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양면 전선
공작이 의식을 잃은 지 3일째. 아델라인은 공작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몇 개월 전부터 가문의 일을 맡아서 하고 있었던 아델라인이지만, 그래도 그녀가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공작을 대신해 가주의 권한을 모두 쥐게 된 이상, 가문에 대한 모든 것을 알아 둬야 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는 10년 전 공작이 함부로 한 사소한 약속이 가문의 붕괴를 일으킬 수도 있었다. 그럴 리 없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만일을 대비해야 했다.
피오나가 개입한 게 확실한 이상, 모든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아델라인은 자신의 뒤를 따라 들어온 집사장을 향해 말했다.
“잠시 자리를 비켜 줄 수 있어요?”
“알겠습니다.”
집사장이 뒤로 물러나고 문을 닫자, 아델라인은 방 안의 조명을 켠 뒤 책장을 훑어봤다. 다양한 책들이 들어찬 칸들 사이, 제목 없는 책만 있는 칸이 보였다. 그중 하나를 뽑아 들자, 공작의 글씨체가 눈에 들어왔다.
아델라인이 태어나기 직전부터 쓰기 시작한, 공작의 일기였다.
“…….”
아델라인은 의자에 앉아 일기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평소의 공작이 내보이는 인상만큼. 일기의 내용도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불륜설에 관한 내용은 단 한 번 언급만 있었을 뿐, 마치 논할 가치도 없다는 듯 한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1년 정도 지났을까.
날짜도 적지 않은 빈 페이지에, 공작의 필체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낙서들이 적혀 있었다. 그 낙서들에서 그녀가 알아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F로 시작하는 무언가뿐이었다.
다음 일기가 써진 날짜는 마지막 일기로부터 2주 뒤.
공작의 필체는 변함이 없었지만, 어딘가 날이 선 듯한 인상을 주는 글씨체였다.
그리고 아델라인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 그때, 왜 엘리자는 아무 말도 못 했던 걸까.
- 힘이 다한 엘리자에게 묻기에는 너무 가혹한 질문이었을까. 다른 질문도 많았을 텐데, 왜 나는 그 질문을 했을까.
- 병신이다. 나는 병신이다. 다른 질문을 했다면, 이렇게까지 처참한 기분은 아니었을 텐데. 온전히 그녀의 죽음을 슬퍼할 수 있었을 텐데.
- 처음에는 그저 엘리자의 얼굴을 많이 닮았다고 생각한, 그 무엇보다 사랑스러웠던 아이의 얼굴이 지금은 꼴도 보기 싫어졌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내게 부탁한 아이인데, 자꾸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 왜 그녀는 내게 나만을 사랑했다 말하지 못했을까. 거짓말이라도, 순순히 속아 넘어갈 생각이었는데. 왜.
- 집사장이 술병을 가져갔다. 정신 차리라며 냉수를 줬지만, 냉수를 마실수록 속이 더 쓰리다.
- 아이에게는 죄가 없다. 하지만 나는 그 아이를 내 딸로 받아들이기도 힘들 것 같다.
- 아델라인 폰 로피츠. 루거 가의 적당한 영식과 결혼시켜 보내려면, 도이치 식 이름을 지어 주는 게 맞겠지. 나와 함께 있어 봤자, 서로에게 좋지 않을 것이다. 정은 지금부터 떼어 두자.]
그 문장에서, 아델라인의 눈이 번뜩 떠졌다. 아델라인의 이름이 공작의 이름과 양식이 다른 이유, 마르틴 폰 루거와 같은 ‘폰’이 이름 가운데에 들어갔던 이유.
“…….”
지금까지 되짚어 보면, 공작은 자신에게 ‘딸’이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그때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지만, 지금에 와서는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듯했다.
아델라인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들었다. 이 세계에서는 가족이라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아버지라는 사람에게 듣는 저를 향한 적나라한 감정은 제 마음을 뒤흔들고 있었다.
일기 속의 공작은 지난 2주일간 쌓여 있던 이야기가 많았는지, 아니면 술기운이 펜을 움직인 건지, 연결되지 않은 문장이 연속해서 이어졌다.
의미 없는 술주정에 가까운 문장들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더 읽는 의미를 찾을 수 없어 다음 일기로 넘어가려는 찰나, 아델라인의 눈에 한 문장이 들어왔다.
[- 문득 4년 전 즈음이 떠오른다. 아이를 낳자마자 몸조리를 하기도 전에 스스로 오두막을 뛰쳐나가 강물에 몸을 던진 황후궁의 시녀가.]
4년 전.
아델라인은 일기를 내려놓고 생각에 잠겼다. 떠오르는 사람은 단 한 명.
