냈다. 아델라인은 분명 괜찮을 것이다. 그녀는 현명한 사람이고, 주변에도 믿을 만한 사람이 있다.
알렉스 자신만 챙기면 된다. 당장 자신의 앞에 놓인 상황을 해결해야, 아델라인에게도 피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늦으려나.”
이런 식으로 나올 거로 생각했지만, 생각했던 시점보다 빨랐다. 설마 전쟁 중에 이렇게 자신을 추궁하려 들 줄은 몰랐다.
이렇게 되면 베르티에에게 부탁한 패는 쓸 수 있을 가능성이 작아졌다. 일이 더욱 복잡해졌으며, 상황이 불리해졌다.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 수 있을까. 침대에 누운 채 골머리를 앓으며 알렉스는 생각을 이어 나갔다.
그렇게 한동안 시간을 흘려보낸 알렉스는 침대에서 벗어나 가방을 열고 짐을 풀어놓았다. 뭐라도 해야 했다. 뭐라도 해야, 무기력함이 가실 것 같았다.
회중시계, 3일 치 식량, 성냥, 여벌 옷, 일지 겸 메모장, 모포, 숫돌, 여분 부싯돌에 반합과 반짇고리. 비록 라이플과 피스톨, 그리고 그 탄약은 수거해 갔지만, 라이플 총검과 세이버는 아직 자신의 손에 남아 있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잘 떠오르지 않았지만, 알렉스는 의식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이 갑갑한 상황에 가라앉고 말 것 같았다.
빨래하고, 옷가지를 개고, 일지 겸 메모장은 눈에 띄는 책상에 연필과 함께 뒀다. 회중시계에 시계 밥을 먹이고, 뭔가 쓸 만한 게 있는지 방 안 곳곳을 다시 살펴보기 시작했다.
다행히 자신을 가둔 이들도 일말의 인간성이 남아 있던 건지, 그는 찬장 한구석에서 찻주전자와 홍차 잎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알렉스는 스토브를 켜고 반합에 물을 담아 차를 끓였다. 차에 무슨 수작질을 벌인 건가, 라는 의심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서는 그런 양심 없는 짓은 하지 않았겠지, 라는 생각도 들었다. 의심은 유혹보다 약했다.
그는 그만큼 지쳤고, 차 한 잔의 위로가 필요했다.
찻잎의 향기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러자 알렉스의 마음속에서 갈등이 일었다. 그래. 어차피 죽을 거면 갈 땐 가더라도 차 한 잔 정도는…….
바로 그때, 노크 소리가 그의 귀에 들려왔다.
“알렉스 매닝햄 대위, 호출이다.”
고민이 무색하게 알렉스는 스토브의 불을 끈 뒤, 의자에 걸어 두었던 재킷과 모자를 걸친 뒤, 허리춤에 검을 차며 문 앞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정장을 입은 중년 한 명과 해군 헌병들이 그를 맞았다. 정장 차림의 중년은 알렉스를 보자, 곧바로 몸을 돌리며 그에게 지시했다.
“따라오도록.”
알렉스는 모자를 벗었다가 고쳐 쓰며, 그에게 물었다.
“어디로 갑니까?”
“사문회. 안내받지 못한 건가?”
“누구에 의한, 무엇을 위한 사문회인지는 전해 받지 못했는데. 관사에는 신문 한 부 없고. 무슨 사정인지는 알아야 협조를 하든 하지 않겠습니까?”
알렉스의 말에, 그 남자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협조는 필요 없네.”
그의 얼굴은, 옅은 비웃음을 품고 있었다.
“이미, 자유당도 자네를 버림패로 쓰기로 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