알렉스.
“그렇다면… 이건.”
아델라인이 침을 꿀꺽 삼키며 다음 장으로 넘어가려는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공녀님, 접견 요청입니다.”
나이아의 목소리. 아델라인은 일기를 덮고 고개를 들며 답했다.
“들어와.”
그러자 나이아는 문을 열고 아델라인에게 다가왔다.
“걸러 내지 않은 걸 보면 급한 일이거나 중요한 일이겠네.”
“마일즈 부수상님의 보좌관께서 오셨습니다. 시간을 다투는 일이라고 합니다.”
“내 서재로 불러. 나이아가 직접 차 내오고. 상황이 상황이니까.”
“알겠습니다.”
아델라인의 지시를 받은 나이아는 곧바로 집무실을 나섰다. 아델라인은 공작의 일기를 원래 있던 자리에 꽂은 뒤 집무실에서 나왔다.
복잡한 심경이었다. 그래도 이 감정에 휘말려 시간을 흘려보낼 수는 없었다.
아델라인은 자신의 서재로 향했다. 그사이, 책상 위에는 주치의가 놓아둔 서류가 있었다.
아직 의식은 불명. 호흡, 맥박, 혈압은 정상. 체온도 정상 유지 중. 언제 깨어날지는 불분명.
이 세상은 소독법조차 독주와 페놀산에 기대야 할 만큼 의료 기술이 뒤처져 있었다. 정확한 수치를 알고자 하는 건 사치에 가까웠고, 그저 주치의의 경험에 기반한 추측만이 아델라인에게 전해질 뿐이었다.
좋은 소식은 하나도 없었다. 아델라인은 차트를 내려놓으며 손으로 눈을 덮으며 알렉스를 떠올렸다. 알렉스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했을까. 알렉스가 곁에 있었다면 어떤 말을 해 줬을까.
다시 만날 날까지 며칠 안 남았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알렉스가 보고 싶어 갑갑한 마음은 여전했다. 지금같이 힘들 때 알렉스가 곁에 있어 준다면, 더욱 힘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알렉스가 마차에서 내리던, 그 마지막 뒷모습을 떠올리던 아델라인의 귀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아델라인이 눈앞에서 손을 치우며 앞을 바라봤다. 그러자 자유당 연회에서 만났던 마일즈 의원의 보좌관이 안으로 들어왔다.
아델라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가며 인사를 건넸다.
“다시 만나 뵙게 되었네요, 체스터 보좌관님.”
“갑작스런 우환에 유감을 표합니다, 남작님. 의장님께서는 어떠신지.”
“주치의 말로는 안정을 되찾으셨다고 해요. 하지만 의식을 되찾는 건 아직.”
“그렇습니까…….”
“일단 앉으세요. 곧 제 시녀가 차를 내올 겁니다.”
“감사합니다, 남작님.”
아델라인은 체스터에게 자리를 권하며 소파에 앉았다. 그러자 체스터는 그 맞은편에 앉아 아델라인을 바라봤다. 아델라인은 그 눈을 마주 응시했다. 무언가 또 문제가 생겼다는 걸 짐작할 수 있는, 초조한 눈이었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나이아가 서재 안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 앞에 찻잔을 놓고 차를 따른 그녀는 쟁반을 테이블에 놓은 뒤, 아델라인의 뒤에 섰다. 그러자 체스터는 나이아를 바라보며 아델라인에게 넌지시 질문을 했다.
“저 시녀는…….”
“절 보조해 주는 역할을 맡고 있어요, 그린우드 부의장님의 제자이고요.”
아델라인의 설명에, 체스터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그편을 더 선호하실 것 같기도 하고.”
“여유를 부리기에는 상황이 급박하니까요. 말씀해 주세요.”
“…파견 중대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 말에, 찻잔을 들어 입술을 축이던 아델라인의 눈이 부릅떠졌다.
“문제가, 생겼다고요?”
아델라인의 되물음에, 체스터는 가방에서 서류철을 건네며 말했다.
“일주일 전, 남해군도의 한 섬에서 군사 작전이 진행되었습니다. 그 작전을 통해 정보 길드 아스테리오스의 수장 세이드가 사살되었고, 아동 연쇄 납치 사건의 피해아동 78명을 구출했습니다.”
“…문제가 뭔가요.”
“…….”
아델라인의 물음에, 체스터는 말없이 서류철을 바라봤다. 그러자 아델라인은 서류철을 펼쳐 자료를 읽어 내려갔다. 그러다, 그녀의 시선이 한 지점에서 멈췄다.
[아군 피해. 전사자 3, 중상자 10.
적군 피해. 전사자 214. 성인 151, 미성년자 63.]
아델라인이 그 지점에 시선을 고정시킨 걸 본 체스터는 그녀를 향해 말을 건넸다.
“작전 중 미성년자 사상자가 다수 발생했습니다.”
그 말에, 아델라인은 손을 떨며 서류철을 내려놓았다. 알렉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델라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찻잔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손에 들린 찻잔은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유가 있을 거예요.”
그러자 체스터는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파견 중대와 HMS 헬리온의 지원 병력의 공통적인 진술로는 그들 모두가 무장 상태였다고 합니다. 남해 함대 조사 결과도 비슷합니다.”
“…….”
“항해박명 시점이었기에, 작전 병력을 지휘하던 알렉스 매닝햄 대위는 미성년자와 성인 사병을 선별해 제압하는 것은 힘들었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중화기를 사용해 적들을 제거했고, 세이드를 사살하는 데도 성공했으며, 피해 아동들도 구출에 성공했습니다.”
그 말에, 아델라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대체 무엇이 문제냐는 듯 묻는 표정에, 체스터가 곧바로 답했다.
“남부당에서 내각 정상화를 위한 논의에 대한 조건으로 이 작전을 지휘한 알렉스 매닝햄 대위에 대해 사문회를 요구했습니다.”
“사문회요?”
낯선 단어의 출현에 아델라인이 물음을 던지자, 뒤에 서 있던 나이아가 그녀에게 설명했다.
“귀족 5명으로 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정부 부처의 관료나 군의 장교를 문책하는 제도에요. 청문회와 달리 기록을 공개할 의무도 없고, 군사 재판도 아니어서 변호인을 선임할 수도 없어요. 거기에 특정 주제를 정할 필요도 없고요.”
“입헌군주제 이전의 법률에 남아 있던 제도라, 사실상 사장된 제도인데.”
나이아는 체스터를 바라보며 질문했다.
“내각은, 이걸 받아들일 생각인가요.”
그러자 체스터는 잠시 입술을 깨문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린우드 의장 직무 대행께서 반대 의사를 표했습니다. 하지만 당장 내각을 정상화해야 하는, 아니 최소한 자유당이 그런 시도를 하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 이유가 생기고 말았습니다.”
“뭔가요.”
아델라인의 물음에, 체스터는 그녀를 향해 또 다른 서류철을 건넸다. 아델라인이 서류를 받아 들자, 제국 중앙거래소의 동향을 분석한 보고서가 적혀 있었다.
“주식이 급격하게 하락했군요.”
“며칠간 계속된 혼란으로, 주식 시장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몇몇 종목은 이미 하락세를 보이고 있고, 다른 종목들도 그동안 유지되던 상승세가 완만해지고 있습니다.”
“증거금 제도를 이용하는 투자자들이 많을 텐데요, 그동안은 급격한 상승장이었으니. 하지만 이런 상황이 이어지면, 곧… 매도 주문이 늘겠군요. 손을 놓고 있으면 주가 폭락이 이어질 테고.”
아델라인의 예측이 맞다며 고개를 끄덕인 체스터는 변명에 가까운 말을 이어 나갔다.
“자유당 측에서는 시장 정상화를 위한 자금 투입 계획을 준비했지만, 이를 실행해야 할 경제부 장관이 하필 남부당 측 인사입니다.”
그러자 아델라인은 이를 뿌드득 갈며 체스터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제국의 대응 여력을 인질로 잡고 있는 협박범과 이야기를 하기 위해, 매닝햄 대위가 사문회로 끌려가야 한다고요.”
“…….”
“사문회에 대위를 보내면, 남부당이 순순히 협조한다는 보장이 있나요?”
아델라인의 물음에, 체스터는 고개를 다시 한번 푹 숙였다. 그런 보장은 없었다. 자유당이 협상 테이블로 나온다고 해도, 남부당은 그들이 내걸었던 ‘필즈먼 해임’이라는 조건에서 움직이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그런 상황에서, 오직 ‘자유당이 노력했다’라는 명분을 위해서. 황후와 척을 지게 된 알렉스가 황후를 뒤에 둔 남부당이 주관하는 사문회에 끌려간다는 생각을 하자 찻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알렉스를 지켜야 했다. 그가 억울한 상황에 처하도록 둘 수 없었다.
그가 줄곧 자신을 지켜 왔으니, 이제는 자신이 알렉스를 지켜야 할 때였다.
“…로피츠 공작가가 시장 안정에 힘을 보태겠습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아델라인의 말에, 체스터는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뒤, 아델라인의 입이 열렸다.